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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독감 7] 바벨탑의 언어와 피사탑의 언어

김훈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두부   기사입력  2002/04/23 [16:49]
김훈의 世說

{IMAGE2_LEFT}김훈 世說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세상에 대한 공격적인 언사가 주(主)를 이룬다. 공격적인 언사라 한다면 옳지 못한 것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좀더 이야기하자면 세상은 옳지 못하다. 옳지 못한 세상에 대한 김훈의 올바른 질책은 이렇다.

‘여자의 몸을 이처럼 사회 전체의 노리개로 삼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이영자에게 쏟아지는 이 사회의 도덕적 분노가 두렵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더 이상 가짜 희망을 말하지 말라. 민주주의와 위기극복의 이름으로 인간의 구체성을 추상화하지 말라’, ‘세금받을 일 있으면 정확히 받고, 낼 일 없으면 법정에 가서 따져라. 그러나 자유와 정의를 앞장 세운 이 절망적인 개수작들을 당장 집어치워라’ 등등 김훈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서부터 개인의 문제에까지 개인적인 세계관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55편의 世說들은 날카로우면서도 시적인 언어로 저널리스트적인 언어로 무장되어 있어 김훈의 산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그러면서 세상과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는, 아니 점점 멀어지기는 계속되고 있다.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말하기의 어려움>

그는 세상에 대해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바벨탑의 언어로 가득 찬 세상은 그가 아무리 질타해도 공허하고 속(俗)된 말들로 넘쳐 흐르고 있다. 세상의 ‘말’들이 세상을 뜨고 있다.

김훈의 도저한 위악과 진실

사전에 위악(僞惡)은 ‘짐짓 악한 체함. ↔ 위선(僞善)’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김훈은 지금 위악적인가? 그렇다. 김훈의 위악은 작품 곳곳에서 가감없이 보여지고 있다. 진실이 없는 세상은 위선을 부리는 무리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들에게 위선은 진실이 없는 세상에 대한 대응 방식이자, 어쩌면 삶의 변용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만이 이 진흙탕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김훈은 위악을 부리면서 짐짓 악한 체하면서, 위선을 부리는 세상 사람들의 허위를 한 꺼풀씩 벗겨 놓는다.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도대체 개그우먼 이영자는 무슨 죽을죄를 지었길래 저 지경이 되어서 처박혀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자의 몸에 대한 이 사회의 미의식은 날씬한 여자를 우대하고 숭배하며, 뚱뚱한 여자를 모멸하고 혐오한다. 이 혐오감은 이미 미의식을 넘어서서, 사회적 폭력에 가깝다. 그것을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나는 어떤가. 나도 뚱뚱한 여자를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분노에 대해>

러브로 장사를 하려면 제발 좀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비닐커튼 시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러브호텔을 애용하는 남녀들은 되도록 학교 근처 호텔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불륜을 하더라도 이만한 시민의식을 갖추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지금 러브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권장하지 않더라도 러브는 더욱 번창할 것이다. <러브호텔과 러브>

아마도 나는 일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조국독립을 원하기는 하지만 반일투쟁은 무서워서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할 만한 지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그저 그날그날 꾸역꾸역 벌어먹고 살았을 것이다. <‘국민정서’의 허깨비>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


도대체 그의 글에는 포즈(poze)가 없다. 무언가 잰 체하고 떠벌리는 허풍이 없다. 그것이 김훈의 위악이고 진실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라고 말하는 김훈은 ‘포즈가 일상화되어 버린 세상’을 혐오한다. 단지 그에게 처절한 외로움은 ‘복받는 외로움이고 사내다운 외로움이고 동물다운 외로움’이다.

그렇다면 그의 위악과 진실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것은 그가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고,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 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도저한 위악과 진실은(을) 세상을(은) 거부한다. 어쩌면 “김훈들”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자(者)은(을) 세상을(은) 거부하면서 좀더 위악(위선)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김훈은 세상에 대해 당당한가?

그런데 김훈 씨의 한겨레 입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0대 중반의 베테랑 언론인이 일선 경찰서 현장 기자로 뛴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왜 하필 한겨레에서 그런 신선한 시도를 감행하게 되었을까. 그가 한겨레 기자로 일한다는 사실에 내 머리는 너무 혼란스럽다. 김영진, <김훈 기자와 한겨레에게 묻는다>, 오마이뉴스 2002년 2월 21일.

그런 의미에서 김영진 기자의 기사는 입체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매우 건설적인 문제제기라고 봅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은 한 쪽을 변호하기 위한 말장난이거나 기교주의라 생각합니다. 최성민, <김영진 씨의 기사를 읽고>, 오마이뉴스 2002년 2월 22일.

나는 기자 김훈의 팬이다. 마니아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지 모르겠다. 나는 김영진 기자의 글을 ‘일상의 파시즘’으로 독해한다. 경력기자 채용 관행의 절차를 문제삼으면 모르겠다. 김영진 씨가 한겨레신문 독자 자격으로 참견을 한다면 나는 김훈 기자의 마니아로서 김영진 기자의 ‘김훈 시비’에 대하여 참견을 해보고자 한다. 서태영, <김훈 기자 비판에 대한 반론>, 오마이뉴스 2002년 3월 17일.


지난 2월 김훈이 한겨레에 입사한 후 오마이뉴스에서 김훈의 한겨레 입사를 두고 찬반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의 꼭지점은 단연 2000년 10월 5일자 <김규항ㆍ최보은의 쾌도난담>일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듯이 김훈은 조선일보를 옹호하며 남성 우월주의에, 더군다나 언론개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 후 그는 사직을 했으며 초야에 묻혀 ‘칼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장정일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말했듯이 이 『칼의 노래』에서의 중심축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001년 한국의 여름은 무장한 정치언어들이 백병전을 치르는 염천지옥이다. 언어의 인식기능과 소통기능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옥이 이른바 ‘조세정의’나 ‘언론자유’와 같은 민주적 가치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다고 믿는다. 나는 이 지옥의 본질을 적나라하고도 파렴치한 권력투쟁일 뿐이라고 믿는다. <‘개수작’을 그만두라>

편집권의 독립이라는 것인데, 이 거룩한 목표를 법제화하겠다는 것이 그 공론의 핵심부다. 내 생각에, 이것은 언론과 사회의 현실을 도외시한 잠꼬대 같은 소리이다.…이 독과점현상은,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그 신문을 선택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나는 이 독과점현상을 인위적인 작용이나 정치의 힘으로 ‘개선’하려는 의도에 반대한다.…정권 대 신문, 신문 대 신문, 신문 대 방송의 싸움은 전대미문의 백병전과도 같다. 나는 이 싸움의 본질이 조세정의도 언론자유도 아니라고 본다. 이 싸움의 본질은 권력투쟁이다. <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


언론개혁에 대해 이 정도까지 분노하는 김훈은 세상에 대한 당당한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에 이렇게까지 개탄하는가.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언론개혁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완전 무결한 세상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나라는 김훈이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100년 동안 신문은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해왔고, 일제시대부터 김영삼 정권 때까지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들이 권력을 키워 권력화되어 한국의 언론을 시궁창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김훈이 그걸 모르고 있단 말인가? 이 언론개혁을 최소한 김훈이 몽상하는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은가? 언론개혁은 언론개혁일 뿐 권력투쟁도, 잠꼬대도, 개수작도 아니다.

김훈이 한겨레로 간 까닭은

김훈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배고픈 시대가 문제인가, 배고픈 사람이 문제인가?’ 아마 그는 ‘배고픈 시대가 문제다’라고 답할 것이다. 정직하고 배부르게 살고 싶은 개인을 사회는 받아주지 않는다. 아니 사회는 그런 개인을 구조조정이라는 시대의 대세로 가로막고 거리로 지하철로 내몬다.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개혁이란 말인가’라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그에게 개인의 안정과 평화와 배부름은 절대적이다.

단언하건대, 배가 고파서 미군의 초콜릿을 얻어먹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그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버린 닭다리로 UN죽을 끓여먹은 것도 치욕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불가피한 생명현상이다. 초콜릿이 던져지는 방향으로 몰리던 배고픈 아이들의 민첩한 동작은 생명의 발랄한 힘인 것이다. <초콜릿과 SOFA>

그리고 그의 고통 앞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진부한 잠언은 그야말로 위선이거나 허위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제도 안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자신의 노동과 피로를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그나마 정직할 것이다.…밥과 인간의 관계는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미학적인 것도 아니다. 그 관계는 다만 실존적일 뿐이다. <떠나가는 배>

그들의 노동은 무자비하고도 거룩해 보였다. 그들의 노동은 기계적인 동작을 매번 똑같이 반복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끈, 어선의 밧줄>


이러한 김훈의 세계관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중시 여기는 듯하다.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生의 활기와 빛남을 보고 있는 김훈에게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일 뿐이다. 어쩌면 노동은 그가 절대가치를 두고 있는 동경의 대상일런지도 모르겠다.

개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 발바닥의 굳은살을 만져보았다. 땅 위를 돌아다닌 생애의 고단한 자취가 거기에 굳은살로 박여 있었다. 모든 개들이 내세에 사람의 몸으로 환생해서 착한 사람이 되기 바란다. <개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며>

오십이 넘은 나이에 그에게 굳은살이 박히게 하는 生의 현장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공간이며,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싸움터인 것이다. 신문사 신참내기들이 간다는 사회부 현장 기자, 그가 그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적인 이슈가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빛남을 발하는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 다시 태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감히 김훈에게는 체질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김훈에게 체질적이라고 했다. 김훈은 노동을 노동의 교과서적인 본질적인 것에 중점을 둔다. 또한 노동으로 개인의 행복한, 정신적․물질적 삶이 보장되기를 갈구한다.) 한겨레신문사라는 진보언론이 정말로 김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당당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김훈의 선택은 이해되고 옹호(?)되야 한다.

세상은 허무한 말 천지, 그러나 당대와 소통하기

언어는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가 있다. 형식과 내용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훈은 세상의 언어에는 시니피앙만 있을 뿐 시니피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언어의 의미가 사라지고 단지 말의 공허함만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개혁도, 언론사 세무조사도 모두 말의 상찬에 지나지 않고 개혁하자는 쪽이나 개혁을 당하는 쪽이나 모두 언어의 공허함만 부르짖고 진정한 언어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지금 김훈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인가? 그가 세금낼 놈은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세금을 내지 않겠다면 법정에서 가부를 결정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김훈이 생각하기에 세상의 언어가 그만큼 타락한 것일까? 또한 세상의 언어는 ‘파시즘’을 유포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이런 세상은 ‘지옥과 아수라’를 방불케 하는가.

그러나 어느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고위관리가 ‘그것은 나의 책임이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책임을 자인하고 나섰다 한들 그 말이 그 말이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나 그 말이 그 말인 것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이고 들으나마나한 소리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내용하다. 왜냐하면 그가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책임을 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책임질 수 없는 책임>

98년의 정치적 언어는 들뜬 바람에 불려가버린 것 같다. 말은 진화하지도 않았고 가지런해지지도 않았다. 말들은 의미소(意味素)를 모두 상실한 채 다만 무기들이 부딪치는 음향으로 쾅쾅거렸다. 총풍, 북풍, 세풍, 그리고 사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말들이 허공을 휩쓸고 지나갔던가. 그것은 가히 말의 아수라라고 할 만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하기의 어려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잠꼬대인가 술주정인가.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말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음향처럼 들린다. <‘개수작’을 그만두라>


세상의 언어는 카게무샤(그림자 무사, 적을 속이거나 유사시 대비하여 대장으로 가장해 놓은 무사)이다. 언어의 내용은 사라지고, 그 형태만 존재하여 그 어떤 말로 서로를 소통시킬 수 없는 무언어의 언어가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훈의 언어도 카게무샤일 수 있다. 그가 하는 말은 세상을 부유하고 떠돌다가, 아니 김훈의 세상살이에 상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언어는 불후한 악기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악기는 불우하고, 모든 불우한 악기는 혁명적이다. 악기는 부재하는 것들을 존재라고 우기고 존재하는 것들을 부재라고 우긴다. 악기는 무기의 질서를 넘어서고, 모든 무기는 악기를 동경한다.…불우한 것들은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김훈에게 언젠가는 초야에 묻혀 글만 쓰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당대의 언어를 초월한 그가 초야에 묻혀 세상에 대해 위악을 부리고 세상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문학적인 언어로 그의 깊은 사유가 담긴 언어로 말이다. 그의 언어는 세상의 언어를 넘어서고 싶어한다. 분명 김훈이 말하는 세상의 언어는 바벨탑의 언어다. 권력과 돈과 지위가 만들어낸 이 세상의 언어는 결코 저 높은 이상의 세계에 닫지 못한다. 그의 말처럼 지금 세상의 언어는 바벨탑을 쌓던 시절처럼 무너져내리고 있고, 그 사회의 모든 구조물들이 무너져내린다.

그런 반면 김훈의 언어는 피사탑의 언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피사의 사탑이 시간이 지날수록 기울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의 언어는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다. 그의 언어는 세상의 언어와 불화한다. 그리고 그는 불화를 원하고 기울어져 있다. 또한 그는 세상의 언어를 배반한다. 그러면서 그가 굳건히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말처럼 ‘모순에 찬 삶은 그래서 여전히 신비하기 때문’이다.

<책머리에>서 그가 이 (가장 곤고한) 글을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썼다고 했듯이 이제는 다시 세상을 넓은 눈으로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때’ 그의 산문 정신이 발하는 글을 마주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세상의 말의 논리가 ‘개별적 인간의 삶의 구체성 위에 바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원초적인 독립성과 휴머니즘의 세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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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4/23 [16: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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