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의 키워드는 ‘올림픽’과 ‘역사’라는 단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중 올림픽은 끝이 났다. 오심으로 얼룩진 올림픽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더 이상 인류 평화의 제전은 아닌 듯싶다. 이미 거대 상업자본의 이벤트로 전락한 증거들은 곳곳에서 눈에 띤다.
미국의 방송시청시간대에 맞추어 짜여진 경기 스케쥴은, 아테네 현지시각으로, 자정시간을 넘기며 경기를 치러야 하는 헤프닝을 연출하였다. 오전 10시에 치러진 축구결승전은 좀처럼 보기 드문 경기시각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와 중국 간에 치르고 있는 역사규명전과 올림픽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아마도 일방에 의한 왜곡이라는 측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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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역사왜곡에 당당하게 맞설려면 우리 역사에 대한 당당함이 선행돼야 한다. ©인터넷 이미지 |
올림픽의 위대한 주인공들은 백인만이 아니다. 오히려 백인의 숫자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올림픽은 백인들에 의해서 입안되고 조종되는 꼭두각시놀음이다. IOC는 백인들의 아성이다. 지금은 수인의 신세로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김운용의 IOC 도전은 백인들에 대한 불경죄에 해당 되었다. 김운용의 좌절과 자끄 로게의 입성은 오직 그가 백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말은 사실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 논증은 필요치 않다. 이 글은 역사에 대하여 쓰고자 하는 글인 까닭이다. 본래의 취지에 대하여 ‘왜곡’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올림픽과 과거사는 닮은꼴이다.
비단 중국과의 역사규명전 만이 아니라 작금의 사정은 ‘과거사규명’을 놓고 여와 야, 좌와 우, 노와 장을 가리지 않고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역사의 바겐세일전도 아닌 마당에 화두는 온통 역사인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역사 왜곡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이 땅에서, 과거사청산에 대한 여야의 성명전과 족벌신문들의 수작을 보고 있노라면, 왜곡의 원흉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의 정치모리배들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얼마 지나지 않은 친일과 의혹의 역사마저 바로 잡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인 대응에 허송세월하는 위정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변국의 이기적 역사인식을 어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백가쟁명 제자백가로 일컬어지는 중국 문화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동주열국지를 읽다보면 사관史官 동호董狐와 만난다. 진晉나라 영공靈公(재위 B.C 620~607), 성공成公(재위 B.C 606~600) 시기에 생존했던 뛰어난 사관이다.
진영공 시해사건 당시(B.C 607) 집정 조돈이 시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지도자인 승상으로서 구차하게 몸을 피해 국경 부근으로 달아난 점, 국내에 있으면서도 국난을 구하려고 하지 않은 점, 영공을 시해한 이들을 사후에 벌주지 않은 점 등 몇몇 중대한 과오를 필주筆誅하기 위해 ‘조돈이 도원에서 주군 이고夷皐(진영공)를 시해했다’고 기록하여 후세 사관과 사가들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필주筆誅란 무엇인가. 자의字意를 풀이하면 ‘붓으로써 벌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반드시 원칙대로 관철되지 않는 인간사의 정도와 정의, 시비와 흑백을 올바로 규명하고 그것을 사서의 기록을 통해 미화나 윤색 없이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대로 후인의 귀감과 경계를 삼게 하려는 중국 특유의 역사인식을 압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곧 사관은 투철한 사명 의식에 입각하여 당대 사실을 왜곡 없이, 특히 현실적인 권력의 위협과 회유에 굴복하는 일 없이 정직하게 직필함으로써 선악과 인과응보의 대섭리를 역사서를 통해서나마 관철하고자 하는 기사記史의 대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시애비가 며느리를 범하고 아들이 아비의 여자와 통정하던 그 야만의 시기에도 이런 필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역사는 기록 되었다. 비단 동호만이 아니다. 필주의 귀감은 제나라 태사太史 형제들의 순직 일화에도 등장한다. 제齊나라의 역신 최저가 경봉과 함께 난을 일으켜 제장공을 시해하고 태사 백伯에게 분부하기를 “실록에다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쓰오”하였다. 그러나 태사 백은 ‘여름 5월 을해일에 최저가 그 임금 광光(제장공)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그 기록에 격분한 최저는 백을 죽였다. 죽은 백에게는 중仲, 숙叔, 계季라는 세 동생이 있었다. 중과 숙 모두 형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다. 최저는 막내 계에게 다시 명령한다. “너희 형 셋이 다 죽었는데 너도 생명이 아깝지 않느냐? 내가 시키는 대로 쓰면 너는 살려주마.” 태사 계가 대답한다.
“사실을 바른 대로 쓰는 것이 역사를 맡은 사람의 직분입니다. 자기 직분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옛날에 진영공이 죽임을 당했을 때, 태사 동호는... <중 략> ... 그러나 조돈은 그 실록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으로도 사직史職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쓰지 않더라도 반드시 천하에 이 사실을 알릴 사람이 있을 것이니, 아무리 해도 최우상이 저지른 일을 감출 순 없습니다. 자꾸 감추려 들면 도리어 식자 간의 웃음거리만 됩니다.”
역사란 그렇게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설혹 비겁한 사관이 있어 역사를 한 순간 왜곡하여 기록하고 조작하여 전승하려 할지라도 태사 계가 꾸짖듯이 ‘천하에 누군가 있어 올바른 사실은 알려지’고 전승되어 언젠가는 그 사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영명한 승상 조돈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여 도망친 사건 하나로 동호의 붓에 조롱을 당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중국이, 하물며 엄연하고 장구한 역사와 사직을 가지고 있는 한 나라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 현실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불문하고 참으로 수치스럽고 슬픈 일이다.
중국의 딜레마-오랑캐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다
당대 중국의 동북공정은 진秦의 시황이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이른바 분서갱유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영명한 결단으로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웠던 시황 정政은 오직 자신의 율법만으로 제국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런 그에게 예와 의, 그리고 인을 중시하는 유학은 나라를 망조 들게 하는 귀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이유였다.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를 파묻는 것으로 자신의 제국은 영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법과 통치를 확인하기 위해 죽는 날까지 수레를 멈추지 않았다. 순행巡行이다. 그 순행길의 마차에서 불사의 꿈을 꾸던 시황은 죽었다. 순행의 다른 말은 공정이다. 그 공정의 말로는 그가 죽은 지 불과 6년 만에 진의 멸망으로 끝이 났다.
역사의 심판은 준엄하다. 중화사상을 내세우며 소수민족을 경원시하던 중국이 이제는 다민족통일왕조의 역사관을 중화의 중심으로 내세운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부르는, 그들 스스로 오랑캐라 부르던 민족들의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중화(中化)시키고 있는 것이다. 알기 쉽게 중국사의 섞어찌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여러 해설들이 분분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랑캐의 역사를 제외한 중국의 역사는 없다. 그것이 중국이 숨겨두고 전전긍긍하는 중국의 딜레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진秦은 서융의 나라다. 중화 중원에서 바라본 진은 소위 험준한 지형으로 고립되어 있던 관중 혹은 한중 또는 파촉의 오랑캐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제의 환공에 이어 두 번째로 패업을 이룩한 진晉의 목공이 19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진의 제후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방 오랑캐의 나라 진秦의 목공이 뒤를 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절 서융의 수많은 부족을 통합하여 나라의 모습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진秦나라가 강성한 군사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춘추 패자의 반열에 들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이 중화에서 비껴나 있던 서융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춘추 오패 중의 하나였던 초나라 역시 남만의 오랑캐 국가였으며 춘추시대 말기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오의 부차나 월의 구천은 바로 진나라와 똑같은 이유로 중화역사의 중심에 들지 못했다. 진시황 사후 중원을 장악하였던 항우는 바로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손자였고,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왕조의 시발이랄 수 있는 한고조 유방의 패업은 바로 진시황의 땅 관중에 근거하였다. 패현 출신의 일개 건달에 지나지 않았던 유방이 전국을 장악하였던 항우와의 건곤일척의 싸움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도 중원의 변방 관중의 지세에 힘입은 바 크다. 저 유명한 삼국지의 유비 역시 바로 그 관중의 땅에서 천하를 삼분하지 않았던가.
유방이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지은 것은 한중의 지명을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중화사상의 원류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대는 거의가 갈기갈기 쪼개져 쟁패하던 전국시대의 복사판이다. 한나라 400여년을 이어 수, 당, 명 정도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일 것인바, 그 사이의 원나라는 몽골족의 나라였고 오늘날 중국역사의 바로 앞은 만주족의 청나라였다. 기타의 역사는 각기 쪼개져 싸우던 쟁패의 역사다. 이 때의 중화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원나라 때에는 몽골의 풍습이 중원을 지배하였고 청의 시대에는 만주족의 습속과 복식이 생활의 양식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들 스스로 이민족이라 부르던 오랑캐의 습속과 핏줄이 중원의 문화였으며 황하와 장강에 흘렀다.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은 전설 속에서나 전해지는 삼황오제의 요순시절에나 합당한 말일 것이다. 한족의 순결성이란 도저히 불가능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는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러니 어제까지 오랑캐였던 나라들의 역사를 그들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으로 황하가 흐른 것이 아니라 이민족의 난잡하고 불순한 정액들이 황하로 흘러들고 넘쳐난 것이다. 그것이 부끄러워 황하는 바닥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늘도 누렇고 탁하게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자신들의 지방정권이었다니.... 그 때의 만주벌판은 여진과 거란과 돌궐 등 수많은 부족들이 나라의 모양도 채 갖추지 못한 부족 공동체의 터전이었다. 그 광활한 만주벌판을 통합하고 호령하던 통일 왕조가 바로 우리 민족이 세운 고구려라는 발전된 국가체제였다. 고구려의 멸망 후, 발해가 건국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여전히 만주벌판이 통합된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당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한 미개의 대륙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영남의 소국 신라가 당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 슬픈 유산 때문에, 한 때 우리의 국경선이 한반도의 남쪽에 국한 되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몽골족의 나라 원에 의하여 광활한 중원이 지배당하던 때에, 우리는 삼별초의 항쟁으로 몽골족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중국인의 나라가 없었다. 중화의 핏줄 중국의 역사는 단절되었다. 그런 중국인 주제에 대고구려가 자신들의 나라였다니... 중화는 중국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중화(中禍)의 불길한 징조인 것인가.
역사란 갱(坑)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만을 탓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올바른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방치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동북공정이라는 이상한 침략을 당하고 있는 근본 이유다. 어차피 역사, 특히 자국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자국이기주의적으로 경사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역사조작은 바로 이런 자국 중심의 세계관의 반영이다. 그런 때에 우리는 오욕된 정권의 편의적 발상과 피지배자의 우매화를 통한 권력의 공고화를 위하여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는 현실을 묵인하거나 심지어는 방조하여 왔다.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인 것이다.
그 시대의 생생한 증언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바로 전시대의 역사 규명조차도, 궁색한 변명과 여론을 혹세무민하는 호도의 무리들로 인하여,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정신 나간 사회 지도층의 요설은 차마 토해 뱉어낼 수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논리를 점잖게 옮기면, ‘아픔과 수치는 그대로 묻어두고 내일을 향해 나가자’다. 헛소리다. 역사란 묻혀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억지로 묻은 자가 있다한들 언제고 뛰쳐나올 살아 있는 귀신이 역사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그것에서 교훈과 전범을 배우고 전망을 생산해내는, 그리하여 다시는 역사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주는 민족과 국가 장래의 방파제이며 최후의 보루다. 그것을 갱하려 하는 모든 시도와 무리들은 바로 그 역사의 심판에 의하여 갱 당할 것이고, 그 때에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의 지옥에서 영원불사 할 것이다.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