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을 삼킨 것은 동해의 파도 아닌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발해뗏목탐사대(대장 방의천, 이하 탐사대)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누구나 그러하듯 실패한 도전은 조명을 받을 수 없다. 이번 발해뗏목탐사는 목숨을 건 항해였지만, 결국 후세에서는 ‘그때 그 사람들’의 그런 일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지난 98년 1월 23일, 탐사에는 성공하고 도착 직전 불의의 사고를 당한 ‘발해해상항로 학술뗏목대탐사대’ (이하 발해1300호)와 함께 ‘실패의 역사’로 규정할 것이다.
지난 19일 발해의 고토인 러시아 끄라노스키 인근 포시에트항을 떠나 장도에 오른 탐사대는 출항 이후 얼마 안돼 5m 높이의 파도를 맞아 위성장비는 불통이 되고 식량은 유실됐다. 이후 뗏목에 오른 탐사대원들은 구조만 기다리며 혹한의 날씨 속에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연락두절 직후 해경 측에서 발빠른 대응과 북한의 협조 아래 초계기가 떳고, 21일 오후 4시 18분 독도 북방 242마일 지점에서 표류하는 뗏목을 발견, 22일 새벽 7시 탐사대원 모두 해경 구난함 삼봉호에 승선, 귀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속한 언론보도, 해경 및 관계기관의 협조,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네티즌들의 관심 속에 신속한 구조작업이 펼쳐졌고, 그로 인해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월요일 오후부터 긴박해지기 시작한 ‘실종’ ‘재난’ ‘생사확인’ 등의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사실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가장 원시적인 뗏목으로 동해를 지난 1천여 Km, 2500리 바닷길을 간다는 것은 무모할뿐더러 상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무모함이 거꾸로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과학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사실이라는 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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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뗏목탐사 출항제 및 용왕제를 마친 탐사대원 및 관계자들이 뗏목탐사선에 올라 안전항해와 무사귀환을 다짐하고 있다. ©대자보 |
과거 발해인들은 음력 10월에서 1월 사이 바다에 배를 띄웠다. 이때가 한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러시아 근해에 배를 띄우면 울릉도 독도를 경유, 일본의 서북부 지역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락두절 상태에 대해 언론이 ‘실종’ ‘재난’ ‘생사여부’ 등을 언급한 것은 사실 발해뗏목탐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언론의 구조활동을 폄훼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지난 98년 1월, 발해1300호의 참극이래 무려 7년 동안 고대 발해와 일본 간 해상무역로를 재현하겠다는 이 뜻깊은 의의에 대해 언론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지 않은 점에 있다.
사실, 이번 발해탐사는 시기적으로 촉박했다.
탐사대 방의천 대장의 기본구상에 의하면 탐사 전 최소 탐사대원 간 6개월의 합숙훈련, 발해1300호처럼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에서 뗏목제작 후 시운전 등 8개월 이상의 훈련과 제작기간이 요구된다고 했다.
이런 계획도 7년이 흐르면서 퇴색해가고 무디어지면서, 이번 탐사도 지난 12월 중순 협찬사인 SK텔레콤의 지원 속에 급속하게 진행된 결과이다. 따라서 블라디보스토크 현지 제작이 아닌 강원도 거진에서 뗏목을 건조해야 했고, 시운전 겸 점검을 할 새도 없이 예인선에 묶어 러시아로 이동해야 했다. 너무 늦어진 일정으로 바다는 사나웠고, 파도는 거칠어졌다.
이번 보도처럼 언론들이 좀더 일찍 관심을 갖고 국민운동으로 승화 했었더라면, 발해뗏목이 그렇게 쉽게 좌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7년간, 발해뗏목탐사대를 이끈 방의천 대장 또한 이런 어려움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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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5일 거진항에서 열린 발해뗏목출정식에서 각오를 밝히는 방의천 대장 ©대자보 |
"이 일이 어디 7년이나 걸릴 일입니까? 정부의 관련 부처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난색을 표명하더니 다그치자 오히려 훼방을 놓는 기분이 들더군요. 무슨 또라이 같은 짓거리냐 이거지요. 상식적으로 보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 탐사는 발해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우리 조상의 진보적인 얼을 본받자는 데에 의미가 있었지만 진행 중 하나가 더 붙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무사안일, 대충주의, 복지부동을 깨는 것입니다. 7년은 이것과의 싸움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탐사에 온 정신을 빼앗겨야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일에 진을 다 빼앗기고 만 거지요." 사실 탐사대는 의기충천해서 동해 거센 파도에 맞선 것이 아닌,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바다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정부와 관련기관, 기업들의 무관심,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방 대장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히말라야를 뒷동산 오르듯이 등정한 그가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뗏목 상황이 지지부진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의심이나 눈총을 받게 될 경우 가장 서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바다에 뗏목을 띄우는데 까지 성공했다.
방 대장은 무엇을 바라고 뗏목을 띄웠는가? 사실 간단한 것이었다.
“발해 뗏목의 출발이유는 우리의 엄연한 역사인 발해사를 몸으로 고증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이것을 실행하도록 만든 힘의 근원은 사실 다른데 있다. 나에게 항상 질문하고 관심을 가져주었던 초등학생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초등학교 학과 시간에 순수한 아이들이 전화를 해와서 이번엔 정말 출발 하냐? 언제 출발 하냐? 고 물었고, 나는 그들에게 뗏목을 띄울 것을 약속했다. 그 아이들과의 약속이 이제는 정말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답을 해줘야 할 때가 왔다. 인간의 역사는 계속 탐험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한번 실패했다고 다시 도전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발전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험을 하다가 이미 죽은 사람들은 선각자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그들을 위해 탐험은 성공해야하고 완성해야 한다. 이미 시작한 탐사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만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3명의 대원과 함께 동해에 몸을 맡기고 들어갔다. 거진 출항제에서 동해의 용왕에게 ‘용왕제’까지 지내고 왔지만, 동해는 탐사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중국은 30여 년 간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차원의 주도로 고구려 발해역사를 일찌감치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고,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이라고 선포하는 등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고 있다. 아니 역사왜곡이 아닌 기정사실화 하려고 광분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정부와 학계는 무엇을 했던가? 남북으로 갈려지고 동서로 나뉘어 민족정기 조차 세우지 못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홀대 속에 축소만 되가고 있다. 이같은 역사의 퇴행을 방 대장과 탐사대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동해의 거부는 지금 우리가 아직도 발해를 찾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업을 소수의 몇 사람만 져서는 안됨을 엄중하게 경고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방 대장은 항해에 앞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 우리나라는 발해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서태지씨의 히트곡에 '발해를 꿈꾸며..'가 있고 또 어떤 정치인의 홈페이지 대문에는 '발해를 꿈꾸며'라는 슬로건을 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발해에 대한 꿈만 꾸고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발해를 꿈꾸지 않는다. 나는 발해를 간다!” 비록 이번 탐사는 좌절됐지만, 뗏목은 부서짐으로써 새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모두 ‘발해’가 되고 모두 하나가 되어 ‘방의천’이 되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1300년이나 대한민국의 허공에서 헤매는 발해의 혼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도전은 실패했지만, 무사 귀환한 탐사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