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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이나 써먹은 불판, 진짜 갈아치우자
[주장]탄핵정국 개콘'4인4색'닮은꼴, 진보정당 원내진입으로 판갈이해야
 
임흥재   기사입력  2004/03/26 [07:10]

우연한 기회에 칼럼니스트니 인터넷논객이니 하는 과분한 수사를 이름 앞에 전치시키며 2002년 내내 글을 쓰며 밤잠을 설쳤던 행복한 고통의 기억이 생각난다. 그 후 스스로 부대끼면서도 쓸 수밖에 없었던 정치성향의 잡문들과 결별하고 생활인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애초부터 관심을 가지고 생산해내고 싶었던 문화적 담론들마저도 나의 부족을 경계하여 가능한 한 읽기에 열중하려 모니터와도 정을 끊은 지가 일년여. 그렇게 맞은 2004년 새봄의 벽두에 탄핵안 가결이라는 초유의 헤프닝이 이 땅에서 저질러졌으니 귀와 눈의 기능을 마비시키지 않고는 애써 무관심하려 했던 나의 생활도 이제 '탄핵'되었다.

3월 12일. 방송을 보다가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 날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 된다.

“본래의 사람다움과 문명의 우월함으로, 비록 나라를 빼앗겼어도 끝내 잃지 않았던 겨레의 드높은 정신과 지조로 지켜온 이 땅이....  미친 야수와 야만의 폭력에 의해 짓밟히고 찢겨나가던 죽음의 날 3.12”

울분과 자책의 그 주말이 지나고 아름다운 시민들의 조용한 염원이 광화문을 촛불로 밝히던 3월 20일 또한 지나간 날들 가운데, 정국은 요동치고 급락하는 지지도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제 정치집단의 현란한 말잔치를 듣고 보면서 오히려 이제는 차분히 돌아와 거울 앞에서 나를 보고 우리를 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거룩한 우리의 신념과 꼭 맞게 불변하는 우리의 신념 중의 하나는 여의도의 국해의원(國害議員오타가 아님)들은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하이브리드(hybrid:혼종,잡종)라는 것이다.

며칠째 무엇인가 써야한다고 작심하면서도 쓰지 못하고 괜한 불면의 고통에서 신음한다. 김영선이 토론회에 출연하여 나와 같고 자신과 동세대인 “30대 40대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학습을 했느냐? 사회를 운영할 능력을 충분히 배웠느냐?” 하는 망언과 망발을 해댈 때도 그랬고 어떻게 결정한 파병인데 이제 와서 파병지 문제로 설왕설래 하는 것인지, 군복 입은 양키들이 저들 살 집을 지어내라는 그 망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이 수치와 분노의 땅에서는 침묵하고 살기란 죽음보다 더한 막막함을 견디어 내야만 하는 일이다. 

탄핵정국이 요구하는 것

작금의 탄핵정국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모 공영방송의 개그콘서트의 <4인4색>코너가 생각난다. 동화구현가, 쇼호스트, 동물학자, 스포츠캐스터 등 4인이 저마다 자신의 말을 하고 그 말들은 절묘하게 끊기어 다른 이의 말과 연결되면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로 전개 되는 이 개그의 장면은 그대로 우리 정가의 라이브 화면이 된다. 정파 간, 혹은 정파 내부에서조차 저마다 탄핵의 정당함과 부당함, 그 후의 정국의 요동을 진단하는 제각각의 목소리들이 들려오지만 그 소리들은 희화(戱畵)된 개그 장면처럼 그 진실한 의미들은 알 수가 없고 고장 난 스피커의 윙윙거리는 소음으로 바뀌고 만다.

며칠 전 탄핵정국에 대한 변희재(브레이크뉴스 기획국장)의 <우리당의 독선과 민주당의 눈먼 복수심이 빚은 비극>이라는 진단기사를 읽었다. 대체로 변희재의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탄핵의 막전막후를 바라본다. 그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글의 초안을 쓰기도 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다른 시선이 존재함을 규명함이 별 무소용함으로 곧장 이 글의 논지에 충실하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탄핵의 막전막후는 대선에서의 노무현에게 기대한 개혁에 대한 열망과 청와대에 입성한 후의 노무현 정권의 변질(변희재의 표현을 빌면 ‘보수화’)과 그 기대가치의 충돌과정에서 맞이한 총선에서의 제 정파의 올인전략이 부른 파국이라는 것이다.      

위의 이 결론에는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합법적 탄핵의 순결함 뿐만이 아니라 우리당의 쿠데타설, 그리고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노무현 혹은 그의 추종자들이 고도의 정략적 결과를 예측하여 총선의 필승카드로 선택한 자작극설 까지를 내포한다. 이에 대한 논증은 필요한 시기에 또는 그 논증을 자의건 타의건 간에 해야 할 상황이 도래한다면 그 때 하기로 일단 유보하면서 무엇보다 내가 생각한 탄핵정국의 막전막후는 이 땅의 정치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온 올바른 정당정치의 실종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정치가 지역과 보스 중심의 기형적인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며 이 말은 곧 지역주의 타파를 부르짖으며 출범한 노무현정권이 이번 총선을 통해 지역이라는 볼모정치를 일정부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현재 정신적 여당을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의 한계를 생각할 때, 의도하지 않았을지언정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보스중심-즉 보스의 정치성향과 정치행태에 의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지는-정치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노무현과 우리당을 생각하면, 탄핵정국의 우리당과 노무현은 이제부터라도 탄핵의 시시비비를 벗어나 차별적인 정강과 정책, 두루뭉술 초계급적 중산층 서민으로 포괄하고 있는 계층의 명확한 적시, 개혁세력이니 민주세력이니 하는 죽은 명분으로 급조된 선거정당의 탈피 등을 통해 진정 제대로 된 정당의 정치, 살아있는 시스템으로서의 정당문화를 건설해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탄핵정국은 요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구를 지켜라 Ⅱ> - ‘병구’와 ‘강만식’ 

▲영화 지구를 지켜라 포스터  
평단의 찬사와 흥행의 실패라는 이율배반의 영화 한편을 오늘 떠올린다.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가 그것이다. 패러디 위에 한국사회의 현실과 상상력을 뒤섞어 비튼 것이 이 영화의 정체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으나 이왕 이 글에서 차용한 까닭으로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산골에서 양봉과 마네킹을 만들며 살아가는 병구(신하균 분)는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것이라고 믿는 이상한 청년이고 그는 유제화학의 강만식(백윤식 분) 사장은 안드로메다의 변장한 외계인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강만식을 납치하여 외계인의 침략계획을 알아내어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강만식을 고문한다. 그런데 영화의 필름이 돌아가면서 병구가 한 때 강만식의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고 함께 일했던 병구의 어머니는 이름모를 병으로 식물인간이 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아버지 역시 그 이전에 사고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지구를 지켜라>는 이처럼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황당한 두 가지이야기를 충돌시키면서도 병구의 과거를 통해 7,80년대의 열악한 노동의 현장과 민주화운동의 과정을, 그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어냈던 우리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냄으로써 황당함을 현실의 문제로 인식시키는 매혹적인 영화적 상상력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병구가 외계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강사장이 각종 비자금과 스캔들, 막강한 정치권의 실세들과 줄이 닿아 있고 치안책임자의 사위라는 대목에 이르면 패러디와 판타지의 배합으로만 여겨지던 스크린은 어느새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펼쳐진 현실의 세상이 된다. 장준환이라는 걸출한 연출가에 내가 매료당하는 이유다.

한참 전에 본 장준환의 앵글에서 오늘 나는 절묘하게 닮아 있는 병구와 강만식을 여의도에서 만난다. 자신은 자본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의 희생자라는 병구의 피해의식과 그 억압과 분노를 자의적으로 해결할려는 병구의 복수극은, 특히나 그 모순의 극복양태가 자신이 외계인처럼 생각하는 그들의 악마적 행동양식(예를 들면 고문같은)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개혁과는 거리가 먼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는 지난날 개혁을 자처한 세력(민주당)과 개혁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반감시킨 정권과 여당(파병 등, 자신들이 비판한 수구세력과의 동질성 혹은 동질적 유사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의 동영상 기록이다.

강만식은 어떤가? 그는 어처구니없는 병구의 우격다짐과 고문에 급기야는 외계인을 자처하고 가공의 시나리오를 제공한다. 그는 변신과 간계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협잡과 기회의 포착에는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살아온 이 땅의 수구기득권의 완벽한 현신이다. 우리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한나라당에서 자민련에서 얼마나 많은 강만식을 만나며 섬뜩한 공포를 경험하였나?

장준환의 영화적 상상력의 성과를, 지금 내가 만나는 병구와 강만식을 탄핵정국에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을 떠도는 것은 곧 미친 진실이며 그것을 증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구를 지켜라>의 메시지가 저마다 진실을 주장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멀더의 전언과도 같은 이 땅의 정치판을 그대로 축소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신/구 세대와 자본가/노동자 간의 계급과 허구와 사실을 대비 충돌시키고 마구 버무려 빚어낸 세상을 스크린이 아닌 현실의 여의도에서, 뉴스의 화면에서 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땅의 탄핵정국에는 병구와 강만식의 싸움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싸움은 자신들의 오해와 독선에서 비롯된 것일 뿐 우리는 아무도 그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시끄럽지 않게 저만치 물러나 싸우기나 했으면... 쳐다보기도 싫다.

대안은 ‘판갈이’뿐이다.

얼마 전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발언한 어록이 인구에 회자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 참으로 촌철살인의 지적에 나는 흠뻑 공감하며 그의 말은 살아있는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당은 지금이라도 우연히 주운 지갑을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탄핵의 반사이익을 빼면 우리당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과 별반 다른 게 무엇인가? 나 역시 여전히 노사모의 일원(노무현의 인간적인 매력까지 부정할 수 없기에)이지만 우리당에서 고작 발견하는 것은 정치의 세월이 상대적으로 짧아 상대당에 비해 때가 덜 묻은 차별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차별적 우월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

공천권의 행사가 없다하여 보스중심의 정당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동영 김근태의 대중성과 상징성을 빼면 대체 무엇이 차별적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검찰과 국정원을 자주 가지 않고 부르지 않는다 하여 개혁적이라 자랑하는 그들의 언사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참여정부와 우리당이 진정으로 개혁세력을 아우르고 이 땅의 내일을 담당할 주체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지 않아도, 정동영 의장이 여기저기 나다니지 않아도 김근태 원내대표의 순교적인 행적을 내세우지 않아도 자신들의 정책과 비젼에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여야 한다.

대안은 판갈이 뿐이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당이 지금의 추세를 유지한다면 원내 제1당이 될 것이 틀림이 없다. 이는 많은 정치신인들의 진출을 가능케 할 것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를 쉽게 흡수 활용하여 국민들과 유리되지 않은 정치를 행하는 데 유리한 정치지형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바람대로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위가 원상회복되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의 정치의 장은 모처럼 새로운 변화와 체질개선의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의 장을 가능케 하고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정직한 의미에서의 올바른 정당구조를 가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성사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 기회비용의 효율성은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다수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 된다. 내가 민주노동당, 정직히 말해 소위 진보정당의 원내진입을 애써 강조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한나라당 민주당 우리당 자민련 등 기존의 정당들은 이 땅의 헌정사를 관통하면서 그 뿌리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시대에 따라 서로 경쟁하기도 때로는 야합하며 몰래 모사하며 자신들의 족보를 유지계승하여 온 본은 같고 성만 다른 한 씨족이다.

그런 정당구조의 정치판에서 새로운 정치의 실험은 늘 실패와 좌절로 끝이 났다. 이는 우리의 헌정사가 그대로 웅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노회찬의 말대로 50년 써먹은 불판으로는 고기를 구울 수 없다. 판을 갈아 새판에서 타지 않고 노릇노릇 맛있게 익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행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행히 우리의 선택이 선하여 기존 정당에 참신한 인물들이 다수 당선이 된다하여도 그들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미 말하였듯이 차라리 그들은 총선 후 함께 합쳐 한 씨족 다수파로 갈라져 있어 초래되는 혼돈을 줄여주는 것이 옳다. 비슷한 노선과 적당히 닮은 이력으로 당의 명함만 바꾸며 나타나는 그들을 이제 국민들은 흔쾌히 한 당으로 합쳐 국고의 손실을 줄이자고 동의해주자. 그 가문의 영광을 위해 우리 국민들은 아름다운 문패를 선물하여 주자. 우리도 이제 보수와 진보의 양당 문화가 생산적으로 움직이는 선진정당문화의 꽃을 피우자.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판을 갈아야 한다. 지역구와 정당명부제에 상관없이 소신껏 우리는 우리의 노선을 결정하고 투표에 임하자. 사표를 걱정하며 나의 소신과 노선을 잠시 유보하였던 지난날의 경험은 이제 잊어버리자. 이번 총선은 우리가 진정으로 내일의 비젼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노동자 서민이 진정으로 이 땅의 주인임을 담보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문화, 깨끗한 정치문화를 선포하는 엄숙한 통과의례이며 그 시작이다.

이 땅의 주인들이여 당당히 함께 나서자.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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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3/26 [07: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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