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성폭력 사건은 언제나 묵은 기억을 들추어내게 한다. 특히 이번 사건은 그 성격상 내 일과 친연성이 크다. 나를 성추행했던 교수가 오래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먹먹했다. 살다가 이런 뜻밖의 일을 겪는 건 흔치 않기에 마음을 다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고 나서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일단은, 싸워야 할 상대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허탈했다. 발을 딛고 있던 발판이 치워진다는 느낌이 이럴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이미 세상에 없는 자에게 분노하고 저주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억울했다. 돈을 빌려주고 떼먹힌 자의 심정이기도 했다. 은퇴하여 두둑한 공무원연금 받고 노후를 즐길 것 같아 근황을 전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가 가해자와 함께 떠받게 살게 만든 허공에 대고 뿌린 분노는 어디로 갔을까.
가해자를 상대로 어떠한 법적인 수단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억울했다. 나는 생전에 사과 한마디도 받지 못했고 되레 조롱을 당했다. 어떤 반격도 하지 못한 채로 거기서 영영 멈추게 되었다. 나는 가해자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것으로 영구히 고정되었고 싸움이 불가능하다는 것만 확인했다. 수천만 원의 민사소송을 치르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곁에서 보면서 나는 그들이 무척 부러웠다. 피해로 따지면 내가 훨씬 더 컸다. 샘이 났다. 내 피해는 누구한테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 나는 운이 없는 건가. 인생이라는 본디 공수래공수거인가.
자연사한 가해자에게 느끼는 감정도 뒤엉켰던 나로서는 지금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어떤 고소인의 심정이 어떤지 가늠할 수가 없다. 어떤 말로도 마음을 추스르게 하지 못할 것이다. 고소인은 누가 가만히 내버려둬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을 그나마 줄이려면 연대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다 대고 상처를 들쑤시고 불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다. 나는 거대한 추모 행렬이 역겹다. 성추행 의혹이 별 거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공작을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21세기에 ‘미인계’ 운운하는 사람도 나온다. 그 정도까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인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추모 행렬조차 고소인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소인이 있다는 생각을 아예 쏙 빼놓고 망자에 대한 추모의 생각만 넘쳐나니 고소인이 어떤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 심정이 어떠할지에 대한 생각은 티끌만큼이라도 차지할 공간이 없다. 공과가 있더라도 공로와 업적만 기억하자는 사람들은 뻔뻔하다. 고소인과 연루되었을지 모르는 망자의 과오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자는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다.
대통령, 청와대, 민주당 국회의원들, 그리고 민주당 지지자들. 망자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시달리다가 끝내 세상을 등진 섬세한 사람이라고 데 인식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추모라는 거대한 공감 에너지 속에서 서로 간의 응집력을 느끼고 자신들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절감한다. 힘이 큰 것은 정의로 보이는 세상에서 추모 움직임이 클수록 정당성을 얻은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정의를 확인한 이들은 비극적인 서사를 공유하고 눈물을 쏟으면서 동지애를 확인하고 감정을 정화한다. 비장하다. 비장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런 서사가 왜 필요한가.
망자에 대한 안타까움의 만분지일이라도 누군가에게 나눌 아량이 없는 사람들이 저희끼리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은 아름다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흉기이다. 그 흉기가 고소인에게만 그치지 않을 것 같아서 더 우려스럽다. 그 힘이 누구를 향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작금의 미투 운동이 불편한 이들이 불만을 표출하기 좋은 기회로 삼으려는 조짐이 읽힌다. 안희정 전 지사의 모친상 때도 그런 징조가 보였다. 사람 잡는 미투의 위력을 확인한 자들은 앞으로는 미투의 싹을 자르려고 덤빌지도 모른다. 박원순 전 시장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각오를 다질 수도 있다. 거대한 백래시로 집결할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할 과정이라면 어쩔 수 없다. 세상은 직진하지 않고 때로는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 뒤로 물러서기도 하는 경로를 거칠 수 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다치거나 상하는 사람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고인이 평생 일궈온 업적과 영예를 물리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초라하게 삶을 마무리 지으며 느꼈을 무언가가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 이 대목만큼은 나는 고소인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고도 온전히 안타까움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으니 냉정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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