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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가 말해주지 않는 것
[정문순 칼럼] 항일단체로 둔갑한 조선어학회의 진실, 권력거래도 봐야
 
정문순   기사입력  2019/02/17 [12:35]

일제강점기의 폭압적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조선어학회사건 때 이윤재와 윤징을 잃은 사실 때문에 저 말은 움직일 수 없는 교과서적 진실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킨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대해 그 과정을 생략된 채 오로지 목숨을 걸고 감행한 독립운동으로 간주하려면 좀더 숙고할 것이 있다.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말모이(조선어사전) 원고를 가진 사람이 일제 경찰의 총격에 죽거나 다치는 것은 코미디 같은 설정이다. 감독이나 영화 제작사가 상징적 의미와 현실을 구분할 줄 몰랐던 까닭에 조선어 원고 보따리가 일제 경찰에게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인 양 취급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해도 좋을까.

 

엄밀히 말해, 일제 말기 두 국어학자의 비극은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외생적인 변수가 더 컸다. 한반도가 군국주의 동원 체제의 희생양이 되었던 일제강점기 말기의 특수성과 조선어학회의 수난을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창씨개명이나 학교에서 우리말과 글 사용이 금지된 것 등을 흔히 생각하듯 조선 사람의 민족 혼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일제가 조선 혼을 망가뜨릴 생각이었다면 한반도를 병탄했을 때부터 우리말을 못 쓰게 해야 맞다. 그러나 조선어사전은 조선총독부에서 일찌감치 1920년에 발간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 한글학회가 한글전용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쁜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 엄유나 감독

 

 

일제가 우리말까지 때려잡은 황국신민화 정책은 그들이 단기전으로 추진했던 세계 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추진한 전시동원체제와 맞물리는 것이었다. ‘귀축 영미를 한 방에 몰살시킬 수 있다고 했던 당시 그들의 호언장담으로 보아 일본 제국주의는 전시체제를 오래 끌 생각은 없었고 임시방편이자 특수한 체제로 상정했을 것이다. 오래 가지 못할 비정상적인 단기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식민지 민중의 토박이말까지 탄압하는 무리수를 동원한 것이 조선어학회의 수난으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독서회 모임을 이끌었다고 해서, 용정 출신 조선인이라고 해서 사상범이 된 이원수나 윤동주처럼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씌워진 독립운동의 혐의는 근거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우리말과 글을 파고든 일이 독립운동으로 간주된 건 파시즘이라는 극단적인 체제의 산물이다.

 

일제가 전시체제로 가기 전까지는 조선어학회는 꼬박꼬박 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고 기관지 한글을 펴냈다. 따지고 보면, ‘조선어라는 말부터 차등적인 용어이다. 조선어학회가 자신들을 국어학회라고 하지 않고 조선어를 국어라고 하지 않은 이유도,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서 일본말을 국어로 인정했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깔려 있다. 우리말은 개화기나 주시경 선생 당시만 해도 국어였다. 이 점을 무시하고 조선어학회를 항일운동 단체로 간단히 등치하는 것은 2등 언어로서 모국어의 위상을 수용하는 등 조선어학회가 일제가 허락한 반경 안에서 조심스럽게 활동했던 점은 놓치게 되는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제 검찰에 기소된 인사들은 독립운동가 출신에다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안재홍, 친일에 몸 담은 의혹을 산 이은상을 포함하여 최현배, 이희승, 이병기 등 극우부터 개방적 민족주의자까지 범민족주의 그룹을 구성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일제의 무리수 때문에 항일 세력으로 몰려갖은 핍박을 받은 조선어학회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이극로와 안재홍 등 남북협상파들이 사라지면서 보수 색채가 짙어졌다. 영화 <말모이>는 해방으로 나라를 되찾으면서 빼앗긴 모국어도 찾았고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도 결실을 맺었다고 설명할 뿐 핵심 멤버들이 이탈함으로써 조선어학회의 성격이 달라진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말모이> 주인공의 모델이자 조선어학회의 핵심적 인물인 이극로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 차 북한으로 가서 그대로 남았다. 그러자 조선어학회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친북이라는 오해를 살까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재단법인 한글학회는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역대 정부에게 한글전용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활동을 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국한문혼용정책처럼 자신들의 뜻이 실현되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한글을 사랑한박정희 정권이 한글전용정책을 펼칠 때는 죽이 잘 맞았다.

 

박정희 정권은 역대 정부 중 언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가장 능했던 세력이었다. 그들은 언어의 권력적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권력자답게 그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국민들의 언어생활에 개입했다. 국무회의를 통해 광고 간판, 방송용어,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방송중계 해설, 심지어 아이들 먹는 과자들까지 외국어 일색이라며 꼭 짚어서 토박이말로 순화하라고 지시했다. 유신통치 당시의 일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일사분란한 국어순화정책이 줄줄이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교육이나 문화 부처에서 한국어를 토박이말로 바꾸거나 국민에게 토박이말 사용을 권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정책 당국도 아닌 최고통치자가 직접, 그것도 시민의 일상적인 언어습관까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했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언어정책은 전형적인 독재 정치에 속했다. 그러나 한글순화를 열렬히 주창한 한글학회는 환영했으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2005, 박정희가 한글로 쓴 광화문 현판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을 때 이를 반대하고 나서며 친권력적 본색을 다시 드러낸 것도 한글학회였다. 권력자가 기념비적인 건물에 자신의 친필을 높이 내걸어 위세를 뽐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지존께서 한글로 현판 글씨를 썼다는 것만 그들에게는 중요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게 한글전용 시행촉진 건의서를 내고, 박정희 정권 초기에 정부 보조 한글전용 특별심의회를 맡는 등 한글전용만 실현할 수 있다면 독재정권과의 밀월 관계도 개의치 않았던 전력의 한글학회로서는 한글을 사랑한 박정희 찬가를 부르는 것쯤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언어는 피지배자에게는 저항의 성격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권력에게는 지배의 도구로 쓰이는 측면이 크다. 한글학회가 나라를 빼앗겼던 시대에 그나마 벌였던 소극적인 저항은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는 견지하지 못했거나, 해방 이후 권력이 언어를 부당하게 활용한 정책에 편승했다는 점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탄압 당했던 한때의 과거를 무색하게 한다.

 

언어는 국어교과서에 일찌감치 등재된 한 외국소설에서, 독일과의 전쟁에서 져 일부 영토를 빼앗기면서 더는 프랑스말 공부를 못하게 된 어린 학생에게 프랑스말 교사가, “한 민족이 노예가 될지라도 자기 나라의 말만 잘 보존한다면 그것은 죄수가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마지막 공부’, 문교부 중학국어, 1965년)라고 웅변할 만큼 강력한 피억압자의 저항성도 있는 반면, 소설 ‘1984’에서처럼 권력이 이미 있는 말을 깡그리 없애어 언어 대중을 무식하게 만드는 데 활용한 억압적 면모도 강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언어를 둘러싼 수난과 저항의 역사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언어의 통치적이고 가해적 속성에는 무디다. 일제든 박정희 정권이든 언어 정책의 가해자적인 위상에서는 동일할 뿐이다. 한글학회는 두 집단에 대해 동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말모이> 같은 영화에서 권력과 말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읽기는 어렵거니와, 해방 이후 한글학회의 행적을 알기는 더 어렵다. 그러나 해방으로 나라를 되찾으면서 빼앗겼던 말도 고스란히 되찾았다는 말로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식으로 우리말 역사가 전개되지는 않았다는 점만큼은 알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한글학회가 한글전용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쁜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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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17 [12:3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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