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할리우드에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정문순 칼럼] 우리와 닮은꼴, 1950년대 할리우드의 김미화, 명계남, 송강호들
 
정문순   기사입력  2017/12/08 [13:30]

할리우드에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결정적 몰락을 이끈 것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였다. 최근 검찰 수사에서 블랙리스트는 청와대 비서실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니라 국가정보원이 주도했고, 블랙리스트 시작도 이명박 정부에서 먼저 한 사실이 드러났다. 두 정부는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본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좌파로 낙인찍어 지원에서 배제하고 그 중 일부에게는 전담자를 붙여 괴롭히고, 회유하고, 사찰한 사실도 드러났다.
 
위키피디아 사전에는 블랙리스트를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된 인물의 명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사전에 블랙리스트란 지원 배제 명단이라는 통상적 의미를 넘어 국민을 편 갈라 비국민으로 점찍은 인사들의 밥줄을 끊고 괴롭힌 인권침해 피해자 목록에 가까웠다. 이윤택, 이외수, 이미경(CJ부회장, 영화 변호인투자), 이창동, 문성근, 명계남, 김미화, 권해효, 이승환, 김제동, 신해철, 윤도현, 김여진, 김규리, 이준기, 김구라, 배칠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찍힌대한민국 문화예술계들 인사들이다.
 
바른 말 잘하는 연예인들의 밥줄을 끊게 한 블랙리스트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창의적인작품이 아니다. 70여년 전 미국에서도 이미 비슷한 일이 있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부상으로 미국 중심의 서방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된 당시, 미국에는 메카시즘(메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자면서 벌인 선동) 광풍이 몰아쳤고 할리우드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소련과 이념 경쟁을 하게 된 당시 체제 위기를 타개할 희생양이 필요했던 미국에서는 영화판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빨갱이사냥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영화산업 종사자들에게 빨갱이색출의 광풍이 밀어닥친 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을 중심으로 파업이 빈번했던 사실과 연관이 있다. 겉보기에 할리우드는 대중문화의 총아로서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이면에는 영화자본 대 작가·배우 간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게다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도 영화계를 능가하는 곳은 없었다.
 
정보기관과 영화 제작자들은 할리우드에 미국에 해악을 끼치는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들이 만든 영화가 대중에게 공산주의를 심어준다고 의심했다. 공산주의자로 일단 의심받은 인사들은 미국 의회가 구성한 반미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결백을 소명하거나 동료를 고발하도록 강요받았고, 거부하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다. 검은 명단에 올라간 사람들은 해고되거나, 사찰을 당하거나, 투옥되거나, 망명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자살이나 급사 등 죽음으로 내몰렸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는 1947년 처음 작성되었고 1950년대 초중반에 맹위를 떨쳤으며 1957년에 파기되었다. 이 광풍에 희생되거나 연루된 할리우드 사람들은 시나리오 작가, 배우, 감독, 음악가, 애니메이션 화가 등을 망라하고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스타들도 많다. 그들 중에는 할리우드 판 이윤택, 이승환, 김제동, 송강호도 있었지만, 동료나 직원을 팔아 일신의 영화를 챙긴 가해자들도 있었다. 우리가 몰랐던 고전 스타들의 이면을 일별해 보자.
 
[험프리 보가트]
우리에게는 눈물 나는 고전영화 <카사블랑카>의 위엄 있는 주인공으로 익숙하지만, 젊은 시절 험프리 보가트는 갱 영화의 악당 전문으로 거물 배우의 경력을 쌓았다. 보가트는 동료 배우인 아내 로런 버콜과 더불어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였다. 영화산업이 빨갱이사냥의 표적이 되자, 보가트는 로런 버콜, 감독 존 휴스턴, 배우 제임스 캐그니, 캐서린 헵번, 프레드릭 마치 등과 함께 수정헌법 1(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었고, 워싱턴에서 행진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보가트의 저항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얼마 뒤 할리우드에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보고,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신앙고백하며 색깔론피해자들과 거리를 두었다. 1951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타는 등 메카시 바람이 기승을 부린 1950년대에도 승승장구한 보가트에게 블랙리스트에 저항한 것은 이미 옛날 일이었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대명사 월트 디즈니는 평생 20번 넘게 아카데미상을 탔지만, 천재의 뒷모습은 무시무시했다. 그가 미국의 이상을 지키는 영화 연대’(MPA)라는 극보수 단체를 설립하여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할리우드 인사들을 영화계에서 솎아내는 데 일조한 것은 그나마 공개적으로 드러난 행적이었다. MPA 멤버들은 감독 존 포드, 빅터 플레밍, 배우 바바라 스탠윅 등 할리우드의 보수주의 인사들을 망라했으며,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배우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단체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최근 정보가 공개된 자료에서 디즈니는 죽을 때까지 정보기관 FBI의 비밀 첩보원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물을 밀고한 전력이 드러났다. 자기 회사의 애니메이션을 빛낸 애니메이터들을 빨갱이로 몰아 해고하거나 공산주의를 선동한다며 고발을 서슴지 않은 디즈니의 모습에서 어린이에게 꿈을 선사한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찰리 채플린]
희대의 광대 채플린은 메카시즘의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표작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 현실비판 의식이 강한 작품을 만들었던 그는 정보기관이 보기에 공산주의자로 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인간소외와 자동화를 풍자한 <모던 타임즈>는 자본주의 비판의 교과서로도 불리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뒷받침하는 영화로도 즐겨 언급될 정도다. 게다가 채플린은 영국 출신의 이민자로서 미국 시민권이 없다는 점도 약점이었다. 채플린처럼 마녀사냥을 당한 이들 중에는 유대인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 푸에르토리코 출신 배우 호세 패러 등 순수미국인이 아니거나 소수민족이 포함돼 있었다.
만드는 영화마다 걸작 찬사를 들었던 채플린이지만, 메카시즘 부상 후에는 영화가 혹평을 받거나 많은 극장에서 상영이 거절되었으며 그 자신은 정보기관의 압박을 받는 위기에 내몰렸다. 감독 엘리아 카잔이나 배우 로버트 테일러처럼 동료를 팔거나 보수주의자들의 비위에 맞는 애국영화를 만들었다면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겠지만, 위대한 채플린은 타협하지 않았다. 채플린은 반세기 동안 둥지를 튼 할리우드를 포기하고 1952년 미국을 떠났다. 그가 미국에 다시 입국한 것은 꼬박 20년 뒤인 1972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였다. 채플린은 스위스에서 삶을 마쳤다.
 
[로버트 테일러]
신파에 가까운 영화 <애수>로 우리에게 알려진 로버트 테일러는 오랫동안 MGM 영화사의 간판스타였다. 그러나 메카시즘 바람이 몰아친 1950년대 초기는 그의 영화 인생에도 위기였다.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그조차 비껴갈 수 없을 정도로 광풍은 거셌다. 이 일로 로버트 테일러가 쓴 오명은 공산주의를 고무하는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 동료를 궁지로 몰았다는 데 있다. 그는 배우협동조합의 하워드 다 실바를 증거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지목하여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했다. 소련에 위협을 느끼는 정서가 팽배하면서 메카시즘이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먹혀들던 당시, 한동안 그는 아내와 함께 가는 곳마다 구름 같은 인파에 휩싸이는 등 영웅 대접을 받기도 했다. 첫 번째 아내이자 동료 배우인 바바라 스탠윅은 미국의 이상을 지키는 영화 연대멤버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궁지로 몰았다는 점에서 그는 메카시즘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다.
 
한국의 고전영화 팬들에게는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할리우드가 겪은 광풍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꿈의 공장이라는 할리우드의 스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재능 있는 극작가나 배우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라진 1950년대 미국 영화계는, 텔레비전의 보급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오락영화 제작이 크게 늘었고, 애국주의 색채가 커졌다. 애국과 관계없는 영화에도 성조기가 스크린에 휘날리는 건 다반사였다. 채플린이 사라졌고 천재 시나리오 작가들이 쫓겨나거나 동료의 이름을 빌려야 했던 당시는 미국영화 역사에서 어두운 시대였다.
 
비단 영화계뿐만 아니라 1950년대의 미국이나 서구는 보수주의의 시대로 기억된다. 1955년을 그린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젊은이들은 고등학생 때 사귄 첫사랑과 그대로 결혼까지 이어졌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묘사한 1950년대 영국의 윌튼 고등학교는 교사의 체벌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고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교사는 쫓겨났다. 최근 영화 <캐롤>이 배경으로 삼은 195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 커플 테레즈와 캐롤은 끝내 헤어져야 했다. 이처럼 당시는 일상이 숨 막히던 시대였다.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것도 그때였다.
 
특이하게도 <캐롤>에서 테레즈를 연기하는 배우의 외모와 머리 모양은 배우 오드리 헵번을 닮아 있다. 오드리 헵번은 보수주의 가치가 압도하던 1950년대 할리우드 분위기를 대변한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헵번을 닮은 캐롤의 얼굴은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세상의 지배적 가치를 벗어나기 힘든 소수자로서 자신의 처지를 상징하고 있다. 참고로 헵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의 본래 시나리오 작가는 천재라 불린 달튼 트럼보였으나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크레딧에 친구의 이름을 대신 올려야 했던 일도 있었다. 공주와 평민의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스토리는 보수층의 구미에 딱 맞는 이야기임에도 작가는 실명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국민을 아군과 적군으로 나눈 후 아군은 키우고(‘화이트리스트’), 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제하려고 했던(‘블랙리스트’) 두 정부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퇴행을 일상적으로 겪었다. 문화예술인들은 증거가 남는 탄압이라도 받았지만, 무명의 시민들이 일상의 공기에서 느끼는 부자유는 기록도 되지 않았으며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기초부터 허물어지고 망가져버린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로잡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영어판(인물 정보를 일부 참조함)
www.imdb.com (사진 출처, 인물 정보 일부 참조)
 
 

▲ 아카데미상 트로피에 둘러싸인 월트 디즈니. 그는 아카데미상 수여에 기여한 애니메이터들을 '빨갱이'로 몰아 밀고하거나 해고했다.     ©정문순


iCOOP생협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블로그에 게재한 글을 손본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7/12/08 [13:3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영화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