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을 사는 한국인, 이용수 씨의 분노가 말해주는 것
5월 29일자 <한겨레>에 실린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의 기고를 읽고 마음이 무겁다. “정의기억연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기존의 운동방식을 비판하고, 스스로 위안부 문제를 정의하고, 운동 방향을 정하려는 주체적 의지를 표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씨의 폭로성 기자회견에 대해 한 연구위원이 내린 평가이다.
액면 상으로는 한 연구위원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권 침해 당사자로서 이용수 씨가 “정의기억연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기존의 운동방식을 비판”할 수 있고, “스스로 위안부 문제를 정의”할 수 있고, “운동 방향을 정하려는 주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정당하다. 한 연구위원의 주장에만 의지하면 그동안 이용수 씨는 특정 단체가 주도적으로 행해온 운동 방식 때문에 힘들었고 자기 스스로 문제를 주도하거나 운동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힘 있는 단체에 일방적으로 끌려간 피해자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이 씨의 주장이 그 자체로 타당한지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자신의 일방적 주장만 있는 상태이므로 그 주장이 맞는지부터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씨의 주장이 최소한 자신의 관점에서 타당성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한 연구위원의 저 평가가 절로 타당해지지는 않는다.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오면서 피해자를 소외시켰다는 한 씨의 판단은 사회운동단체가 무슨 일을 하며 무엇을 지향하는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나온 듯하다. 이 말은 운동단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피해자를 부리거나 대상화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며, 그런 단체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당사자 중심주의’ 또는 ‘운동의 당사자성’은 어떤 운동단체이든 피해 갈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당사자 중심주의라는 것이 무조건 피해자의 요구와 바람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이용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일 뿐 그 자신이 모든 피해자를 대표하거나 상징할 수 있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설령 피해자의 뜻대로 행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피해자 지원단체일 뿐 사회운동단체가 아니다. 사회운동을 표방한 조직이라면 자신이 표방하는 이념, 취지, 목적, 방향을 반드시 갖추고 있으며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활동가와 후원 회원을 이룬다. 이 조직 바깥의 피해자는 해당 조직의 방향에 동의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조직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은 피해자의 주장이나 의견에 따라 쉽게 수정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정의연이 기부금 유용 논란이 일어나자 거듭 해명했듯이 정의연은 위안부 피해자의 생계를 돕는 단체가 아니다. 가해자 일본 정부의 진상규명, 사과, 피해자 배상, 역사교육을 요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인권유린을 세계에 알리며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전시 성범죄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것을 표방한다. 사회운동단체로서 자신이 지원하는 피해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의연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 씨가 바라는 대로 운동 방향을 바꾸려면 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구성원의 동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씨는 위안부 피해 지원 운동에서 세계적으로 보폭을 넓히며 활동해 온 인권운동가이니만큼 정의연에 ‘이용’ 당하지 않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할 역량이 있다. 이 씨가 정의연이나 윤미향 의원과의 갈등을 거칠고 원색적으로 표출하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소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씨가 정의연이 주도적으로 위안부 피해자 관련 운동을 이끌어온 것을 비판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사회단체 활동가- 당사자(피해자)의 관계에서 당사자가 먼저이고 활동가는 조력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는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시각은 피해자를 활동가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을 뒤집어놓은 것으로서 실상은 그 못지않게 위험하다. 나는 당사자와의 관계 설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를 알고 있다. 당사자와의 관계 설정에서 그 활동가는 자신을 무조건 ‘을’로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활동가가 당사자의 뜻대로 움직이고 뒤따르는 조력자로 머물러 있기 바라는 세상의 요구로부터 받은 스트레스에 대해 그 활동가가 내린 자기 나름의 결론이었다. 갑을 관계로 규정될 수 있는 인간관계라면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인간관계를 활동가에게든 당사자에게든 요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이용수 씨가 정의연이나 그 조직을 이끈 윤미향 의원을 향해 느끼는 반감의 근본적 원인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과 관련하여 생각이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가 차원의 성노예 동원 착취 불인정,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 발전에 걸림돌로 보는 인식은 일본 아베 정부를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보수 세력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식이다. 수요집회와 ‘성노예“ 용어에 대한 반감이 크고, 정의연과 윤 의원이 피해자들을 ‘이용’했다고 인식하는 이 씨도 이런 생각에 기울어져 있다고 본다.
기자회견에서 이 씨가 ‘돈’ 문제를 자주 언급한 것에 대해 이런 저런 풀이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 씨에게 ‘돈’의 의미는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실질적인 해결책의 일환이거나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가 피해자의 생계와 생활 보조를 돕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씨가 정의연이 피해자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고 발언한 것은 금전적 지원을 중심에 두지 않는 정의연의 운동 방향을 비판인 것인데도 극우보수언론에 의해 마치 정의연이나 윤 의원이 횡령을 한 것처럼 해석되었다. 물론 정의연과 윤 의원이 회계 부분에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씨의 ‘돈’ 발언이 엉뚱하게 왜곡되면서 빚어진 결과이다.
당사자이자 피해자로서 이용수 씨는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정의연의 큰 그림에 대해 반감을 품었을 수 있다. 12.28 한일 합의 이후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이 교착 상태에 빠져있고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지금, 이 씨로서는 정의연의 방식이 피해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즉 이 씨의 폭로와 분노를 뜯어보면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 간의 졸속 합의와, 대선 공약에서 합의를 파기하고 피해자와 국민의 뜻에 맞추어 재협상을 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전혀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기만이나 방관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 씨의 '폭로'를 통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게 흘렀지만 일본제국주의 통치와 침략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아직까지 식민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의 국제적 처지로부터, 전시 성범죄 피해자로서 어느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트라우마와 평생 싸워온 고통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외교적 세계적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한 몸에 씨줄날줄로 아려새겨져 있는 현실을 알 수 있다. 이 씨의 외침은 인류가 공통으로 대응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더 이상 개인이 혼자 떠맡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일본 정부와의 재협상,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계 지원을 넘은 심리적 치유 지원을 통해 한 개인이 존엄한 인격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은 우리 사회가 늦추어도 될 일이 아니다. 1945년을 살아야 하는 어떤 사람에게 2020년의 한국 사회는 할 말이 없다.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