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을 달궜던 ‘미투 운동’은 시작은 법조계였지만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문화예술계에 군림하던 대가들이 줄줄이 미투 가해자로 불려나오자 사람들은 이들의 숨은 전력에 분노하고 성토해마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피해자들의 기자회견이 더는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할 정도였던 당시의 추세로만 본다면, 미투 가해자들은 법적인 처벌을 받든 운 좋게 사법 처벌을 모면하든 사회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은 불가피하며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가거나 재기한다는 것은 감히 꿈꿀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꽁꽁 숨겨져 있던 대가들의 파렴치한 전력이 곰팡이 냄새를 피우며 햇빛 속에 드러나자 숨어있던 정의가 드디어 이기는 것 같았다. 정의의 승리, 사필귀정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며 반가워했던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시간이 지나가고 여론이 잠잠해지기만을 노리며 전열을 정비하며 암중모색하던 가해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처벌받지 않거나 아예 사법적 처리 대상도 되지 않거나 되레 억울한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 활동하는 등 거대한 역류현상이 곧 일어났다. 백래시는 다른 나라를 보더라도 미투운동에서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잽싸게 들이닥치고 흐름을 바꾸는 지경까지 갈 줄은 몰랐다. 미투운동을 무화하거나 모욕하는 반격은 모든 분야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유독 문화예술계가 심각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화예술계는 미투운동의 진원지였던 만큼 정상을 비정상으로 되돌리려는 역풍도 가장 거세게 불었던 곳이다.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이 만연한 이유를 물을 경우 공식처럼 통용되는 답변이 있다. 전근대적인 도제 시스템의 유산이 원흉이라는 것이다. 사제관계로 미화되기 일쑤인 도제 시스템은 21세기 한국의 문화예술 업계를 전혀 문화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게 하는 온갖 병폐의 근원적 주범으로 꼽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럼 그런 도제 시스템이 나쁜 줄 알면서도 유독 문화예술계에서 강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하나의 제도가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데 도제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도제 시스템은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학력, 수상, 경력보다는 사적인 관계에 따라 작동된다는 측면에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도제가 시스템으로 뿌리내린 것은 우리 사회가 문화예술계를 관리 영역 밖으로 밀쳐둔 오랜 관습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필자의 시각에서 보자면 도제 제도의 원인은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천시에서 비롯한다.
문화예술이 발생한 이래 예술가의 사회적 대우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거론되어 온 주제다. 2000년대 초기 조선일보는 문인의 사회적 대우를 높여야 한다는 여론에 대해 작가는 궁핍을 ‘불쏘시개’로 삼아 창작열을 지피는 사람이라며 제도적 지원을 반대한 적이 있다. 가난해야 걸작이 나온다는 인식을 극우 언론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술인의 가난과 궁핍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식의 연원은 뿌리가 아주 깊다. 작가는 처지가 영화로울 때보다 궁색한 지경에 떨어져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말은 일찍이 중국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작가의 입에서조차 작가가 궁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면 전근대 시대에도 문화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견제하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에서도 문화예술인이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경우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이 문화예술인을 소외시킨 주범이었음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시와 소설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추는 것보다는 다리 하나를 더 짓고 길 하나라도 더 닦는 것이 쓸모 있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서 실질적인 재화나 서비스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문화예술에 대한 구조적 천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것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서구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열광에서 보듯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기반을 닦거나 입신에 성공한 예술가에게는 자신이 해낸 업적 이상으로 찬사가 주어졌다. 그런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거나 매장당할 만한 행각을 벌여도 정도 이상으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무리한 일이 아니다.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예술가들은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전무한 시대를 겪으며 그들 스스로 각고의 노력으로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 다수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일구다시피한 사회적 지위라면 본인을 포함하여 주변인, 나아가 사회 전체가 이들의 성취를 독점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논리로, 그런 문화예술인이 범죄 등 세상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른들 그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던 사회는 그동안 끼고 있던 팔짱을 풀기 힘들다는 것이다. 해준 것이 없으니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관여하기도 쉽지 않다. 성취든 몰락이든 영화든 패가망신이든 그건 문화예술인 당사자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공유는 없다. 좋은 것을 나누자고 할 염치가 없고 나쁜 것을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한 것은 부풀려지고 잘못한 것은 축소된다. 잘하든 잘못하든 문화예술인의 행동은 공공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취가 본인만의 것이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사회적 지원 없음과 문화예술인의 일탈 행위는 서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
문화예술 영역에서 문화권력자는 구조적인 갑질을 견고하게 굳히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갑질 행사의 끝판인 약자에 대한 성폭력을 막는 이도 없고 견제하는 장치도 없다. 문화권력자인 성폭력 가해자는 자신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고 주변도 물론이고 피해 당사자조차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의 개입이 가장 미치지 못하는 그들만의 나라에서는 ‘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발을 붙이기 힘들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배제나 소외는 그 말을 뒤집으면 특권, 권력, 독점 등과 통한다. ‘버림받은 자식’이 고군분투하여 성공하고 나서 ‘폭군’이 될 경우 가장 큰 책임은 자식을 버렸던 부모에게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문화예술인의 배제나 소외를 통해 그들의 영역을 비정상적으로 특권화하거나 권력화한 현실을 멈추도록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해법이 무엇인지는 필자의 역량으로서는 제기하기 어렵거니와 이 글이 추구하는 바도 아니다. 다만 필자의 관심은 문화권력자의 갑질 의식이 자신들의 창작물에 반영되는 양상에 있다. 이 글에서 한국 사회가 ‘간을 키워준’ 문화예술 권력자의 갑질 행사가 어느 정도인지, 특히 남성 문화예술인의 성인지 감수성이 어느 정도로 불충분하거나 뒤틀려 있는지 그들이 생산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2010년에 출간되었다. <은교>는 늙은 시인과 젊은 소설가 두 남자가 열일곱 살 여성 은교를 사이에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다투는 이야기다. 늙은 시인이 자신의 필명으로 삼은 이름은 이적요. 평생 세속과 거리를 두고 고상하게 시 창작에만 전념한 작가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고, 재능 없는 젊은 소설가 서지우의 수발을 받으며 노년을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자신을 성(性)적인 것과는 거리를 둔 성(聖)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한 이적요는 집이 가난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러 자신의 집을 드나들게 된 은교를 만나면서 자신의 위선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은교로 인해 늙은 자신도 욕망이 들끓는 존재임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늙은 시인이 은교에게 품은 욕망의 양상은 이런 식이다.
▲ 박범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은교' © 정지우 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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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할아부지, 발목이 간지럼을 제일 많이 타요. 발목 뒤 옴씬 들어간 데요.” 네가 말했고, ‘옴씬’이 기름통, 내 몸에 성냥을 그어대는 것 같은 효과를 금방 가져왔다. 나는 경악했다. 우회해서 표현하진 않겠다. 갑자기 나의 페니스가 고개를 기웃, 들더니 맹렬하게 허리를 세우고 일어났다. -99~100쪽, 문학동네, 2010
동서고금을 탈탈 털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남자끼리 다툼을 벌이는 것은 신화, 민담, 소설, 역사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늙은 남자가 어린 여자에게 성적 욕구를 품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것도 그다지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은교>는 금기의 영역에 대해 “우회해서 표현하진 않”고 노골적인 묘사로 거침없이 나아간 것이 화제가 되었다. 자신은 은교를 처음부터 탐할 생각은 없었지만, 은교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이 자신을 자극했다는 이적요의 고백은, 평범한 낱말에서 우주를 추구하는 시인 특유의 직업적 감각이나 특기를 내세워 자신의 욕구가 그럴싸한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그러나 ‘옴씬’ 같은 낱말이 죽은 줄 알았던 성욕을 ‘불가항력적으로’ 주체할 수 없도록 이끌었다고 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관문이 있다.
인생 황혼기의 남자 노인이 어린 여자를 탐한다는 것은 꿈꾼 적도 없었지만 뜻밖에, 돌연히, 아무 예고 없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본능이라는 딱지를 붙여 받아들이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늙은 남자가 미성년 여자를 향해 품는 욕구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본원적 욕망이라고 할 수 없음은, 성별을 뒤바꾸어 미성년 남자를 향해 욕망을 품는 늙은 여자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다루어졌는지, 아니 다룰 수 있는지 상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적 욕망은 본원적이거나 불가항력의 영역이 아니며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는 문화적인 영역이다. 발화자의 처지에서는 일상적일 뿐인 말이 누군가에게는 성 욕구를 폭발시키는 말로 뒤바뀌기까지는 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인식이 철저히 작용한다는 점은 흔히 간과되고 있다. 평범한 말 조각의 기존 맥락을 해체하고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여 기상천외한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손을 쓸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이 아니다. 특정한 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새로운 맥락에 들어앉히는 과정은 그 자체로 주체의 판단이 단단하고 적극적인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성욕을 품도록 만든 주범은 ‘옴씬’이 아니라 이 말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능동적으로 재해석한 이적요 자신일 뿐이다.
늙은 남자가 어린 여자에게 성애를 품는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적요의 욕구는 비정치적이고, ‘순수’하고, 무색무취한 환경에서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을 작동시킨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해 둔다. 성별, 나이, 경제적 배경 등 모든 면에서 이적요나 서지우보다 약자의 처지인 은교의 몸은 자신을 에워싼 사내들에게 일방적인 욕망의 대상으로만 취급됐을 뿐이다. 소설은 이적요와 서지우가 탐하는 은교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은교는 두 남자가 안달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대상화된 은교의 몸은 인격이 깃든 존재가 아니라 푸줏간에 내걸린 고깃덩어리처럼 다루어진다. ‘발목 인대’, ‘허벅지’, ‘허리선’, ‘종아리’, ‘머리칼’, ‘입술’, ‘가슴’ 등 은교의 몸은 오로지 성적인 것과만 결부되어 두 남자에게 소비된다.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몸은 은교에게는 끼어들 틈조차 없다.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성적 욕망은 은교의 생각, 태도, 느낌, 됨됨이가 은교의 몸과 결부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짧은 반바지에 딱 맞는 셔츠 차림”, “얼룩 하나 없이 뽀얗”기만 한 허벅지, “머리칼에서 향긋한 냄새” “쌔근쌔근 바람 부는 네 코의 피리”, “푸르스름하고 가지런한 네 속눈썹’, ”맑은 물 고인 네 쇄골 속 우물“, ”시소를 타고 있는 네 가슴의 힘찬 동력“, ”휘어져서 비상하는 네 허리” 등 오로지 성욕을 자극하는 몸으로만 다루어지며, 죽을 날 앞둔 노인의 회춘 욕구를 자극하거나 자신도 노인이 자신의 성적 능력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증거물로서만 소비된다. 이적요가 은교를 상상할 때마다 자신이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고약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때문이다. 상대와의 그 어떤 영혼의 교류나 교감도 없이 조각조각 파편화하여 섹스하는(섹스를 당하는) 몸으로만 나열된 은교는 일방적인 성적 유린을 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고등학생 은교가 다친 홀어머니를 대신하여 가계를 꾸리기 위해 이적요 집에 일하러 방문하면서 두 남자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는 점에서도 은교를 성적으로 유린한 서지우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음으로 실컷 탐한 이적요의 행태는 철저한 위계관계의 산물임을 벗을 수 없다. 대상을 자신의 발 아래 두는 비하는 그것을 뒤집으면 턱없이 격을 높이는 신비화와도 통한다. 실체 없고 현실적 인격이 부여되지 않은 관념의 인물인 은교는 이적요에게 ‘소녀’에서 ‘처녀’, ‘신부’로 위상이 뻗쳐 올라간다. 이는 은교를 우대하는 인식과는 거리가 멀며, 은교가 이적요에게 살아 숨 쉬거나 자신의 욕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관념적인 대상화로 다루어졌기에 가능할 뿐이다. 이적요는 은교를 품고 싶은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은교가 아니라 자신에게 은교의 내력을 묻는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은교에게 품는 성적 욕구에 대해 기원도, 연원도, 이유도 알 수 없다는 식의 처리는 이적요가 자신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기합리화나 신비화 전략에 가깝다.
<은교>의 서사 줄기는 크게 두 갈래이다. 한 개가 이적요가 은교에게 품는 주체할 수 없는 욕구라면, 다른 한 개는 앞의 것에서 파생된 줄기이면서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두 연적끼리의 다툼이다. 사제지간이라는 완벽한 두 남자 사이의 틈을 벌리게 하여 끝내 살해와 죽음이라는 파탄으로 치닫도록 설정함으로써 (남성) 성적 욕망의 치명적인 본색을 강조한 것이 은교라는 존재이다. 여자를 사이에 놓고 친구가 원수가 되거나 두 남자끼리 힘의 우위를 겨루는 것이 흔해빠진 이야기라고 해서 그런 서사가 문제가 없다는 식의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남자들끼리 권력 싸움을 벌이다 자멸하는 데 애먼 은교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은교라는 캐릭터가 비상식적으로 그려진 것도 한 사람을 철저히 대상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은교는 자신이 입시생 처지임을 잊었는지 수시로 이적요 집에 드나들고 그러면서도 언제 공부했는지 대학에 진학하는 데 전혀 지장 없는 것도 현실감을 떨어뜨리거니와, 서지우의 입을 빌려 “영민한 애”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은교는 딱할 정도로 철이 없다. 성년을 눈앞에 둔 나이임에도 ‘할아부지’라고 부르는 은교의 말투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말투를 대학에 들어가서도 버리지 않는다. 더욱이 서지우가 스승의 질투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에게 가하는 성적 유린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 대목에서 은교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아이’로 그려지고 있다. 이 정도면 그저 어린 정도가 아니라 무사고의 경지일 것인데 이보다 더한 압권은 이적요가 죽은 뒤에야 그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알고 난 은교가 보인 반응이다. “할……할아부지가……나를요,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당사자가 “이까짓 게”라고 반응함으로써 모든 논란이나 의심에 종지부를 찍거나 이적요의 행태를 합리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은교는 남자들이 바라는 로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존재일 뿐이다. 작가의 말에서 박범신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썼다. 우리는 박범신이 탐험하고 기록한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이 이적요나 서지우의 것인지, 은교의 것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은교>는 출간한 지 10개월도 안되어 5쇄를 찍었다.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런 경우를 일러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은교>는 독창적인 소설은 아니다. 파격적인 소재뿐 아니라 주인공이 유언처럼 남긴 고백 산문, 액자식 구성 등에서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비슷한 점이 많다. 롤리타가 “내 삶의 빛이여, 내 몸의 불이여”라고 불릴 때, 은교는 “나의 처녀”, “나의 신부여”로 불렸다. 모방 작품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명이 필요하겠지만 아무래도 <은교>의 파격적인 소재와 묘사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금기의 소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상업성을 갖추고 있더라도 <은교> 같은 소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젠더 의식과는 담을 쌓은 소설에 대해 우리 사회의 견제 장치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되레 영화화 등을 통해 텍스트의 확장을 열어주었다. 상업적으로만 성공했을 뿐 비평적으로는 뭇매를 맞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물학적 늙음과 젊음에 기반한 ‘배타적 젠더 인식’의 ‘폭력’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본 평자도 있다(정미숙). 은교를 탐하는 이적요의 욕구를 비판하면 배타적인 젠더의식에 들러붙어 있거나 폭력적인 발상이라는 뜻이다.
미투 운동의 국면에서 세상에 나왔으면 소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박범신은 전사회적인 미투 운동이 몰아치기 직전인 2016년 문단 내 미투 운동이 불었을 때 가해자로 지목되어 세상에 불려나왔다. 여러 피해자의 폭로와 목격자의 증언이 나왔고, 그 중에는 이적요가 소설에서 한 행태를 연상시킬 만한 일도 포함되었다. 심지어 박범신이 영화에서 은교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서 평소에 은교를 상상했다고 당사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등 성희롱 발언을 한 사실도 폭로되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박범신은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이 일으킨 논란은 성인지적 감수성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스스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작가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만들기까지 하는 박범신의 행태는 근대 이후 문학이 확립한 요지부동의 문법조차 비껴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자신을 대변하거나 자신의 분신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질서를 ‘나’ 중심으로 재편하는 오만에 가까운 모습에 해당할 수 있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을 조물주인 양 인식하는 이러한 창작 태도는 문화예술판에서 문화권력이나 실력자들이 약자를 상대로 ‘갑질’ 행사를 꺼리지 않는 행태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결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예술도 사회의 일부이자 사회의 하위 영역일 뿐이다. 여성은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고 말하고, 10대 여성이 얼마나 똑똑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지 모른 채 자기 입맛대로 성인 여성에게서 지적 능력이 부족한 덜 자란 여자로 치부해버린 소설을 문학 작품의 틀 안에만 갇혀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소설이 어떤 견제도 받지 않고 유통되고 다른 텍스트로 범위를 넓혀가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 의혹이 폭로되고도 성인지 차이 운운할 수 있는 작가가 거장 취급을 받는 현실도 작품과 별개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예술 작품을 작가만의 고유 영역으로 신비화하거나 격상함으로써 사회적 개입을 주저해온 풍토가 문화예술판에서 힘 있는 자들의 갑질을 조장한 뒷배로 작용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는 창작의 자유와는 별개의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문화예술인들을 버린 자식으로 내버려둠으로써 그들의 자수성가로 얻은 성취를 지나치게 인정했고, 문화예술을 특별하고 천재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치부함으로써 분에 넘치는 특권을 부여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문화예술계는 특별 대접을 받아야 하냐고.
※11월 25일 ‘2020년 성폭력 추방주간 부산문화예술계성희롱·성폭력예방대응방안 세미나’ CONNECT: FEMINIST-ART-IST에서 발표한 원고를 다듬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