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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변절, 김지하는 없다
[정문순 칼럼] 수구 이데올로그로 등극한 김지하를 작별하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3/01/14 [12:58]
김지하의 이력으로 볼 때 그가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하여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죽음의 굿판’ 발언을 포함하여 1990년대 이후 사이비 신흥 종교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사상이라는 것을 봐도 그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실은 그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변절했다. 단지 한때의 저항 시인 이력이 그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 만큼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가 문재인을 지지한다면 그게 오히려 욕된 일이었다. 조갑제가 야당 후보를 지지할 경우의 참상을 생각하면 된다.

김지하는 박정희가 죽었을 때 그에게 당한 것을 모두 용서했다고 했다. 몸을 숨긴 아들을 내놓으라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기고문을 가하여 ‘반편이’로 만든 짓도 용서했다고 했다. 대단한 자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지하가 자신을 수 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가시 면류관을 씌워주고 아버지까지 고문한 야수적인 독재자를 용서했노라고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다닐 이유는 없다. 용서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극악한 탄압을 받았던 자신도 용서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박정희를 그만 놓아주자는 말인가. 참혹한 탄압을 받은 자신도 독재자를 용서했는데, 별 피해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왜 미워죽으려고 난리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용서나 화해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김지하보다 덜 고생하지도 않았던 고 김근태 전 의원은 고문기술자를 용서했노라고 떠들지 않았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옥중의 이근안이 가진 진정성을 의심했다. 설령 이근안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확신했어도 김근태라면 누구를 용서했다느니 하는 가당찮은 말은 하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김지하가 독재자를 용서했다고 요란하게 말할 때의 강조점은 자신이 나쁜 독재자를 용서했다는 액면 그대로의 주장에 있지 않다. 그것은 독재자를 지지했다는 뜻으로, 박정희 독재에 대해 투항하여 자신의 내면에 오롯이 독재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새길 수밖에 없다.

저항 시인 김지하는 독재자를 용서했을 때 수명이 끝난 것이다.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을 모독하는 글을 써갈길 때까지 저항 시인의 잔명을 보존할 이유도 없었다. 독재자에 대한 증오를 깨끗이 비워냈다고 하는 자가 사회적 타살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자신의 심리 구조상 별스러울 것이 아니며 모순되지도 않는다. 그가 진작에 변절했음을 안다면 저항 시인이 죽음을 모독했다며 세상이 흥분할 일도 아니었다. 그의 변절은 이미 오래 전 독재자의 죽음과 함께 완료된 것이었다.

김지하는 혼자 힘으로는 부족했는지 아내까지 끌어와서 박근혜 지지를 합리화하고자 한다. 평소에는 무시하다가 불리할 때 여자를 써먹는 것은 마초주의의 습성이다. 그는 아내가, 박근혜가 신산한 세월을 살았다고 동정하더라고 했다.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느라 친정어머니 박경리와 함께 감옥 밖에서 영어나 다름없는 세월을 감당해야 했던 아내였다. 자신의 고통이 아닌 가해자 가족의 고통을 살필 마음의 여유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차원 높은 아량이지만, 김지하와 그의 아내가 독재자와 가족을 용서하든 말든 동정이나 연민은 철저히 개인적인 자유에 머무를 뿐이다. 한 인간의 삶이 기막히다는 이유로 그를 일국의 대통령 감으로 추어올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독재자의 딸을 지지하면서 김지하는 어느새 부끄러움도 잊었다. 김지하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상금을 타고 싶다고 누차 강조하는 모습은 누추하고 초라하다. 돈을 드러내놓고 밝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는 왜 자신의 이력에 당당하지 못하고 돈을 받는 데만 당당한가. 그 돈을 받는다고 자신의 과거가 온전히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 경력을 가진 인사들 중에는 보상금 수령조차 구차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가 간절히 바라는 보상금이 나올 수 있게 한 데는 그가 빨갱이로 부를지도 모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과거사 규명 작업과 민주화 유공자 명예회복 제도에 오로지 빚진 것이다. 박근혜는 거기에 딴죽을 걸었을망정 한 줌의 공헌도 한 바 없다. 박정희를 용서했다는 마음 자세라면 그에게 당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이 깃들기는 어렵다. 김지하가 보상금의 크기에 과거 치유에 대한 능력이 있다고 믿을 정도면 자신의 빛나는 한때의 이력마저 스스로 모욕하는 것이다. 김지하는 피해의식에 몸부림치는 초라한 노인으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사상가로서 김지하가 내놓은 율려 운동이니, 까마득한 상고사 추켜세우기니 하는 것도 극우 민족주의의 변종에 불과하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 급조한 ‘DNA 모성주의’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의 과거 이력을 들어 차마 극우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그를 한국의 사상가로 받들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분신 정국을 모독하고 저주했어도 생명 사상의 발로라고 아부했다. 출판계나 문단은 사상범 출신 시인의 명성에 기대어 김지하가 쓴 책을 팔아먹을 궁리만 하였다. 형편없이 수준 낮은 시를 내놓아도 무조건 걸작이었다. 평론가니 교수니 하는 자들도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강사로 모시기 바빴다. 어렵사리 강연 초청을 수락할 경우, 대중 앞에서 반말을 섞어 말하는 그에게 모시게 돼 영광이라고 엎드렸다. 1991년 분신 정국 이후 그와 틀어졌던 진보 진영 문학가 집단이 세월이 지났다고 그와 화해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대접을 받아봤자 남의 죽음을 모독한 자는 정작 한 줌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더 큰 사고를 쳤고 변호해 줄래야 해줄 수 없는 막장으로 자신을 몰고 갔다.

그의 48% ‘빨갱이’ 발언은 그동안 그에 대한 의심이나 의혹이 뒤엉킨 모든 것을 명쾌하게 씻어주었다. 김지하는 40년 넘게 자신을 옭아맸던 빨갱이 족쇄를 남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속이 후련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한국의 지식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지는 이로써 분명해졌다. 히틀러에 가까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를 한국의 사상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언어도에 불과하다. 수구 이데올로그 이문열의 확고한 자리를 위협하게 된 그는 더 이상 김지하가 아니다. 세상은 김지하를 당당히 버려도 좋을 때가 되었다. 정도는 덜하지만 ‘겨울공화국’의 양성우도 오래 전에 이탈하여 MB의 문화계 인맥으로 넘어갔고, 또 누가 남았지?

대선 때 문재인 지지를 통해 자신의 일관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한때 MB의 대북 정책을 지지했던 황석영의 행적도 살얼음을 디딘 듯 조심스럽다. 사실 황석영이 자신의 표절 행각을 책임지지 않았을 때부터 그에게서도 기대를 접게 했다. 2000년대 이후 작품 이력을 보더라도 그가 신나게 썼던 여성 수난사의 소설들은 수구 퇴행의 가부장제적 여성관이 철저히 배인 것이었다. 시인 고은의 경우도, 가만히 있어도 대가로 대접받을 수 있는 거인이 ‘일개’ 노벨상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주옥과도 같은 이력을 스스로 무참히 난도질하는 지식인을 보는 것은 슬프다. 그가 정상일 때 남겼던 언어마저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괴로움이 남는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대상의 핵심을 그대로 육박해 가는 그 명쾌했고 날이 서렸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그저 사람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인간은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상황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자위하고 싶을 뿐이다. 한 사람의 시인이 자존심을 지키고 품위 있는 원로로 늙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사회는 무서운 곳인가. 어쨌든 김지하는 죽었다. 그의 시가 한 사람의 영욕을 두고두고 증명할 것임을 생각하면 죽은 시인이 측은하기만 하다. 그의 단순명료한 시들은, 군사정권의 야만적인 폭력성이 뒤덮던 세상과의 처절한 응전이었기에 더욱 안타깝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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