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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에서 풀려난 성 에너지, 전복되는 가치 서열
생명 창조 시대의 자기 경영37
 
이동연   기사입력  2004/07/08 [14:25]
성(性)처럼 인류를 즐겁게도 하고 괴롭혀온 주제도 없었다.
'베겟 머리 송사에 이길 사람없다'는 말만큼 천재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 성의 매력앞에선 한낮 아메바처럼 단순 무식해 진다.

성은 비겁한 자를 용감하게도 하고 용감한 자를 비굴하게도 만든다.
그뿐이랴. 성은 교활한 사람은 순진무구한 사람으로, 순진했던 사람을 교활하게 만든다. 이처럼 성은 이중성을 넘어서서 다중적이다.

인류의 역사는 성에 울고 성에 웃은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은 한 나라는 물론 개인의 흥망성쇠에도 그 권력을 행사하였다. 
 
징기스 칸의 세계 정복욕도 성적욕망의 완화에 다름 아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다음의 말을 했다. 

"내 인생 최고의 즐거움은 적들을 죽이고 그들의 딸과 그들의 아내를 탐닉하는 것이다."
 
어디 영웅들 뿐이랴.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부인인 '멧사리나'는 역사상 카사노바 류의 어느 남성못지 않은 애욕의 화신이었다. '멧세리나'는 남편이 잠들면 살짝 황실을 빠져 나와 사창가로 들어가 '류키스카'라는 가명으로 매춘부 노릇을 한다. 황금색을 칠한 젖가슴과 왕자를 낳은 아랫배를 드러 내 놓고 길거리 손님들을 유혹한다.

밤새동안 자기 방에서 돈을 받고 여러 손님을 받아 음욕을 불태운 후, 그래도 꺼지지 않은 음욕을 억누르고 사창가의 마지막 문을 닫은 다음 새벽 늦게 그 때까지 코를 골고 자고 있는 황제 곁으로가 살며시 눕는다. 결국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멧사리나 황후의 성적 욕망에 희생된다.
    
저토록 성적 욕구(물론 성적 욕망의 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가 강력했음에도  역사에서는 언제나 음습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모든 가치론적 평가 기준 즉 선과 악이나 성숙, 방종과 절제의 기준선은 언제나 성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성적으로 개방되면 불결하고 추한 사람이 된다.
 
▲샤갈의 성모마리아
처녀성은 도덕과 종교의 상징이며 설득기재였다. 그래서 예수는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했으며, 마리아는 동정녀이었기에 예수를 잉태해 성모가 될 수 있었다. 즉 마리아의 가치는 처녀성에 있었다.
    
부처를 낳은 마야 부인도 팔계를 지키느라고 슛도다나 왕과 동침하지 않은 채 잉태했다. 부처는 도솔천에 있다가 하강하여 마야부인의 태중에 들어갔다가 오른쪽 옆구리를 열고 나왔다.

여타의 여러 신화들에도 성욕에 허덕이지 않고 성스런 처녀의 몸으로 신들과 영웅들을 잉태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나온다.

프로이드는 이처럼 개인과 역사의 진행에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도 역사의 음습함으로만 치부되었던 성에 지성의 옷을 입히고 공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만든 성해방의 최대 공로자이다.
 
'이드(id)가 있는 곳에서 에고(ego)도 발전한다'는 프로이드는 성, 바로 성이야 말로 오늘의 문명을 있게 한 최대의 공로자이며 성이야말로 진보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현실 원리를 무시하고 쾌락원리를 쫒는 본능의 초 도덕성향과 본능을 다 만족시킬 수 없는 자연물의 결핍상황, 거기서 파생하는 생존 투쟁때문에 본능의 억압이 불가피하였다.  
    
이 본능의 억압이 문화와 제도의 구성원리가 되었다.
사춘기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아버지의 권위에 투항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시키듯이 원시 유목민으로부터 가부장제사회를 지나면서 인류의 내면에는 부권적 권위가 내재화되어 있으며 그 부권적 권위가 도덕이며 종교이고 양심이다.
    
부권적 권위의 핵심은 외디푸스 컴플렉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성적 억압이다. 부권적 권위를 휘두르는 봉건 군주들과 독재자들, 권력자들은 자기를 위해 전체의 에로스적 향유를 보류시키고 노동을 강제하며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만든다.

부권적 권위의 수호를 위해 종교와 도덕, 수구적 사회 시스템과 교과 과정은 상호 제휴를 하여 반항하려는 대중의 자식들과 형제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들이 민다.

정치는 부권적 권위 체계를 유지하는 힘을, 종교는 부권적 지배의 영속화를, 도덕은 부권적 지배의 심리적 터전을 생산한다.
   
프로이드는 본능의 억압이 문화적 필연성이라는 주장을 유지하면서 그의 생애 후기에 쾌락으로부터도 문명이 비롯됨을 내 비쳤다.  아마도 생명창조라는 전대미문의 21세기 문명 트렌드를 예감하고 있었을까?
 
지나간 수 만년의 인류문명이 비록 쾌락원리와 현실원리의 갈등으로 진보되어 왔다 할지라도 현대는 쾌락원리와 현실원리사이의 갈등이 대부분 해소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만일 성이 더 이상 억압받지 않고 있다면 성 억압을 전제로 한 부권적인 모든 가치는? 교훈은?  조직은?, 인간 이해는?

자아가 외부 세계냐 본능이냐를 선택하지 않고 본능과 동맹을 맺고도 외부세계와 화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문명기조는 전반적인 전복이 일어 날 것이다.
 
섹시함은 최대한 감추어야 할 수치였었으나 이젠 섹시함은 드러낼수록 상품가치가 올라간다. 성 에너지의 흐름이 너무 자유로워서인가? 결혼은 점차 현대인에겐 미친 짓이며 고대인들의 통과 의례였던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성 에너지를 풀어 놓자 말자 성은 인류 통제의 절대 권력의 자리에서 한갖 놀이로 전락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의 성 엄격주의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사회가 범(汎) 성욕주의로 흐르기보다는 성의 본래가치인 친밀성과 위탁의 모습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성은 인류를 재생산하는 절대 유일의 장치에서도 밀려나고있다. 성이 아닌 배양실(培養室)에서 자손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부가 별스런 대책을 다 내놓아도 출산율은 점차 제로 포인트를 향해 내려 갈 것이다.

대만같은 나라에서는 저출산이 심화되어 초등학교 교사들이 대거실직위기에 놓였도 이는 점차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파급될 것이다
  
성적억압에서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었으나 문명의 발전은 성적에너지의 자유로운 유통을 촉진하였고 다시 해방된 에로스는 노동의 양과 질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성 억압을 통한 문명은 생산성이었다. 그 생산성은 결국 욕구충족을 위한 생산성이다. 소수를 위한 소량의 생산물일 때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노동의 소외를 경험한다.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다. 즉  대중의 금욕을 통해 진보해온 문명은 더 이상 금욕하지 않고도 문명을 진보시킬 단계까지 접어 든다. 지금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방향이 그렇다는 말이다. 
 
해방된 에로스의 문명은 창조성이다.
생산성은 외부의 강제에서 온다면 창조성은 내부의 자발성에서 나온다.
이제야 비로소 문명이 회심(conversion)하고 있다. 문명은 현실 원리의 이름으로 쾌락원리를 짓 눌렀던 죄를 참회하고 있다. 문명의 회심은 가치의 회심을 야기한다. 
  
칸막이와 특별한 제복으로 상징되는 계층제도(hierarchy)는 이 시대의 밑 그림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권위가 조각나는 시대의 행정은 어떻게될까?
더 이상 통제나 지시가 아닌 서비스로 전환할 것이며 규제가 아닌 길을 열어 주고 보조해 주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문명의 진보가 자연스레 모두의 진보를 촉구하고 자극한다 할지라도 그저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대중들이  현실원리와 쾌락 원리를 분리시키며 노동의 소외를 천상의 가치처럼 되뇌이는 거대 담론의 기만성을 파헤치고 자각할 때에 비 억압적 진보는 더욱 빨리 진행될 것이다.

억압에서 풀려난 성 에너지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켜 놓고 있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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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7/08 [14: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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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쟝발잔 2004/08/03 [04:35] 수정 | 삭제
  • 히야이
    섹스와 가치가 그렇게 연결되 있는 줄이야..
    예전엔몰랐죵
  • 관악 2004/07/23 [14:40] 수정 | 삭제
  • 윤 목사님의 답글을 보면서
    나름대로
    저자의 의도를 분석해 보면
    성 개방의 호도가 아니라
    성개방으로 도리어 성은 집착성욕망에서
    게임성 오락으로 변한다는 말씀같네요
  • 윤목사 2004/07/22 [05:55] 수정 | 삭제
  • 성해방을 잘 규정할 필요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 목사가 설교 시간에, 어제 나는 아내와 이런 저런 체위로 관계를 가졌는데, 이런 저런 점에서 참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성" 해방이지요. 성 담론을 양지로 끌어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목사가 어제 저녁에 남편이 있는 여집사와 호텔에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참 좋게 받아 들인다면 성 관계에 관한 금기들을 깨 버렸다는 점에서 성 해방입니다. 성경이나 그밖에 일부 고전들은 성 담론에 관한 한 아주 자유롭습니다. 성 관계의 본질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지요. 성 관계의 본질을 쾌락과 상대 이성의 숫자로 보고 그 방향으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병적입니다. 성 관계의 본질은 재생산이며, 재생산 활동이 주는 본능적 쾌감이 엄청난 쾌감의 내용입니다. 재생산이 빠진 성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마치 거식증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절하게 조절하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먹듯이 성도 그래야 되겠지요. 적어도 그것이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도락가, 거식증 환자들의 증상을 억압된 식욕의 해방이라고 말하지는 않지요. 무분별한 성은 역사적으로 사치할 능력이 되는 계급이나, 현대 부르조아의 질병이며, 독점욕과 지배욕의 표현이며, 프로이드와 목사님이 위에 쓰신 글은 그같은 질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대중의 일반적인 건강 지침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 새만금 2004/07/17 [05:04] 수정 | 삭제
  • 토인비보다 한 수위이십니다.
    시골에 앉아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새 안목을 갖습니다.
    뵙고 싶네요
  • 베드윈 2004/07/15 [14:14] 수정 | 삭제
  • 글을 읽고
    오랜가뭄끝의 해갈 기분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