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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보는 여러 창(窓)- 경험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경영 30
 
이동연   기사입력  2004/01/28 [15:02]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세계를 보는 우리의 인식은 늘 정당한가?
왜 같은 사안을 놓고도 각자 다른 의견을 내 놓을까? 왜 한나라당의 정형근은 어이없게도 사사건건 김대중정권이 역대 정권중에 제일 부패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한나라 당이야말로 부패 정당의 원조로 반드시 소멸되어야 할 정당이라고 말할까? 
 
그것은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고 우리의 주관적 인지구조속으로 재 해석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객관적 실체들은 우리의 인지구조를 거쳐 우리의 정서를 자극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 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인지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알야야 한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창(窓)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성된다. 경험과 트렌드, 기대(期待), 종교, 무심(無心.tabula rasa)이다. 이 다섯 가지를 인지안경(認知眼鏡)이라 부를 수 있다. 굳이 색으로 나타내자면 무심은 하양색, 경험은 회색, 종교는 붉은색, 기대는 보라색, 트렌드는 청색색 쯤 되겠다. 
  
우리는 태어날 때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무심의 상태로 태어났다.  단지 불편하지만 않으면 그 무엇도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라면서 여러 일들을 경험하고. 종교적인 형이상학을 슈퍼 에고속에 만들어간다. 더불어 주위와 본인의 기대, 또한 유해의 파고속을 어울려 지나가면서 나름대로의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그래서 어릴수록 인지안경의 색은 하양색이나 성인들은 여러 색 안경을 쓴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 트렌드, 기대, 종교는 모두 개인의 이해 관계위에 서 재조합된다. 특히 누가 서로의 것을 더 가져가느냐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작금의 세계 현실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 이익을 증진시켜줄 경험, 이익을 더 갖고자 동참하는 트렌드, 내 삶의 자리를 더 풍요롭게 해 줄 비젼과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모색한다.     
 
그러나 행복은  자꾸 어른이 되면서 채색되어갔던 여러 색들의 안경을 탈색시키는데 있다.   이는 마음을 털어 내라고 가르치는 불가나 천국에 가려면 어린아이 처럼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증명되고, 현대의 심신 통일체 의학(Psychosomatic)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현역 국회의원들이 자진 불출마 선언을 하는 행위들도 자기의 행복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그 이면에는 혹 과거의 부정행위들이 다시 여론의 도마위에 올라 수치만 당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도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을 수 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끝까지 지난 독재 정권의 하수인노릇을 변명하려는 일부 철면피 의원들보다는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그럼 내 안에 마치 사사 건건 나를 붙들어 세상을 똑 바로 보지 못하고 항상 왜곡되게 보도록 만드는 가시 덩굴들을 걷어 내는 방법들을 알아보자.

먼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자신과 타인에게 던지는 질문의 내용을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이느냐? 로 바꿔야 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내용은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경험(experience)은 감각(sensation)과  내적 감각이라고도 부르는 반성(refrection)으로 나뉜다. 이처럼 경험은 감각으로부터 받아 들여지기 때문에 감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감각은 오감을 통해 획득된 '단순관념'(simple idea)인데 예를 들면 노란 개나리. 부드러운 풀밭 등이다.  내적 감각인 반성은 스스로가 자신의 정신작용을 지각하는 생각이나 의지 등이다.

감각과 반성이 결합하여 '복합관념'(complex ideas)을 형성한다. 이 복합 관념이 곧 경험이다. 우리는 이 경험을 통해서 세계를 비교하고 통일하고 판단한다.

경험은 상징을 통해 경험하는 간접 경험과  유·불쾌를 직접 체험하는 직접경험 두 가지가 있다.  간접경험은 주로 교육이나 주변에서 전해들은 정보로 인해 이미지로 형성된다. 직접체험 사실이 아닌데도 간접정보는 개인의 복합관념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서는 한 황제가 발이 적은 한 무희를 책상 위에서 춤을 추게 하면서 총애하자, 그 때부터 중국인들은 발이 적은 여자를 최고의 미녀와 신부감으로 생각하여 여아가 태어나면 발을 동여매 자라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정 민족이나 지역에 대한 편견성 차별 의식, 공산당과 악마는 빨간색, 등도 실체가 없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교육을 통해 전수되고 확산된다.
   
자신의 직접 경험과 관계는 없으나 부모로부터 친지나 친척이나 사회의 여론으로 부터 형성된 '..그 무엇은 어떠 어떠하다'라는 간접경험은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행동하는 한 방법으로 작용한다.

평소에 자기를 잘 관리하던 사람이 갑자기 예비군복이나 제복을 입혀 놓으면 안 하던 행동을 꺼리낌 없이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직접 경험은 유쾌한 기억과 불쾌한 기억의 두 가지이다. 유쾌한 기억은 현실적 호감으로 나타난다. 불쾌했던 기억과 쓰라린 과거는 거부감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경험은 경험으로서만 끝나야 행복해질 수 있다. 즉 내가 경험의 종이 아니라 경험이 내 의지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지 모두 오늘의 삶을 사는데 유용한 하나의 자료(a materials)로 활용되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 만일 경험에게 휘둘리면 우리의 삶은 과거에 발목이 잡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유쾌한 경험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 모 여대의 메이퀸이었고 탁구선수도 지냈던 중년의 여인은 과분할 정도의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그 남편이 딸 하나만 남겨두고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했다. 남편과 사별한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 여인은 그 남자와의 너무나 좋았던 추억에 얽매여 그 남자와 살던 오래된 집에서 이사하지도 못하고 외부와의 접촉도 매우 삼가고 있었다.

그 집에서 이사하고 과거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맛보라고 몇 번이나 권유했지만 수긍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은 행복했던 과거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아무리 좋았던 경험도 오늘의 일상보다 우선 할 수 없다. 옛날의 노래는 예전의 가락일 뿐 오늘은 오늘의 노래에 집중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라.          

경험과 자아의 유착을 끊어야 경험이 내 인생의 지혜가 될 수 있다. 경험과 자아가 깊게 유착된 형태가 고정관념이다. 따라서 고정 관념만 버리면 간접 경험이든 유쾌하고 불쾌한 직접경험이든 모든 경험이 다 내게 유익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불쾌한 경험은 자꾸 잊어 버려고 한다. 이를 회피(回避. evation)라 부르는데 아무리 악몽 같은 일이라도 때로는 활용해야할 소중한 데이터가 될 수 도 있다. 적어도 우리가 과거의 경험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된다면. 
 
몇년 전 경북영주에서 살던 때의 일이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뻗어있지만 그전에 안동과 영주에서 서울로 오려면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다. 이월 초 휴무일에 서울 갈 일이 있어서 새벽 일찍 집을 나서 풍기를 지나 소백산맥 고개로 접어드는데 눈이 갑자기 쏟아 졌다.

길 주변엔 운행을 포기하고 서 버린 차들이 즐비하였고  산정상의 휴계실에 가 보니 대형트럭들도 아예 그 곳에 주차하고 있었다. 나 역시 다시 영주로 돌아 가고 싶었으나 서울에 늦지 않게 가야 되겠기에 다시 핸들을 잡고 조심스레 하산하는데 곳곳에 접촉사고가 나 있었다.  몇 번이나 충돌 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몇 시간의 긴장 속에 운전하면서 단양 국도로 접어들 수 있었다. 
   
얼마나 그때 고생했던지  두 번 다시 눈 내리는 소백산맥은 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그후에 도 겨울에 급하게 산맥을 넘어야 할 일이 생겼다. 사택에서 나가려는데 지난번 일이 악몽으로 떠올라 도저히 핸들을 잡을 수 가 없었다.

그때 내 자아와 소맥산맥 눈길의 불쾌했던 운전경험을 분리시켜야 했다. 자동차 문을 열면서 입으로 '야 지난번 새벽의 그 설경을 오늘도 볼 수 있다니.'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바로 자동차 바퀴에 체인을 감은 다음 운전석에 앉아 지난번 눈길 운전에서 얻은 몇 가지 교훈을 되새겼다. 급 브레이크를 밟지 말고 고 앞차와 충분한 거리를 두며 반대 차선에서 차가 오면 속도를 더 줄인 다음 더 멀리 떨어진 외곽 차선으로 운행하자.

그날 어찌 그리도 눈꽃이 그 장엄한 소맥산줄기와 침엽수들에 신비하게 덮여 있는지 감탄이 저절로 나왔으며 운전해 본 중 최상의 낭만을 즐겼다.

전번과 똑 같은 길이고 똑같은 상황이었다. 단지 힘들었던 추억을 유쾌하게 재해석하여 다시 똑같은 정황에서 훨씬 안전하며 즐겁게 나의 일을 해낸 것이다.
 
만일 특정상황과 쓰라린 감성을 분리시키지 못한다면 그 특정상황을 만날 때마다 똑같이 불행을 반복하게 된다. 특정상황이 내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도 못한다. 마치 눈길 운전을 다시 해야만 할 때가 오는 것과 똑같다. 

어느 장소나 어떤 사건, 어떤 시간, 어느 유형의 인물, 무슨 사물 등 구체적인 그 무엇과 관련한  불쾌한 기억의 관련성을 끊어라. 대신 자꾸 유쾌한 추억과 연결하라. 그런 의식적 노력을 반복하다보면 쓰라린 경험이 잊혀지든지 기억하더라고 실수하지 않은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남들이 다 가는 바닷가를 가지 못해 고민이라는 한 처녀를 만났다. 그 처녀는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캠핑을 동해안으로 갔었는데 그만 첫날 저녘에 폭행을 당했다. 그 후로는  바다하면 떠 오르는 그날의 악몽 때문에 바다는 물론 바다와 관련된 노래나 영상이나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산란해져 한참 아무 일도 못하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바다에 대한 다른 추억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여중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바닷가에서 열린 대학가요제에 간 적이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였다.
낮에 텐트를 치고 아빠와 백사장에서 모래성 쌓기를 하면서 나누었던 수많은 정담을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였다. 그런 행복한 추억들이 폭행 당한 그날의 기억 때문에 다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오랫동안 상담하면서 두 가지를 얘기해 주었다.
하나는 바다에서의 고통이 떠  오르거든 바다에서의 행복했던 추억을 얼른 상기할 것을 권하면서 사실은 바다와 폭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알려주었다. 바다는 누가 와서 무슨 일을 하든 그저 말 없이 지켜볼 뿐이지 그 어떤 사건도 스스로 일으키거나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그 바다에 얽힌 사건이 바다를 오해 만든 것 일 뿐이다.
 
다음은 그 폭행을 당한 아가씨가 심리적 고뇌를 가질 필요가 없고 만일 마음의 아픔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 가해자가 가져야 할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덧붙여서 경험의 노예가 되지말고 기억의 주인으로 살라는 말과 함께 바다라는 단어를 들을 때 마음에 캐비닛을 만들어 폭행의 기억을 담아 서랍을 닫고 아빠와의 모래성을 끄집어 내 떠올리라고 권했다.
그리고 몇 주 지나서 만난 그녀는 약혼한 남자와 울진에서 고성까지 그 시원한 해변도로를 너무 상쾌한 마음으로 다녀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지금 당신을 붙들고 있는 경험이 무엇인가?
먼저는 특정의 그 무엇과 사건을 연계하지 말라. 다음에 당신의 마음에 캐비넷 하나를 만들라. 그리고 그 캐비넷의 서랍을 열고 지금 당신을 강박(强迫, obsession)하는 그 경험을 서랍 속에 집어넣고 서랍을 닫아 버리라.

멀지 않아 당신은 경험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최고의 즐거운과 최악의 쓰라린 슬픔에 대한 경험도 서랍에 넣고 빼는 마음의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날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경험을 나의 감정과 분리해 물끄러미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훨씬 더 행복의 풍요를 누린다. 경험들을 자유자재로 내 삶의 보조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바로 경험과 자아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런 자아훈련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 당신은 진정한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어 당신의 행복을 당신 스스로 관리할 수 있으면 더 많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더 즐거운 인생이 되는 경험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을 구가하게된다.
  
당신이 경험했던 어떤 사건이 곧 당신은 아니다. 그냥 과거의 스쳐간 바람으로 여겨라. 그리고 그 바람의 언어를 파일화하여 기억의 서랍 속에 넣어 두라. 그 서랍의 키는 오직 당신만이 가지고 있다. 신이나 성인, 선생이나 언론, 부모나 정신과의사 그 누구도 그 키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 고유의 경험 파일을 필요에 의해 서랍 속에  넣었다 꺼냈다를 자유자재로 반복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의 불행은 없다. 경험을 입력과 출력의 대상으로 객관화시킨 사람이 누리는 자유로움은 그 누구나 그 무엇도 빼앗지 못한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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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28 [15: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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