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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이 사회를 어디로 몰고 가는가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경영 36
 
이동연   기사입력  2004/04/20 [11:17]
역사는 특출난 개인이 이끄는가?  군중이 이끄는가?

그 갈림길은 특출한 개인의 의식과 그 사회 내부 인간들의 집단 의식중 어느 쪽이 더 앞서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내부 인간들의 집단 의식은 달리 말해 계급 의식이다. 나의 사회 경제적 위치에 대한 자각와 이 위치에 제일 적합한 사회체제는 어느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곧 계급의식이다.
   
무리들의 집단 의식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지도자에 비해  뒤질 경우, 군중들은 늘 특출난 그 개인에게 끌려 다닌다.

특출한 개인은 국가의 이름으로, 사회의 중추적 이념의 이름으로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무리들을 하나로 묶어 마치 집단 마취시키듯 지배한다. 

이를 알튀세는 '이념적 호명(ideological interpellation)' 이라 불렀으며 이게 곧 파시즘이다.  파시스트들의 특징은 이념의 이름으로 개인들을 집단 묶음해 부른다.

과거의 파시스트들은 물리력으로 개인들의 외면적 자유를 억눌렀다면 현대의 파시스트들은 보다 더 교활하다.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지능적으로,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내면적 자율성을 침해한다.
오늘날 대중의 적은 더 이상 물리적 파시스트가 아닌 정신적 파시스트들이다. 개개인들의 내면적 자율성이 회복되지 않는 한 정신적 파시스트들의 퇴장은 언제나 일시적이다.

개인의 내면적 자율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열화와 같은 대중들의 함성으로 하나의 정신적 파시스트를 몰아 냈다 해도 그 빈 자리를 또 다른 정신적 파시스트가 차지하는 역사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저 지리한 역사의 질긴 고리를 끊으려면 민중의 의식이 특출한 개인들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참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민중의 의식이 특출한 개인들을 넘어서지 못할 때 실질적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며 민주주의의 형식을 띤 고도로 지능화된 또 다른 파시스트들이 합법적으로 활개를 치고 다닌다.
 
한국에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일천한 반면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급 진전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정(民主政)은 시민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외부로부터 주어 졌다.

1941년 해방과 함께 한국의 체제(Ancient Regime)는 돌연 민주주의 제체로 변했다. 한국에서의 민주정은 한국 대중들의 에너지가 분출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외부의 힘으로 민주정의 프레임이 주어 지고 그 프레임에 맞추어 내부 대중들의 행동이 끌려가면서 얼떨떨한 상태로 의식의변화가 일어 났다.

봉건 의식을  쉽사리 떨쳐 버리지 못하던 사람들을 개화시키며 끌고 가던 지도자들은 무 의식중에 대중이란 제도를 만들어 끌고 가면 되는 '동원의 대상', '조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시민들의 투쟁속에 확립된 상향식 리더십의 경험이 일천한 한국의 하향식 지도자 의식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유신 헌법이다.

유신 헌법은 대중을 정치의 파트너인 국민이 아니라 사육대상으로 여긴 결과의 산물이다. 당연히 이들 하향식 지도자들은 사대적, 친미적, 수구적 경향을 띨수 밖에 없다. 
 
그런데 놀랍고 절망 놀랍게도 대중의 의식이 특출한 지도자들을 뛰어 넘으려 하고 있다. 지금 뛰어 넘고 있다.

너무 성급한 진단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대중의 행동 양식이 제도보다 앞서 가는 이 신 바람 나는 현상을 우리는 곳곳에서 보고 있다. 시위의 메카도 바뀌고 있다.

운동권의 몇몇 명망가들이 주도하였던 과거에는 하늘의 뜻을 전달한다는 상징과 국법을 어긴 죄인들의 도피처라는 소도(蘇塗)의 상징을 가진 명동성당이 시위의 메카였다. 대중의 행동양식이 외부 제도보다 앞서 가기 시작하면서 시위의 메카는 광화문, 시청앞 등으로 바뀌고 있다. 수직적 가르침에 의해 대중들이 동원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한국이 앞서 가기는 하지만 선, 후진국을 가리지 않는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사태에 반발해 일어 나는 지구촌 곳곳의 반전 시위. 10만명이 모인 뉴욕 맨허튼 거리의 3.20 반전 시위 등등이 모두 밀폐된 소도를 벗어나 대규모 광장에서, 대로 변에서 일어 나고 있다.

소도는 꼭 명동 성당이나 종교적 성소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소도는 '담론의 일방적 주도권', '시혜의 일방성'을 지닌 모든 장소이며 특히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의 소도는  '성소적 인격들'을 말한다.  
 
군중들은 더 이상 소도로 들어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군중을 끌어들이던 소도의 매력도 한 무제( 漢 武帝)의 동중서가 대중화시킨 황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군주는  천자였다가 계몽군주로 한 단계 내려 왔고. 이제는 교통 정리해 주는 사람정도로 완전히 낮아 져야 하며 그렇게 낮아지고 있다. 이는 군주로 상징되는 모든 분야의 대표격들에게 다 해당된다.   

구심담론(求心談論)의 성소에서 원심 담론(遠心 談論)의 광장으로, 일방적 은전의 성소에서 당당한 상호 시혜적 광장으로 군중들이 꾸역 꾸역 밀려 나오고 있다.

군주의 상징을 지닌 사람들이 할 일이란 이 밀려 나오는 군중들이 불편하지 않게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받들어 섬기고 안내 봉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군중이 곧 하늘은 아니다.

군중도 잘못할 수 있고 역사의 물줄기를 잠시 되돌려 놓을 수도 있으나 군주가 하늘이던 시절 군주가 계몽 교사이던 시절보다는 군중의 지능지수, 통찰력, 숨겨진 의도를 읽는 간파력이 훨씬 탁월해졌으며 군중이 이미 군주 상징자들을 앞서고 있다.

언론과 상아탑의 교수들과 정치인들과 대형 종교 지도자들보다도 훨씬 더 군중들은 앞서 가고 있다.   

아직도 군중을 조작 동원 가능하다고 믿는 군주 상징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군중을 내 의도대로, 내 전략적 도구로 조작하려다가 한 순간에 버림 받는다. 이를 간파한 도올 김용옥은 '민중의 함성, 그것이 헌법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법? 법은 군중들의 계약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약은 얼마든지 당사자들 끼리 새로 만들 수 있다.  

계약이 있고 군중이 있던 게 아니고 군중이 있어서 계약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법은 '존재(Being)'가 아니라 '생성(becomming)'이다. 그래서 실정법은 자연법에 비추어 재 해석되고 재 교정되어 가야만 한다.    

군주 상징자들을 벗어난 대중들은 이 사회를 어디로 몰고 가려는 것일까?  어찌 보면 이 군중들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등식을 깨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군중주의? 군중이 모인 곳이 사회이다. 그렇다면 군중이 몰려가는 곳은 사회주의인가?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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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4/20 [11: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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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사시 2004/07/07 [12:30]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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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대자보에서 뵙게 되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