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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절 묵상 - 아주 작은 방 안의 광야에서
[정연복의 민중신학]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속량하라, 감옥의 벽 쓸모없어
 
정연복   기사입력  2008/12/04 [01:21]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사야 40:3-5)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 11:2-6)

교회 전통과 역사에서 세례 요한은 강림절(대림절)과 관련된다. 그는 교회력의 전환점에 서서, 즉 한쪽 발은 낡은 것의 종말에, 그리고 다른 한쪽 발은 새로운 것의 시작에 딛고 서서 주님의 오심을 선언한다. 요한은 강림절의 빼어난 상징이다. 그는 탁월한 인물이요, 연설가요, 목소리다. 그는 위에 인용한 두 성서 본문에서 엿보이듯이 강림절 절기의 화신 바로 그것이다. 
 
제2이사야의 말씀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한 민족에게 맨 처음 전해진 회개와 귀환의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요한 역시 그 말씀에 사로잡힌다. 그 말씀에서 요한은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발견한다. 이 본문을 껴안고 기도하고 또 이로써 위안을 얻고 자극을 받으면서, 그는 이 본문을 오랫동안 열심히 연구했을 게 확실하다. 그는 그 본문과 함께 살며, 그래서 그 본문 안에서 산다. 요한은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그 말씀을 육(肉)으로 채우며 그 말씀에 몸과 목소리를 주고, 그래서 그 본문의 육화 바로 그것이 된다.

누가 아는가? 어쩌면 요한은 어릴 적부터 이사야 40장을 익히고, 쿰란의 종말론적 순수주의자들처럼 엄격한 훈련 교범을 가지고 있는 사막의 한 공동체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는지도 모른다. 요한은 광야에서 양육되었음이 누가복음 1장 80절에서 암시된다.
 
어쨌든 이사야의 말씀은 그에게 신앙의 윤곽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성경을 아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막을 향해 나아가 그곳에 영적 상점을 개업한다.
 
이스라엘의 전통과 역사에서 광야는 준비의 때요, 시험과 회개의 장소다. 그것은 여분의 짐을 벗은 채 가벼운 차림으로, 그리고 텅 빈 공허함 속에서 상처 입기 쉬운 상태로 여행하는 때다.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비에 좌우되는 무력함의 장소다.

공공연한 가난은 이 짐의 일부다. 이 가난은 겉치레나 눈속임이 아니라 광야의 실존의 훈련으로서의 가난이다. 요한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음식과 옷은 그의 선포의 일부다. 그의 생활 방식은 하나의 표징이다. 그가 관장하고 있는 강림절이 상업을 장악한 권세의 천신들에 의해 그리도 공격받고 왜곡되고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통하고 기막힌 일이다. 그들은 온갖 억지와 왜곡을 동원하여 강림절을 물질적 소비주의의 황홀한 축제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의 과대 선전과 흥청망청함을 요한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요한의 표징은 그들의 요란스런 축제들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으리라. 그의 표징은 그들에게 하나의 스캔들이요 심판이며, 또 그들의 피투성이의 뿌리들에 놓인 도끼일 뿐이다.
 
요한이 그런 생활 방식을 택하는 것은 개인적 경건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 전도를 위한 공개적인 행위다. 사제의 핏줄을 타고 난 그에게는 예언자적 경향이 있다. 그가 남들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혹은 스스로에 대해 선하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격리된 공동체를 소집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추상적 양심의 순결성도 없다. 요한이 설교단을 세우고 준(準)제의적 실천을 시작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을 근본적인 변혁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및 정치적 윤곽과 관련해서도 명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은 요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요한은 명성 있는 도심지의 대제사장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그의 제사장적 생득권은 충분한 신임장으로 입증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결코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일들이 "가장자리에서"(at the edge) 발생한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 자신의 탈출을 감행함에 있어, 그는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상업의 중심지 밖으로, 타락하고 사악한 도시로부터 문화와 삶의 변두리로 부른다. 그리고 어느 보도를 보더라도, 그들은 떼지어 요한을 따르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가한다.
 
"전혀 새로운 질서가 막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당신이 만일 그 질서의 일부분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요한의 메시지에 대한 내 자신의 번역이다. 요한은 그것을 명백히 말했으며, 그의 삶은 그가 진지함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그들은 그의 말에 따라 하나님 나라 운동에 깊이 빠져들었다.
 
요한의 세례는 비폭력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결국 교회는 세례를 "성례전"(sacrament), 즉 제국의 군대에 입대할 때 하는 충성의 맹세를 가리키는 라틴어로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모든 각오들이 중심부의 권위자들에게는 불길한 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시끄러운 문제가 임박해 있음을 보았다.
 
이 시대를 연대순으로 기록했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절히 평하고 있다: "이제 요한의 발언들을 듣고 크게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무리를 지어 왔을 때, 그가 그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영향력이 혹시 세력을 형성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기울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던 (사실, 사람들은 요한의 충고에 따라 그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헤롯은, 요한을 적당히 눈감아 줌으로써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뒤늦게 후회하기보다는 그를 죽음에 처함으로써 혹시 그가 야기할지도 모를 재앙을 방지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헤롯의 의심 많은 성질의 희생물이 된 요한은 내가 전에 언급했던 성(城)인 마케루스로 한 사람의 죄수로 보내졌고 또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묘사는 다양한 복음서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며 심지어 요한이 죽은 후까지도 그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 복음서들에서 잘 입증된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일과 "그 밖의 온갖 잘못을 들어"(누가 3:19), 요한이 헤롯을 대담하게 책망해야만 하는 것은 예언자 소명의 본질적 부분이다. 요한은 심지어 권력자들 면전에 대고 공공연히 진리를 말한다. 복음서의 보도들에 따르면, 진리를 듣기 위해 모여드는 군중들보다 진리 그 자체가 권력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위협을 가한다.
 
세례 요한이 체포되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예수의 사역과 시대 인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예수는 요한의 말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고 또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어느 모로 보든 압도적인 개인적 체험, 그리고 일부 묘사들에 따르면 공적인 체험 가운데 이루어졌다. 세례 받은 후에 예수는 곧바로 광야로 향한다. 복음서에서 표현하는 대로 예수는 40일 동안의 혹독한 금식, 그리고 바로 자기 곁과 자기 내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권력들과의 결투로 내몰린다. (물론 이것은 또 다른 절기 곧 사순절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예수는 "외부의 권력자들" 역시 분주하기 짝이 없음을 발견하고는 갈릴리로 돌아온다. 다시 말해 예수는 "요한이 잡힌 뒤에"(마가 1:14) 갈릴리로 돌아온다.
 
어떤 학자들은 이 요한의 체포를 하나의 편리한 문학적 묘책으로 다루며, 이로써 요한의 역할이 예수의 사역의 길을 열어 주는 데 머무르는 것으로 몹시 축소시켜 버린다. 그러나 요한의 체포는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당신의 뺨을 한 대 찰싹 때려 당신을 흔들어 깨우는 시대의 징조와도 같다. 예수는 확실히 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들을 계산하며,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심사숙고하며, 심지어 이미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감지해야만 한다. 헤롯은 예수를 다시 살아난 요한으로 착각할 것이며(마태 14:2), 진정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밀 것이다(누가 13:31-33). 머지않아 예수는 헤롯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는 신중을 기하는 편이 더 좋았으리라. 그러나 예수는 요한이 체포된 것을 자신의 사역의 출발 신호로 받아들인다. 헤롯의 통치 구역인 갈릴리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의 말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되풀이해 선포하기 시작한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 4:17).
 
요한은 이 모든 것을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단편적 보도들을 통해 듣는다.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는 요한 역시 무력감과 참을 수 없는 조바심에 사로잡힌 채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제안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성경을 요한이 그의 성경을 읽듯이 읽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감옥을 예수 강림의 적절한, 그리고 심지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리로 상상하자. 그 감옥으로부터 요한과 더불어 주님의 오심을 기도하자.
 
1943년이 저물어 갈 무렵, 전쟁광인 히틀러의 나치주의에 충실하게 저항한 죄목으로 투옥된 디트리히 본회퍼는 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감옥 생활은 강림절에 관해 내게 많은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희망하며 좁은 감방을  이리저리 거닙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아무런 중요성을 띠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감옥의 문은 닫혀 있으며, 그 문은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힐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력감이 담겨 있는 고백이다. 물론 이 고백에는 어떤 계획적인 의도 또한 담겨 있다. 그러나 굳은 신앙을 잃지 않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라고 해도, 그들 역시 용기가 꺾이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보통이다. 모든 소유물과 자기 정체성의 버팀목을 박탈당한 채로 두려운 공허감이 감도는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정신이 멍해지는 혼란 가운데 빠져들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기 쉽다. 그들은 이런 고통이 어디에서, 그리고 왜 시작되었는지를 망각할 수도 있다. '왜 내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를 따지는 일은 보잘것없고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감옥에 갇혀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공허한 무력감이 마지막 말로 크게 부각된다.
 
한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감옥은 아주 작은 공간 속에 있는 광야다. 단순한 인내심과 충실성이 시험을 받는다. 악마들이 여기저기 기어다닌다. 죄수들은 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도 많은 죄수들이 감옥을 문자 그대로 변형의 현장으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치 치하의 또 다른 죄수인 알프레드 델프는 감옥의 독방에서 일련의 유명한 강림절 묵상을 적었다. 그 묵상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강림절은 각성의 때다. 사람들의 정신은 흔들려 깨워져 존재의 심연에 가 닿게 되며, 이로써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진리들에 눈뜰 수 있게 된다. 결실이 풍부하고 보람있는 강림절을 위한 첫째 조건은 단념과 굴복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강렬하게 뒤흔드는 각성이 생겨난다. 그것이 강림절을 맞이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 행동이다. 삶은 오직 전체적인 틀이 흔들릴 때에만 시작된다."
 
사람들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묵시적(종말론적) 충고에 대해 생각하는데, 교회는 그 충고를 강림절의 위로의 말씀으로 듣는다: 모든 것이 당신 주위에서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보일 때,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누가 21:28).
 
가톨릭의 예수회 신부인 델프는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사실 그는 나치즘이 붕괴하면 새롭게 도래할 사회 질서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를 전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논의하고 있었던 비밀 단체의 일원이었다. 이런 상상들은 집단적 망상에 대한 거부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투옥과 죽음의 위험을 불사한 채 분명한 결단 가운데 나치에 대항하는 범죄, 즉 비밀 단체를 결성했다. 이것은 힐끗 보기에는 "패배주의적 행동"에 불과하다.
 
외견상 상황은 더 이상은 나빠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델프의 보고에 따르면, 유일한 인간적 몸짓이란 한쪽 손을 꼼지락거릴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채워진 수갑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배려를 하는 한 간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수갑에 묶인 채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강림절 넷째 주일의 복음은 역사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감옥이라는 작은 방의 구조를 결정하는 강  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세상의 빛이 그 작은 방 안에서 생겨나서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 역사적 위기의 한 순간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그 강한 자들이 역사 속에서 떠맡았던 역할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의 권좌로부터 가장 신성한 장소(지성소)에 이르기까지, 전망은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인다.... 희망이 없음. 역사는 종종 치유의 손길들을 이 "희망 없음"이라는 수갑으로 채우려고, 그리하여 계몽된 소수를 비탄에 빠뜨리고 그들을 동요하는 주저함이나 값싼 침묵, 혹은 지친 체념으로 떨어뜨리려고 애쓴다.
 
역사는 감옥의 한 독방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마음으로 그 독방을 천천히 서성거린다. 요한이 처해 있던 상황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의 전망들은 거의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는 경범죄로 30일 구류를 살거나 6개월 동안만 징역을 살 게 아니다. 그가 무기징역이나 사형 판결을 받으리라는 것은 확정적이다. 삶의 종말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요한은 한 미래를 외치고 있었다. 그가 저지르는 범죄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이제 그는 그 자신의 미래를 강제력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 그는 살아서는 감옥 문 밖으로 걸어 나가지 못하리라. 결코 다시는 사막의 공기를 호흡할 수 없으리라. 요단강에서 다시는 결코 몸을 씻지 못하리라. 본회퍼와 델프 신부처럼, 그의 출구는 사방으로 막혀 있다. 그는 사형 집행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와 단절되어 있음은 요한에게 아마도 더욱 끔찍스런 일이었으리라. 둘 사이에 벽이 가로막혀 있다. 요한은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가 그 동안 기도하고 갈망하고 준비해온 것이 가까이 와있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방으로 에워싸인 벽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질문의 형태를 띤 요한의 증언을 보게 된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이 불법 메모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 감옥 문의 빗장들 사이로 몰래 빠져 나와 예수에게 은밀히 전달된다.
 
이것은 한 사람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그의 유효성에 관한 전혀 헛되지 않은 걱정이다. 요한은 자기를 변호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다: 내가 옳았던가? 그것은 정말 수고를 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걸까? 이것은 자포자기하는 절망이 아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드러내지 않는다.

요한은 심지어 때를 묻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시제들을 한데 밀착시키며, 이로써 그 시제들은 모든 인습적인 시간 관념들은 깨뜨린다. 이렇듯이 현재와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를 뒤섞는 것은 강림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라는 요한의 질문을 굳이 뭔가에 비길 수 있다면, 그 질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당신은 누구입니까?"(사도행전 9:4)라는 바울의 질문에 더욱 근접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정체성을 묻는다. 간단히 표현해서, 그 질문은 신앙의 한 형태다. 그리고 요한은 어두움과 절망의 폐쇄된 상황에서 그 질문을 입밖에 내었다. 그의 질문 자체가 희망의 한 표징이다.
 
요한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받게 되는데, 그 답변은 실로 하나의 환상이다. 상상해 보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누가 7:22) 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에게 말한다. 살풍경한 감옥의 벽들은 그것이 믿기에는 너무 엄청난 일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는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그 증언을 신뢰할 것인가?
 
내가 장담하건대, 요한의 인식은 껑충 도약한다. 여기에 기쁨이 있다. 독방의 동료들 사이에서 은닉되고, 조심스럽게 취급되고, 공유된 비밀 자료들처럼 조심스럽게 나눠진 것은 죄수들의 기쁨일 것이다. 혹은 알프레드 델프가 묘사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내적 고양과 위안을 감지함으로써 이상하게도 정신적으로 고양될 때 맛볼 수 있는 기쁨이다. 외견상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낙담하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데 만족한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립보서 4:4). 바울이 빌립보 기독교인들에게 적어 보낸 이 글귀는 해마다 강림절에 울려 퍼지는 권고가 되었다. 이 글귀 또한 감옥의 한 아주 작은 독방에서 쓰여졌고, 따라서 마음 편한 몇 마디 말로 여겨질 수 없다. 우리는 바울의 이 격려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다. 이 말씀은 강림절의 진정한 처소, 즉 한 아주 작은 방 안의 세계에서 그 가치가 판단된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리고 죄수들에게 그 기다림은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에 시간을 속량하라. 즉 기뻐하라. 결국 감옥의 벽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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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04 [01: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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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운동공동체 2008/12/04 [21:41]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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