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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의 종교적 현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1)
[정연복의 민중신학] 빌 윌리 켈러만의 "핵제국주의 종교는 '이단'이다"
 
정연복   기사입력  2008/04/29 [02:34]
들어가는 말
 
그리피스 공군 기지에서의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요, 실로 종교적인 행위  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한 양심을 가지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미국 헌법에 대한 제 1차 개정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며, 우리는  이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개정된 헌법에서는 "의회는 종교를 존중하고 설립하거나 혹  은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어떤 법도 제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 신앙과 실천이 특별히 핵전쟁 준비에 대한 인가와 관련된 정부의 행동, 그리고 정부가 그 준비에 쏟아 붓고 있는 엄청난 액수의 돈과 자원들, 또 핵무기에 대한 정부의 신뢰와 충돌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요약하면,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가 행하려고 애써왔던 것처럼 그것들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정부에 의해 거짓된 예배의 자세를 부득불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맥조오지 번디는 미국을 "인류의 선두에 서 있는,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인류라는 승무원 차량   을 뒤로 끌어당기는 기관차"라고 불렀습니다. 역사의 엔진에 대한 그 어떠한 전망도 역사의 주님이신 그분의 배제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민족의 주권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크루즈 미사일을 실어 나르도록 개조된 B-52機에 망치질을 하고 피를 퍼부은 일곱 명의 남녀에 대한  재판에 제출된 피고측 항소 이유서 개요)  1983년 추수감사절에.
 
<그리피스 보습>(Griffiss Plowshare)이란 평화운동 단체가 작성한 이 놀라운 항소 이유서 개요는 법률적으로는 승리하지 못했다. 배심원들에게는 그들의 주장을 승인하는 일도, 그리고 그 주장을 지지하는 전문가의 증언도 허락되지 않았다. 일곱 사람은 상징적인 무장해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징역 2-3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그 자체로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성서적 신앙과 핵무기주의 체계 사이의 종교적·정치적 근본 갈등을 제기했다.
 
이것은 웅변적으로 이뤄진 진정한 법률적 주장이었다. 이와 별도로, 대량의 무차별 파괴의 무기들에 의해 저질러졌고 또 시민적 저항에 의해 명백히 존경을 받은, 국제법상의 기구에서 유래하는 것과 같은 실행 가능한 법률적 논쟁들을 제기하려는 보다 일반적 시도들 역시 미국 법정에서는 지금까지 승리를 거둔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과 [이 재판을 초래한 일곱 사람의] 행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 소송 사건 적요서는 고백적 발언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 적요서는 정당하게도 미국 헌법에 호소한다. 헌법을 남용하여 기초적인 증거 자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파괴시킨 그러한 권력들에 맞서, 적요서는 헌법의 권위에 의지한다. 적요서를 채택한 것은 핵종교의 교활한 창설을 폭로하기 위함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이 적요서는 법정 안에서의 고백적 모두(冒頭) 진술이기도 하다. 그리피스 재판 적요서에서, 기독교인들 즉 행동했던 사람들 쪽에서 규범적이고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성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성서적 견해다.
 
그들의 주장은 십계명 가운데 세 가지 계명, 그리고 미가 4장의 예언자적 요구에 기초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미가 4:3) 만드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 이 미가 예언자의 명령은 지금까지 그리피스가 펼쳐온 모든 평화 지향적 행동들을 이끄는 이미지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이 계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출 34:14) 그리고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신 5:9). 그리피스 회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핵무장한 미국에서의 우리의 삶은 "이러한 율법들과 성서의 하나님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뒤틀려왔다. "왜냐하면 민족 주권을 숭배하는 의식(儀式)이 주요 종교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제국의 신과 제국의 무기라는 우상들을 섬길 것을 요구받고 있다.
 
1. "핵 근본주의": 짐승 같은 자는 누구인가? 
 
법정에서 발언할 기회를 거부당한 전문가 증인들 중의 한 사람은 히로시마의 생존자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유명해진 교사요 정신의학 분야의 작가인 리프턴(Robert Jay Lifton)이었다. 그의 1969년의 철저한 연구 이전에는, 육체 기능과 정신 기능을 무력하게 하는 깊은 상처들, 자신의 삶에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과정들, 그리고 반응 형태들 따위의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경험들은 단 한 차례도 깊이 연구된 적이 없다. 무시 그 자체가 일종의 문화적 방어 기제, 즉 핵무기들이 이 땅에 초래한 끔찍스런 인간 현실을 회피하고 부인하는 방편이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몹시 핵심적이었으며, 여기에서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바로 리프턴의 뒤이은 발견이었다. 핵폭탄과 함께 그리고 핵폭탄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북미인들은 첫 번째 희생자들이 겪었던 행동 양식들, 증후군들, 그리고 무기력 증세들의 일부를 똑같이 겪었다. 예를 들어, 리프턴은 "정신적 무감각"(psychic numbing)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는데, 이 용어는 너무도 거대하고 끔찍스런 죽음의 바다에 갑작스럽게 빠져들어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억제당하고 폐쇄당한 생존자들은 물론, 또한 이러한 무기들에 내재되어 있는 전멸(全滅)의 이미지에 생존자들과 유사하게 무감각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미국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히로시마는 우리 자신의 본문이다.
 
『변호할 수 없는 무기들』(Indefensible Weapons)이라는 저서에서, 리프턴은 핵폭탄이 미국인들의 정신 속에 파고드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방법들을 꼼꼼히 헤아리고 명명하면서, 개인적·집단적 지형을 분명히 그렸다. 이 책에서 그는 핵탄두들과 함께 급격히 늘어나는 환상들과 망상들을 목록으로 만든다. 그는 의식의 표면 바로 밑에 존재하면서 한편으로는 끝없이 보다 더 많은 무기 경쟁을 추구하도록 이상야릇하게 도와주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헌신적인 관계들로부터 일들, 문화 그 자체의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라는 의심을 사람들의 마음에 조장하는 근본적 불안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또한 현재에 대한 소모적인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무의식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에서, 미래의 세대들과의 생물학적 관련은 깨어지고 포기되며, 인내력을 가지고 창조적 일들을 하는 데서 오는 희망은 희미해지고,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왜곡되고 단절되며, 심지어 보다 열렬하게 추구될 수도 있을 불멸의 이미지들에 대한 종교적 의존마저도 부적합한 것이 된다.
 
이 근본적인 불안, 이러한 깨어진 관계들, 불멸의 이미지들에 대한 공격은 뭔가 근본적인 것들(fundamentals)을 보존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불러일으킨다는 게 리프턴의 주장이다. 예배의식들과 새로운 종교들, 그리고 지금까지 정치적 조작에 그리도 종속되어 왔던 기독교적 해석들 따위의 근본주의의 부활만이 아니라, 70년대와 80년대에 종교 분야와 정치 분야에서의 틀림없는 세계적 규모의 근본주의의 분출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라고 그는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징적 지형에서 핵심 좌표들에 도달한다:
 
 핵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르는 계획적인 대량 학살의 시대에, 우리는 이러한 근본주의 물결들이 우리의 집단적 경험의 비교적 영구적인 표현들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  이 모든 근본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부패하고 위험한 것, 즉 핵폭발 장치들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심각한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핵무기주의라는 상황, 즉 하나의 새로운 "근본적인 것"으로서, "구원"의 한 근원으로서,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불멸의 감각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핵무기를 껴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핵무기주의가 하나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는가? 리프턴은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의 호소에 관해 지금까지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주장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임이 확실하다. 더욱이 그는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州 사막에서의 최초의 원자력 시험 폭발에 대한 목격자들로부터의 다양한 주목할 만한 설명과 반응을 수집한다.
 
미군 준장인 토머스 파렐은 "최후의 심판 날의 무시무시한 포효"라는 표현을 끌어들이면서, "지금까지 전능하신 분께 제한된 힘들을 감히 함부로 주무르는 것은 신성 모독적"이라고 생각했다. 핵폭탄 개발,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라는 표적물을 향해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적이 결코 없었던 그. 그가 이렇게 말한다:
 
(핵폭탄으로 말미암은 결과들은) 전례 없이 장엄하고 아름답고 굉장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조명 효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한낮의 태양보다도 여러 배나 더 강렬한, 모든  것을 검게 그을리는 한 빛으로 나라 전체가 밝아졌다.... 그것은 위대한 시인들이 꿈꾸면서도 가장 빈약하고 부적절하게 묘사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신비하고 거룩한 것에 대한 언어가 여기 있다. 저항할 수 없는 경외에 대한 체험이 여기 있다. 핵무기 개발 계획의 감독이며 형이상학적 시인의 냄새를 약간 풍기는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는 바가바드 기타의 몇 줄을 떠올리며 이렇게 읊었다:  "만약 천 개의 태양의 광휘가 동시에 하늘 속으로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분의 광채와 같은 모습이리라.... 나는 죽음이 된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산산이 부수는 자가 된다."
 
전문적인 과학 작가요 핵무기 문제들에 관한 공식 대변인이기도 한 앤드루 로렌스는 창조의 이미지들을 끌어들여 "갓 태어난 세계의 최초의 함성"이라고 읊었다. "하나님이 '빛이 생겨라!' 말씀하셨던 창조의 순간에 최초의 인간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우리가 보았던 것과 매우 흡사한 뭔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하나님의 최초의 핵폭탄을 연상시키는 그런 감각이 비밀스런 시험 작동, 즉 삼위일체(Trinity)라는 암호명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그때 이래로, 그리고 분명히 같은 충동 아래, 무기들 자체에는 신비스럽고 종교적인 이름들이 붙어왔다. 아트라스, 나이키-제우스, 오리온, 타이탄, 포세이돈, 트라이던트 따위의 이름이 바로 그렇다.
 
악몽 같은 지옥의 이미지들이 이제 히로시마와 연결되기 훨씬 이전에, 저 최초의 핵폭발의 가장 아득하고도 오래 지속되는 신화는 하나의 구원 이야기였다. 히로시마는 구원한다. 이야기에도 나오듯이, 일본의 본토를 차지하려는 질질 끈 투쟁에서 핵폭탄을 사용함으로써, 미국인들은 자신의 죽음들, 생명의 손실을 초래하지 않고도 상륙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건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오랫동안 논박을 당해왔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군사적으로 필연적인 게 결코 아니었다. 진실로, 일본의 전쟁 노력의 붕괴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 계획은 지정학적 이유들과 전적으로 과학기술적 추진력에 힘입어 무섭게 앞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모든 세대의 마음속에서 히로시마는 하나의 구원적(saving) 사건이었다. 세계 대전의 종결에 동반된 환희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첫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칭찬과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신의 선물, 메시아적 권능, 그리고 생명의 근원을 가져다주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는 명백히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군연맹(Confederate Air Force)으로 불리는 전역 장교들의 모임은 히로시마 사건을 자극하거나 재현하기 위한 지역의 에어 쇼들에 참가할 수 있다. 그리고 최초의 핵폭탄을 투하했던 전투기와 같은 기종인, 마지막 한 대 남은 B-29기는 현재 공군연맹 소유로 되어 있다. 그 폭격기는 열렬한 구경꾼들 앞을 지나가면서 작고 지면에 밀착된 폭발을 일으켜 작고 세밀한 버섯구름 하나를 만들 것이다. 환호와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한 재연들은 제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핵 신조론의 이러한 측면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핵폭탄이 탄생했을 때 그것은 평화의 선구자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정치적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보복의 위협을 은밀히 가하는 데 곧바로 사용되었으며 또 제국주의적 군사 정책의 근본 원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둘러싼 공식 언어에서는 전쟁이 불가능하게 될 한 시대, 즉 핵무기로 말미암아 전례 없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한 시기의 출발을 예견했다.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 즉 핵무기의 균형으로 유지되는 평화의 출발을!
 
핵이 베푸는 선물에는 깨끗하고 충분한 무제한의 에너지원,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값싼 전력원이 포함될 것이었다. 하지만 핵에너지 연구는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기 위한 감쪽같은 속임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핵에너지 연구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실험실과 시설물을 같이 사용하면서 이뤄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면서도 전후(戰後)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 프로그램에서는 무한한 자원이 제공되는 윤택한 세계와 모든 유익한 것들로 충만한 시대에 대한 꿈을 내세웠다. 요약하면 일종의 낙원을 내세웠다.
 
진실로 이런 약속들은 망상이나 날조, 혹은 노골적인 거짓말이었다. 이 약속들은 우리의 실제 경험 속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논박을 당해왔다. 그러나 핵무기주의 체계에 대한 신조론을 추적함에 있어서, 우리는 미국인들의 집단의식에 깃들인 이런 강력한 뿌리들을 지적해야 한다. 핵을 둘러싼 주의(主義)들과 정책들과 운반 수단들과 마찬가지로 핵의 신화들 역시 시간과 더불어 변화했지만, 초기의 경직된 이미지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 지배력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핵폭탄의 종교적 상징주의에서 돋보인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히로시마는 여전히 우리의 본문으로 남아 있다.    
     
2. 바빌론과 유사한 신화

 
히로시마는 핵무기주의의 제국주의적 세계의 창조 이야기다. 그것은 최초의 그리고 태고의 사건으로 지각된 역사적 행동이다.
 
『악의 상징주의』(The Symbolism of Evil)라는 책에서, 폴 리꾀르는 악의 기원에 관한 네 개의 신비적 "형태"의 설명을 제시한다.
 
악의 기원은 사물들의 기원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 있다. 신은 창조 행위에서 "혼돈"(chaos)과 투쟁한다. 이런 견해와 짝을 이루는 것은 구원을 창조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기초를 세우는 행동은 동시에 해방적 행동이기도 하다.
 
이런 형태를 요약하고 있는 게 바로 저 유명한 고대 바빌론의 창조 드라마다. 해마다 신년 축제에서 재현되는 그 이야기에서, 젊은 신인 마르둑은 혼돈의 여신 티아멧과 격렬한 우주적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마르둑은 티아멧의 소름끼치는 물고기 모양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또 많은 신들 가운데 바로 질서(Order)의 신으로서의 자신의 등극을 위한 길을 닦는다.
 
혼돈이 정복되고 우주 질서가 확립되는 것은 바로 폭력에 의한 것임을 주목하라. 최초의 적인 무질서가 정복되는 것은 바로 무질서, 즉 살인과 전쟁에 의해서다. 이것은 그야말로 탁월한 제국주의 국가의 신화이며, 또 이 신화가 정치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이야기에서는 바빌론 제국이 질서의 세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시인한다. (진실로, 우주 자체가 하나의 국가로 여겨질 수 있으리라.) 그리고 모든 적을 최초의 적인 혼돈과 동일시하는 전쟁 신화가 출현한다. 왕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제국의 질서의 주권을 틀어쥐며, 그리고 공식 축제에서 위임되고 의식(儀式)화된 역할을 실천한다. 
 
바빌론 신년 축제는 그 엄청난 규모로 유명하다. 많은 신들의 형상 앞에 모인 전체 백성이 그 시(詩)  의 근본적인 감정들, 즉 우주적 고뇌, 전투의 의기 양양함, 승리의 기쁨을 회상한다. 축제를 거행함으로써, 그 사람들은 그들의 전 존재를 창조의 드라마의 징후(sign) 아래 가져다놓는다.
 
핵의 신화에서, 그리고 창조 드라마로서의 히로시마에서, 바빌론은 유형론적 동류(同類)를 발견하다.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지키고 서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치러진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괴의 납품업자였다. 전후의 세계는 그 끔찍스런 핵폭탄 투하로 창조되었다. 구원과 창조는 하나이며 동일했다.
 
그 원자폭탄이 일본에 사용되었던 것은 핵을 소련에 사용하고, 이로써 소련이 아시아 지역으로,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시아 시장들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이 오늘날 더욱 더 이해되고 있다. 더욱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는 일이 없도록, 즉 원자폭탄의 존재와 그것을 도시들과 인간 목표물들을 향해 사용하는 필수불가결한 의지 모두를 극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 폭탄의 사용을 재촉했다. 핵폭탄의 사용자들은 세계가 동서로 분열되는 것을 명령했고 보증했다. 어떤 종류의 "질서"가 이루어졌고, 또 핵폭탄은 그 질서의 왕위에 올랐다.
 
신비적 드라마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대로, 원자폭탄이 견제하고 억제했던 것은 미국의 우두머리에 의해 불과 몇 년 전부터 공공연히 "악의 제국"으로 간주되던 소련과 핵전쟁 그 자체의 말할 수 없는 공포, 이 둘 모두였다. 핵무기에 의한 전쟁 억제는 그 어떤 종류의 합리적인 정책보다도 하나의 종교 교리로서 보다 훌륭히 이해된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미국의 종교적 신조론에 담겨 있는 이런 요소다.
 
제국의 핵무기주의 체계나 혹은 그 교리들의 하나에라도 진지한 방식으로 도전하는 것은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시민 저항가들은, (핵무기가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질서의 축복들에 맞서 그들 저항가들이 낳는 위협에 대한 현란한 사법적 비난들에 종종 종속된다. 한 지역 판사는 언젠가 나와 내 친구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법을 그들 자신의 수중에 가져다놓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파국은 차선(次善)을 취하는 데서 초래될 수 있는 그 어떤 형태의 파국만큼이나 끔찍스럽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상술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냉전의 세월 동안 "국내적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사람들, 널리 행해지고 있는 핵무기 정책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공산주의자, 혹은 혼란을 조장하고 다니는 자라는 악마적인 정치적 호칭이 붙여졌다. 새로운 꼬리표들이 영원히 출현한다.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떠돈다. 율법학자들이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마가 3:22) 하면서 예수를 고발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러한 꼬리표 달기와 비난이 이뤄졌다.
 
+ 이 글은 Bill Wylie Kellermann의 책 『신앙과 양심의 계절』(Seasons of Faith and Conscience, Orbis Books, 1991) 제3장의 전반부이다. 켈러만은 핵무기에 대한 깊이 있는 신학적 고찰을 통해 핵무기의 종교적 현상을 다루면서 핵무기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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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4/29 [02: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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