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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리'가 아니라 '삶'에 기초해서
 
정연복   기사입력  2008/06/18 [02:11]
1. 구원과 인간화
 
우리는 진실로 인간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공동의 이상이며, 신앙인들에게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고 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으며, 인간을 왜소화시키지도 않고 하나님을 왜소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세련된 종교적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인간에 대한 순수하고 소박한 애정이 결여된 종교적 거룩함이야말로 참으로 가증스럽다고 여긴다. 예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 선",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해야 할 인정(人情)과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개방적인 친교와 인간 상호간의 용서 같은 소박한 가치들이다.
 
부활 공동체가 예수를 참된 인간이요 참된 신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공동체가 예수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서 신적인 거룩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복음서에서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인간적인 것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신적인 것, 인간적인 모습을 상실한 신적인 예수는 신학자들의 발명품이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는 아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분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인간-예수가 하나님 안에 머물면 머물수록, 그분은 그만큼 더 신화(神化)되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실존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더 인간화(人間化)되셨다. 우리가 무한자와 타자를 향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인간화된 존재에 가까워진다. 타자에의 개방성은 인간 존재의 구원이 여기에 달려 있을 정도로 결정적 요건이다.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비유(마 25:31-46)에 따르면, 심판관은 모든 인간을 타자를 사랑하는 그들의 능력으로 헤아리실 것이다. 인간적인 사랑과 연대, 일치, 그리고 참된 인간적 성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현존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고백하는 어느 교파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삶으로써 참으로 인간적인 존재가 된 사람이다. 노예적 규범과 법 체계를 준수하는 자가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선을 위해 자유롭게 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구원은 인간의 문제이므로 인간과 관계된 일체의 것, 곧 세상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일들 곧 종교, 교육,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관심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치 현상이다. 우리는 정치 영역을 벗어난 인간의 행위를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정치적 의미를 띤다.
 
 
2. 구원과 해방·정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를 행하고 그들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키는 데 있다. 자신들이 사는 땅에서 정의가 주도하도록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민족의 일원임을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다. 본질적으로 유대 민족이 인류 전체에 준 선물은 종교에 기초한 정의를 촉구한 것이다. 성서의 예언자 전통은 정의를 외면하는 종교를 끊임없이 비판한다. 우리는 성서를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굴레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정의의 책으로 읽는다.
 
정의라는 말은 성서에서 구원과 대등한 말이 되기에 이를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또 풍부한 의미를 띤다. 예컨대 바울은 구원을 '의화'(義化)라고 일컫는다. 하나님의 정의는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특징짓는다.
시편과 예언서의 작가들은 해방자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한다. 예언서는 일상 현실의 이야기다. 왕, 사제, 백성 모두의 잘못된 생활과 불의한 현실의 고발이며, 인간다운 삶을 위한 외침이며 몸부림이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의 읊조림이다. 어느 예언서든 주의 깊게 읽어보면 현실 변혁과 개인의 회개 따위의 주요 명제가 선명히 드러난다.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단죄한다. 누구나 손수 노동해서 먹고 살 의무가 있다. 독점과 억압과 착취는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가 한 혈육과 한 형제자매로 살아야 한다는 성서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타인을 불행하게 함으로써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자연과 자원과 과학기술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의무가 있다. 극소수 사람들과 나라들이 사치를 누리는 동안 절대 다수의 사람들과 나라들이 굶주리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어 가는 상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빈곤은 인간의 존엄성에 적대되는 수치스런 조건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결점이나 운명 때문이 아니라 억압자들의 불의 때문에 가난하다. 성서 전체를 통해 가난과 이 가난을 야기한 사회적 조건이 비난받고 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교회의 일차적 관심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우선적인' 것이지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집단화된 자선, 즉 불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제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궁핍한 개인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은 불의에 대한 반응이기는 해도 불의의 원인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는 행위란 정치적 행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타인의 노동의 가치를 가로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구조화된 사회를 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혹은 구조적 변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적 차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해방이란 그것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새 인간’이 출현하는 과정이다. 현 체제의 이기주의적이고 왜곡된 인간성을 넘어 연대성과 창조성으로 형성된 인간이 새 인간이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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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6/18 [02: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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