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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의 교회에서 열린 밥상공동체로 가자
[정연복의 민중신학] 예수님 열린 밥상에는 진짜 음식과 진짜 민중 있어
 
정연복   기사입력  2008/07/11 [16:56]
 언뜻 보기에 일흔 살쯤 되어 보이지만, 실은 마흔 살밖에 되지 않은 어느 부인이 미사가 끝난 후 신부에게 다가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신부님, 저는 먼저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 “정말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성체를 나눠주시는 것을 보고, 성체인 그 하얀 밀떡 조각을, 굶주림을 조금이라도 채워볼 욕심으로 그냥 받아모시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신부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신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음식이며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보프 형제, 김수복 역, 『해방신학입문』, 한마당, 13쪽.) 
 
  만일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추상적 강론으로만 하느님 나라를 설파하셨다면, 그들은 하품을 하면서 그의 곁을 일찍 떠나갔을 것이다. 그들이 구름처럼 예수님 곁으로 모였던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실천, 감동적인 실천이 그들 몸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열린 밥상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었고, 무상의 치유 행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열린 밥상 공동체에서 밑바닥 인생은 자기들이 주인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주님께서 그들을 주격으로, 주인으로, 존엄한 존재로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자유를 맛보았다. 비록 이와 같은 경험이 당시 기득권 층에게는 추문이었겠지만 그들에게는 복음이었으며, 기득권 층에게는 불온하고 불경한 도전이었겠지만 그들에게는 희망과 정의의 초대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대안(對案)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열린 밥상 행위와 오늘 우리들의 성찬예식을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성찬예식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죄사함 행위를 높이 기리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 교회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흘리셨던 피를 상징적으로 마시고, 그 몸을 상징적으로 나눠 먹는 예식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성찬예식은 그리스도(부활 후의 예수)의 구속행위를 기리는 계기였다. 죄 사함을 받으므로 천당에 가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다. 성찬예식에는 부활 전의 예수님, 특히 열린 밥상 공동체를 실천으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없거나 희미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 열린 밥상에는 진짜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진짜 민중이 그곳에 초대되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포용성과 평등성이 있었고, 특히 그의 사랑, 곧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이 넘쳐흘렀다. 밥상 공동체 참여자들은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느꼈다. 그런데 오늘 제도교회에서 의식화된 성찬예식에는 진짜 음식이 없다. 그곳에는 예수님 모습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듯하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난 이천 년 간 제도교회는 성찬예식을 통해 신앙의 그리스도만 기려온 셈이다. 역사의 예수와 그의 열린 식탁 공동체는 잊혀지고 만 듯하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예수님의 밥상 앞에 나와 그 분의 열린 뜻, 정의로운 마음을 체휼(體恤)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거점이 될 수 있다.
(한완상, 새길교회 1999년 설교 모음 『약속하시는 하느님』, 도서출판 새롬) 
 
  성서는 해방의 삶, 그 감격적 체험의 회상이며 기록이다. 성서는 출애굽의 해방체험에서 출발하는 선조들의 삶에 대한 기억의 끊임없는 반복이며 그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미사 또한 기억이다. 슬픔과 감격의 끊임없는 재현이다. 예수의 삶, 특히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의 고뇌와 애절한 호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약속의 생생한 기억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은 예수의 삶 전체에 대한 기억이어야 한다. 예수의 신앙관, 세계관, 역사관, 인간관, 종교관, 사회관, 정치관 전반에 걸친 생생한 기억과 재현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미사를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 미사는 결코 교회 건물 안에서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미사는 예수사건, 삶의 현장,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예수사건에 대한 기억이다. 구체적으로는 유대 관헌들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불안과 공포, 초조 가운데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저녁 만찬 때 일어난 사건의 기억과 재현이 바로 미사다.
 
미사 중의 경건심, 성체께 대한 최선의 예의는 곧바로 일상생활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루 세끼 먹는 식탁의 자리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고 이웃과의 나눔을 다짐하고 연대적 기쁨을 확인할 때, 성체신심의 실천적 뜻이 되살아난다. (함세웅, 『칼을 주러 오신 예수』, 빛두레, 18-19쪽.)
 
  우리는 아직도 성찬식을 연구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첫째,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스러운 만나가 아니다. 그것들은 나무에서 방금 따낸 사과도 아니요, 꼭지를 틀면 흘러내리는 물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재배되고 성장하고 제품화된 물건이다. 포도주는 짜내야만 하고 떡은 구워져야만 한다. 그것들은 포장되어야 하며, 그리고는 트럭 운전수에 의해 사람들이 일하며 교통 경찰관이 순찰하는 고속도로로 운송되어 결국 우리에게 실려 온다. 즉 예수께서 우리에게 현존하시는 떡과 포도주를 우리는 전적으로 이 세계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는 이 세계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 트럭 운전수, 경찰관, 빵 굽는 사람, 포장하는 사람, 그리고 이 물건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해준 모든 사람들이 없이는 우리는 행동할 수 없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에 대해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런 것들이 있는 세계에서 오늘 우리에게 현존하신다.
 
둘째, 이 떡과 포도주는 떼어지고 부어졌다. 이 물건들이 떼어지고 부어지는 일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극적인 방법을 보게 된다. 화체설(化體設)이나 성체공존론(聖體共存論)에 대한 논쟁은 우리에게 전혀 의미가 없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이런 본질의 범주 문제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떡을 들어 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해 쪼개진 내 몸이다.” 우리가 이 떡에 동참함은 쪼개짐에 참여하는 일이요, 인간들의 학대와 조롱과 멸시와 거절에 참여하는 일이다. 잔에서 포도주가 부어질 때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우리 자신이 쪼개지고 부어지도록 허용하는 우리의 무력함과 우리의 허약함이야말로, 우리가 여기 이 떡과 포도주에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이다.

셋째, 이 떡과 포도주는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몸 안에 섭취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소화되어 우리의 혈구(血球)와 미분자(微分子)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포도주와 떡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생명의 일부로 만든다.
 
넷째, 이 떡과 포도주는 정신적 품목이 아니요, 당신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보고 먹을 수 있는 고체적이며 실체가 있는 물건이다. “오, 주님이 얼마나 선하신지를 맛보고 살펴보라!” 신의 “샬롬”과 화해를 증거하면서 치유와 완전성에 일치하려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적개심이라든지 소외, 또는 쪼개짐의 순간에 육체적으로 현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테제 공동체는 정치적 긴장이 있고 경제적 착취가 자행되는 곳 어디에나 자신의 회원들을 보내 거기서 살도록 한다. 그들은 “정신적 현존”이나 “종교적 관심”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육체적 현존으로 거기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위운동이나 방어선을 치는 운동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러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정신적 우정이나 종교적 동정은 피켓라인에 서 있는 육체적 인간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거기에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본회퍼가 말했고 또 우리가 동참하도록 부름받은, “이 세계에서의 신의 고난”은 그와 똑같이 물질적이다. (하아비 콕스, 마경일 역,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 135-139쪽.)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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