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꽃몸의 불덩이여, 이 땅의 청년 예수들이여
[정연복의 민중신학] 김의기 김종태 김세진 김상철 천세용 합동 추모시
 
정연복   기사입력  2008/05/29 [12:06]
김의기 열사여

집안의 6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 문에 들어선 그대는
대학 2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소위 ‘문제학생’이 되었다.  

“형님들이 기름옷을 입고 일하는데
내가 어떻게 좋은 옷을 입겠는가?”라며
늘 흰 고무신에 물들인 군복 바지를 입고 다녔던 그대.

빛고을 광주에서의 그 처참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아직도 온 땅에 진동하던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한 그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곤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입이 있어도 감히 누구도 입도 뻥끗 하지 않았던
광주의 참상을 온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그대, 시대의 예언자여,
광야에서 고독하게 진실을 외친
21살 꽃다운 나이의 청년 예수여.

김종태 열사여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16살 어린 나이부터 힘든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배움에의 열망을 뜨겁게 불태웠던 그대.

“단순히 임금 한푼 올리고
노동조건 개선하는 것만이 노동운동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성숙한 노동자 의식에 다다른 그대.

“모든 고통을 당하는 나의 형제들을 위해
나의 고통을 주님께 바치옵니다”라고 고백하며
노동운동에 온몸을 바칠 것을 결심한 그대.

죽기 바로 전날, 그대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냉면을 사주거나,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성의로 2000원씩을 주었다.
이것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표지였다.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한테 눌리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고쳐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대를 며칠 앞둔 방위병의 신분으로
80월 6월 9일 오후 6시 신촌 로터리에서
한 글자 한 글자 혼을 담아 써내려간
광주학살 규명, 민주주의 회복,
노동 삼권 보장을 요구하는 전단을 뿌리며
23살의 꽃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이 땅의 노동자 예수여.

김세진 열사여

대학 4학년이 되었을 때,
1년만 무사히 넘기고 유학 갈 것을 권하는 어머니에게  
그대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어머니는 예수 믿는 분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접 받으러 오셨나요?
지금 고생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 자식만 안일하게 출세해서
편히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대는 부모의 가슴에 냉정하게 비수를 꽂는
철부지 불효자였던가?
아니다!  
분신하기 이틀 전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대는 말했다.

“저의 대학생활은 인간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의 쟁취를 위한 고민의 과정이었습니다....

저의 행위는 한 순간의 영웅심이나,
학생 회장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가슴 뿌듯하게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투쟁 속에서 그 날을 앞당길 것입니다.“

그대는 꿰뚫어 알고 있었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복권되고
민족을 통일하는 민중 민주주의만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참된 역사적 진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1986년 4월 28일 아침 9시
신림동 사거리에서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분신하여
21살의 순결한 청춘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 그대.  

강상철 열사여

그대는 기도했다.
“하나님을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사오며
이 땅의 민주화를 믿사옵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모든 형제들에게
민주화와 더불어 해방이 있음을 믿사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 땅의 민주화와 민중해방에 대한 믿음,
이 셋이 그대의 가슴속에서는 하나였다.

분신 자결을 며칠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대는 나지막이 고백했다.

“한술의 밥이 나에겐 중요하질 않네.
구차한 목숨이 중요하질 않네.
어여쁜 여자가 중요하질 않다네....

아! 민주여, 자유여, 평등이여,
그대는 어디에 가 있는가?
그대가 있는 곳에 나 함께 가련다.
나 함께 그대와 더불어 살련다.“

민주와 자유와 평등은
그대의 머릿속에 뿌옇게 맴도는
그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대가 목숨 바쳐 사랑할 님이었다  

그래서 그대는
1986년 6월 6일 목포역 광장에서
전두환과 5.18 쿠데타 주동자 척결,  
민주인사 사면복권과 석방,
직선제 개헌 단행을 촉구하며 분신했다.  

병상 인터뷰에서
그대는 분신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것은 나 혼자와의 약속만이 아니라
모든 민중과의 약속이고 민족과의 약속이었기에
나는 끝내 하나님이 안주하고 계시는 몸에
라이타를 켰습니다.”

“하나님이 안주하고 계시는 몸”에 불을 지른
그대 22살의 강상철 예수여,
불덩이가 된 하나님의 몸이여!

천세용 열사여

지금쯤은 마석 모란공원에서 고운 흙이 되어
이 땅의 민중들을 쏘옥 빼닮은
이름 없는 꽃이나 풀들과 한데 어우러져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그대.

무엇이 그리도 바빠
그대의 모습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가도
오늘은 소스라치게 그대가 그립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주경야독으로 대학 생활을 하며
뭔가 깊이 사색하는 그윽한 눈빛으로
인간사랑 민중사랑의 어진 마음을
한 뺨 한 뺨 키웠던 그대.  

1991년 5월 3일
침체된 학원 자주화 투쟁에 불을 당기고자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 자행한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저 높은 하늘로부터
이 낮은 땅, 땅의 밑바닥까지
수직으로 낙하한 불기둥이여.
기막힌 하나님의 성육신이여.

사랑하는 가족들과 벗들을 남겨두고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20살의 앳된 청년 예수여.

겨레사랑 민중사랑의 순수한 마음으로
꽃 같은 청춘을 불사른 그대 열사들이여.    

그대들의 스무 살 남짓의 푸른 목숨이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활활 타오르게 했던
그 미친 세상은 이제 종말을 고했는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대들이 목숨 바쳐 깨부수고자 했던 세상의 벽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노동자, 농민, 어민, 도시빈민, 소외 계층들....
우리와 상관 없는 남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 형제?자매, 벗, 이웃인 이 땅의 민중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다.
  
너의 몸이 불덩이가 되고
나의 몸이 또 하나의 불덩이가 되어
이 땅의 역사의 불순물이 말끔히 씻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까지는....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5/29 [12:06]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낮별지기 2008/06/01 [19:59] 수정 | 삭제
  • 기자님
    공동추모제 가 언제 어디서 하는지요
    smjsa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