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소개
 
정연복   기사입력  2008/06/20 [14:37]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73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의 내용과 어울릴 만한 기도문들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08년 7·8월호 중에 8월 다섯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 8월 다섯째 주(8.31) 설교 자료

설교 제목: 기독교 카페의 메뉴판

* 성경 본문: 로마서 12:9-21
* 성경 주석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로마서 1-11장과 로마서 12-15장 사이에 명확히 갈라진 틈이 있음을 주목한다. 둘 사이에는 초점의 변화가 있는 반면,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 마지막 부분의 간곡한 실천적 권고들이 없이는 여러 면에서 불완전할 것이다. 이 장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권능을 증언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법과 관련된다.

편지의 끝에서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위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행동들의 함축들을 밝힌다. 바울은 12장 서두에서 “그러므로”(therefore)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뒤따르는 권고들이 바울이 앞서 주장했던 모든 것과 관련됨을 암시한다. 사도는 온 우주에 침투하는 죄의 통치에 맞서 싸우는 하나님의 권능을 제시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살아갈 것을 로마인들에게 촉구했다. 교회가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고 완전한 뜻의 참된 표지들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하다(12:1-2).

12장의 바울의 간곡한 권고들은 앞에 나오는 주장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또한 실천적으로 로마의 신자들의 실제 상황과 관련된다. 13장에서, 바울은 그들의 정치 환경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능한 한 최대한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그리고 세금을 내라고 로마인들에게 촉구할 것이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전형적으로 자발적인 집단들과 단체회합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그래서 한 회합이나 종교 집단이 로마의 평화에 위협적이라고 인식되면 곧바로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유대인 메시아를 찬양하기 위해 모이는 추종자들의 집단을 정치적으로 용납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심중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눈에 띄게 주의를 끌지 않는 한, 그들은 계속해서 모임을 갖는 것이 허용되리라고 바울은 믿는다. 공동체 형성은 바울의 메시지에서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해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신자들이 평화롭게 행동하기를 바울이 원했으리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15장에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를 마음속에 그린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교회 내부의 긴장들을 다룬다. 14장에서, 이 긴장들의 일부는 음식 규정, 그리고 특정한 예배일을 지키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 분명하다. 분명히 로마 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남들을 섣불리 심판하고 있었고,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 가운데 행동할 것을 촉구하며 하나님 나라의 보다 큰 그림에 그들이 초점을 맞추게 한다(14:13-23). 바울은 궁극적으로 15:2에서 그들에게 간청한다: “우리는 저마다 이웃의 뜻을 존중하고 그의 이익을 도모하여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그들과 아무런 개인적 관계도 없는 이 사도가 14-15장에서 그들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보다 특정한 쟁점들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그는 먼저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울에게 공동체는 하나님의 풍부한 은총과 권능의 살아 있는 증거이다. 그는 12:3-8에서 공동체의 다양성에 박수를 보내며, 그리고 그들 자신을 통일된 몸으로 생각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12:4).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각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독특한 은사를 주셨고, 각자가 전체를 강화하고 그들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하도록 그 은사들을 사용하기를 기대하심을 인식해야 한다(12:5). 바로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12:9-21에서 현재의 시대에 통일된 몸이 되는 방법을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일련의 명령을 내린다. 

이 부분은 악의 한복판에서도 참된 사랑의 행동들을 실천하는 것으로 틀지어진다. 첫째 부분인 9-13절은 사랑의 가시적 표지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형제다운 애정을 나타내기, 서로 존경하기, 성령에 힘입어 열심히 살아가기, 희망 안에 살아가기, 성도들의 필요에 도움을 주기, 그리고 환대를 실천하기. 그러나 두 번째 부분의 일련의 절은 악의 면전에서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 훨씬 더 관련된다. 악이 분열들을 통해 공동체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이든, 혹은 로마 제국 안에서의 교회의 상황에서든. 이 간곡한 권고들 속에서, 바울은 교회가 교회의 원수들이 저지른 불의들을 제거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이 되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그는 정의와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며,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현함으로써 악을 정복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9-13절에서, 사랑은 바울의 가르침에서 중심적이지만 미움 또한 그렇다. 여기에서는 흐릿함의 여지가 없다. 사랑은 선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모든 것과 관련된다(12:2). 하지만 바울은 또한 신자들에게 미워하라고 촉구한다. 보통의 미움은 보통의 선보다도 어떤 경우에는 공동체를 더 효과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악”(evil)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함축한다. 바울에게 모든 악은 육체를 통해 작용하는 죄의 권능과 관련된다.

만일 로마의 신자들이 성령에 따라 산다면(11절), 그들은 악한 것을 미워할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부의 다툼은 성령에 따른 삶의 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분열과 불일치를 낳는 죄의 권능의 표지이다. 바울은 이 불일치가 과연 무엇 때문인지를 인식할 것을 로마의 교인들에게 촉구하는데, 그것은 악의 두르러진 표지이다.

교회가 긴장 속에 살고 있음을 바울은 날카롭게 인식한다. 이 구절을 통틀어 되풀이되는 명령형 동사들은 이 현실을 입증한다. 신자들은 성령의 표지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부패된 영역 안에 아직도 머물러 있고, 그리고 서로 말다툼하는 일을 통해 그들 자신이 죄의 권능에 사로잡히기 쉬움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라”고 촉구한다(12절). 이 희망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료 상속자들로서 영광스럽게 될 희망,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증언할 희망을 반영한다. 이 긴장의 때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기다리는 때에,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고 기도를 통해 한결같이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한다(12절).

악의 존재가 이 시대에 여전히 그들의 삶을 괴롭히기 때문에, 바울은 박해(14절), 큰 슬픔(15절), 다툼(16절), 그리고 원수들(17-20절)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조언을 그들에게 한다. 하지만 그 충고들은 개인들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공동체를 도덕적정신적으로 교화한다(15-16절).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18절)은 공동체 내부의 삶뿐만 아니라 남들이 공동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과도 실제적인 함축들을 갖는다. 만일 공동체가 실제로 하나님에게 복수를 맡길 수 있다면 그 어떤 자칭 원수들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

바울의 마지막 권고는 선교적 명령이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21절). 다시 말해, 죄 때문에 부패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의 가시적 표지들이 되라고 바울은 그들에게 간청한다.

12:9-21절의 일련의 명령은 과거를 스쳐가라고 유혹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반면, 여기에서 바울의 간곡한 권고들은 신자들이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드러내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공동체가 서로 다투고 불화하는 일을 피하고 모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줄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공한다.

* 설교 본문

기독교 신앙은 일종의 공짜 점심 같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빚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기대되는가?

공짜 점심은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공짜 점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공짜 점심을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의 설교 본문과 관련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합당한 봉사”(reasonable service)에 관해 말한다(롬 12:1 참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도적 공동체에게 기독교 카페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지불하는”(pay-as-you-can) 타입의 사역을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소리를 듣는다. 공짜 점심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짜로 마음껏 즐길 수는 없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들을 공짜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과 자비의 식탁에서 홀짝홀짝 먹고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울의 신학적 말투에 따르면, 계산서에 책임을 지는 것이 당신이 받은 것에 대해 액면가 그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온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우리가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은 보상적인 고난이 아니라 참여적인 고난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들의 몇 가지 목록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행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행하도록 기대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 중 일부를 행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바울이 특별히 좋아하는 한 가지 주제, 즉 성령의 은사들을 되풀이하여 말하는 몇몇 본문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9절)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에 매달릴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열심을 낼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존경심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열렬할 수 있다. 우리는 봉사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희망 속에 기뻐하고 고난 속에서 인내할 수 있다. 우리는 “성도들”의 필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낯선 이들에게까지 환대를 확장할 수 있다.

대충 이 정도만 실천해도 충분할 것이다. 바로 이것들이 기독교 카페의 메뉴판에 적혀 있는 항목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항목들의 가격을 보고 있는가? 우리가 그 가격에 걸맞게 지불한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우리는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지불하도록 기대되고 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을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미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들의 필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불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 기독교 카페는 파산할 것이다.

바울은 이 카페의 “종업원들”에 관해 이미 말했었다(3-8절 참조). 우리는 타월을 집어들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12:3) 실제로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들 각자는 독특한 은사를 받았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들이 제각기 감당하기에 적합한 일들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에 따라 각기 다른” 일들이 있다(12:6).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믿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할당된 과제와 그 과제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기대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들 중 일부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봉사를 하도록 기대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절대로 행할 수 없어요”라고 우리는 종종 말한다. 하지만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말했고 그들 자신의 자기 평가에 있어 놀랍도록 틀렸던 여러 사람들이 성경에도 있다.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공동체의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불필요하다고 일부 사람들은 생각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것을 행하고 있으므로, 아주 잘 행하고 있으므로, 나는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값을 지불할 필요도 없고, 팁마저도 줄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이것에 관한 바울의 견해는, 몸의 각 지체들이 제각기 행할 일들을 가지고 있듯이, 성령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독특한 과업을 주셨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요청되는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신이 선생이라면, 가르치는 일에 충실하라. 당신이 남을 간곡히 훈계하는 사람이라면, 훈계하는 일에 충실하라. 당신이 목사라면, 목회에 충실하라. 당신이 베푸는 사람이라면, 남에게 베푸는 일에 충실하라. 당신이 지도자라면, 남들을 지도하는 일에 충실하라. 당신이 인정 많은 사람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자선을 베푸는 일에 충실하라(7-8절).

한마디로 말해, 당신이 지불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지불하라. 그런데 이것으로 바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14-21절에서, 그는 기독교 카페의 일련의 부가적인 정식(定食)들의 가격을 제시한다:

*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라.
*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
*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라.
* 오만한 생각을 버려라.
*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어라.
* 당신이 아주 똑똑하다고 잘난 체하지 말라.
*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라.
* 당신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
* 배고픈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라.
* 목마른 원수에게 마실 것을 주라.
*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당신이 지불할 수 있는 대로 지불하는” 타입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켄테키 주 중부의 장로교회의 고위 성직자인 베티 메도우즈는 그녀의 삶을 변화시킨 어느 해 여름의 안식년 휴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계를 잠시 떠나 석 달 동안 “숨어” 지내면서 와플 하우스의 호스티스로 일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놀랍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날마다 나타나셨다.”

7월 4일, [미국 남동부의 주인] 앨라배마로부터 한 가족을 싣고 오던 자동차가 주차장에서 고장났다. 어디에서도 자동차 정비 공장이나 수리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한 웨이트리스가 그들의 곤경에 관해 듣고 그녀의 남자 친구를 불렀다. 그는 15분 후에 도착해서 그들의 자동차를 고쳐 주었다. 수리비는 고작 커피 한 잔뿐이었다.

“수리공과 웨이트리스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라고 베티는 쓴다.

한 변호사가 와플 하우스에 가게를 열었다. 그는 지역의 궁핍한 사람들에게 법률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지불할 수 있는 만큼의 돈만 지불하면 되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여자가 식당 안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그녀는 다른 의학적 어려움들의 징후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찰이 그녀의 남자 친구를 음주 운전으로 방금 체포했고 그의 트럭을 압수했다. 거리로 내쫓긴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식당은 몹시 분주해서 종업원들 중 누구도 그녀를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는 그녀의 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녀를 태우기 위해 곧장 자동차를 몰고 달려왔다.

베티는 이렇게 쓴다:

“지주가 도착했을 때, 나는 ‘당신의 소작인들 중 하나인 이 여인을 위해 이렇게 먼 거리를 자동차로 달려오다니 정말 친절하시군요’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가 왜 달려오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지주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아름다운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기독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당신도 믿음을 좀더 키우고 싶지 않은가? 기독교 카페에서 당신이 주문하는 메뉴의 크기를 초대형으로 하고 싶지는 않은가? 당신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
   
* 예화

+ 비교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자족해야 한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소유를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은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내면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길을 가다가
혼자 힘겨워 하는 할머니를 만나면
조용히 다가가 손 내밀고
따뜻한 이웃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어린이가 한 손을 높이 들고
파란 신호등을 기다리면,
건널목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좁은 길목에서 옷깃을 스치고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건네주어
그를 바라보는 이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게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작은 도움과 친절에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마음을 열면 말입니다.
(작자 미상)

+ 바보사랑

사람들이 바보라 비웃어도,
설령 놀림거리가 된다 해도 나는 바보가 부럽습니다.

남들이 즐기고 떠나간 자리를 청소하며 흐뭇해하는 바보,
친구가 버스표를 잃어버렸을 때,
내 마지막 남은 버스표 한 장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바보,

푸른 하늘이 오염되어
제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슬퍼하는 바보,
남의 슬픔이 마치 제 슬픔인 양 눈물 흘리는 바보,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볼 때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죄인 양 미안해하는 바보.

나는 그런 바보들의 순수함이 좋습니다.
제 것 하나 못 챙기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누군가가 손가락질한다 해도 가끔은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박성철, 『행복 비타민』)

+ 뭐니뭐니 해도 사람이 좋아라

좋아라
빽빽한 시내버스 속이
이다지도 좋을 수 있으랴
가난한 마음들이 서로
옷을 부비며 살갗을 부비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늦여름 시내버스 속은
좋고도 정말 좋아라
땀냄새를 섞으며 함께 흔들리는
때론 하느님을 함께 나누어 갖는
한 시대의 슬픈 살덩이들
정말로 아름답고 좋아라
정말로 소중하고 소중하여라
손잡이 하나에 몇 명씩 매달려도
이웃을 발등을 쬐끔이라도 밟지 않으려고
벌컥벌컥 숨을 쉬는 사람들...
백년 만년 바라보고 싶어라.
(김준태시인)

+ 신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님이 ‘저 위 어딘가에’, 아니면 ‘바깥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지전능하신 분과 교감하려고 몹시 애썼다. 그러면서 좌절과 분노를 느낀 적도 많았다.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를 전혀 찾지 못했다. 물론 나는 자라면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 혹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나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은 직후로, 그때 나는 산다는 것이 끔찍히 싫었고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고통과 외로움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진정으로 그분을 믿고 있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오히려 나를 짓눌렀고 내게 어떤 해답이나 마음의 안정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렇게 밑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 존재하심을 깨달았다. 그제야 하나님에게 다가서기 위해 구름과 산 위로 손을 뻗을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계셨고, 그분은 내가 인생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춰 나갈 수 있도록 돕고 계셨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시므로 우리는 그저 그분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또 믿어라.
(아서 칼리안드로배리 렌슨, 『행복한 삶을 사는 10가지 작은 원칙』)

+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본다

당신은 수선화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노르비치의 줄리안은 그럴 수 있었다. 14세기 영국의 신비가였던 그녀는 가장 세속적인 일상 속에서도 기쁨을 불러모을 수 있는 시각을 지녔다. 그녀는 “기쁨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단순하고 깊은 믿음 가운데, 그녀는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시다”(이사야 6:3)라고 선언했던 예언자 이사야와 한마음을 이룬다.

+ 일상 속의 하나님의 임재 
 
로렌스 형제는 파리 근교의 수도원의 주방 요리사였다. 그는 수도원 주방에서 접시 닦기, 채소 씻기, 달걀 부치기, 바닥 청소 등 산더미 같은 일을 하면서도 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특별히 체험하기 위해 주방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고 여행하거나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쓴 책은 유럽의 많은 신도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구경하려고 로렌스의 주방으로 몰려들곤 했다.

부엌에서, 학교에서, 가게에서, 학교에서, 또는 시장에서 우리는 언제라도 그분께 찬양과 기도를 드릴 수 있다.

+ 경리과에도 하나님은 계신다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배달을 나갈 때마다 식당 안쪽을 향해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인사하고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손님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손님이 주인에게 물었다. “아무도 없는데 왜 인사를 합니까?” 그러자 주인은 대답했다. “이 식당엔 하나님이 항상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 인사를 드리고 나가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직장 생활에서 소극적인 경우가 종종 있다. 직장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직장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신앙이다. 하나님이 직장에서 당신과 함께하심을 믿는가? 그냥 자리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면서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느껴보라. 좀더 실감나게 하려면 “하나님, 안녕하세요” 하고 속삭이듯 인사를 드려도 좋다. 직장 문을 열고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오시는 주님을 상상할 수도 있고, 이미 내 옆에 앉아 계신 주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이제 사무실에 주님을 위해 한 자리를 더 마련하고 이렇게 기도해 보자. “내 눈을 열어 옆에 계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내 귀를 열어 매 순간 충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내 입을 열어 안타까운 마음을 주님께 말하게 하소서.”
(방선기,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 계산서는 천국에

허드슨 테일러의 아버지 제임스 테일러는 남다른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약제사로 일하면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생계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는 손님들로부터 약값을 정당한 가격 이상 받는 일이 없었다. 정직을 생활 신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에게서는 약값을 절반만 받거나 아예 받지 않았다.

“어머, 지난번에도 약을 공짜로 지어 주셨잖아요.”
“우선 병이 나아야 하니까 부담 느끼지 말고 그냥 가져가시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세요.”
“그래도 죄송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계산서는 제가 벌써 천국으로 보냈으니까요. 그러니 거기 가서 갚으시면 됩니다. 약이 떨어지면 또 오세요. 그런데 한 가지 꼭 부탁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 당신이 갚아야 할 약값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제임스 테일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의 약국은 날로 더욱 번창하는 복을 누렸다.
(기독교문서선교원 엮음, 『하나님을 사랑한 성자들의 118가지 이야기』)

+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구원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는 “전도함으로써 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전 세계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난파선과 같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신 구명대를 가지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 배로 구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어디에서나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백혈구 같은 예수

우리 몸 속에 혈관을 타고 다니면서 산소를 운반하는 세포는 ‘적혈구’입니다. 적혈구는 그렇게 온몸 구석구석 산소를 공급해서 우리 몸이 힘있고 활기차게 하고는 역할을 다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또 백혈구 세포는 혈관 곳곳에 숨어 있다가 몸 속에 나쁜 병원균이 침입하면 온몸으로 그 침입자를 감싸고 함께 죽어버림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오직 자기만을 위해 몸집 불리기를 하는 고약한 세포가 있는데 바로 ‘암세포’입니다. 암세포가 극성을 부릴수록 우선은 그 부위가 죽고, 나중에는 몸 전체가 죽으면서 암세포 자신도 죽고 맙니다.

사람 중에도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적혈구나 백혈구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암세포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20세기의 성자로 불리는 인도의 간디는 낡아빠진 물레 하나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다고 합니다.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적혈구 같은 사람입니다. 남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라 생각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는 사람은 암세포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다고 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담장을 높이 쌓아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 정말 바보 같은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남은 구원하였으면서 자기는 구원하지도 못하는구나!”(마가 15:30) 남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준 백혈구 같은 사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작자 미상, ‘백혈구 같은 사랑’)

+ 내가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삐에르 신부는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일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분은 빈민구호 공동체 <엠마우스>의 창설자입니다. 현재 89살인 신부님의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에 그의 경험담이 실려 있습니다.

한 청년 신사가 자살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와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살하려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 문제, 경제적 파탄, 사회적 지위의 하락.... 이 여러 가지 힘든 상황 때문에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고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신부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과 함께 말합니다. “자살할 이유가 충분하군요.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면 도무지 삶을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죽을 거라면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준 다음에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청년 신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살을 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부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야 어차피 죽을 건데, 만일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 동안 신부님을 돕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짓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신부님의 일을 옆에서 돕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부님이 나에게 돈을 주었거나 내가 들어가 살 집을 지어 주었다면, 나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부님과 함께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내가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 게 참된 행복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 진정으로 하나님께 몰두하는 사람

어느 날 랍비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의 제자는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 방의 한쪽 구석에는 요람이 있었는데, 그 요람 안에서 갓난아이가 울고 있었다.

랍비가 물었다. “너는 저 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제자는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말했다. “참으로 하나님께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벽에 붙어 있는 한 마리 파리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 향기를 풍기는 삶

어느 날 선교사가 간디에게 조언을 구했다. “간디 선생님, 힌두교인들이 산상설교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디는 말했다. “장미가 가진 비밀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장미를 좋아합니다. 장미는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선생, 당신도 향기를 풍기십시오.”

+ 전도·선교에 관한 명언

“나는 하나님을 위한 로비에 전념하고 싶다.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더 나은 사람을 찾는다.” (빌리 그레이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옥에 가리라.” (윌리엄 빌리 선데이)

“내가 철학을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칭찬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회개했다.” (A. P. 깁스)

“당신이 이 땅에서 해야 할 한 가지 사업이 있다. 그것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

“동전을 사람에게 던져보라. 그의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꿈을 그에게 던져보라. 그의 가슴이 환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에게 던져보라. 그의 삶이 빛나게 될 것이다.” (아들러)

“만약 그들의 집이 불타고 있으면 당신은 달려가서 그들을 도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그들을 돕지 않는가?” (리차드 백스터)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인격이 우리를 점령하신다면, 우리와 맞부딪치는 사람들마다 영광의 흔적이 입혀질 것이다.” (프리스)

“만일 선교가 없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미상)

“하나님이 당신을 선교사로 부르셨다면 황제를 부러워하지 말라.” (제롬)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인도자: 영원하신 주님, 당신을 아는 마음의 빛을
회  중: 당신을 사랑하는 영혼의 삶을
인도자: 당신을 섬기는 의지의 힘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회  중: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알고 당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인도자: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을 온전히 섬기게 하소서.
회  중: 당신을 섬기는 자가 진정 완전히 자유로운 자임을
다같이: 우리가 알고 있나이다.
(성 패트릭, ‘영원하신 주님’)

+ 한 목소리로 드리는 기도

하느님,
온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강하디 강한 부드러움을 주소서.
죽음보다 강한
당신 사랑을 주소서.
사랑과 다정함을 주시고
닿기만 하여도
부드러운 감미로움을 제게 주소서
(햄프틴의 돔 비오, 19세기, ‘온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남 속에서 나를 느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볼 때 눈을 보게 하소서.
지위도 돈도 지식도 보지 말고,
곱고 미운 것 보지 말고,
눈을 보고 마음을 보게 하소서.
   
생명의 님 예수는 죽어 가는 병자들, 세리와 창녀, 고아와 과부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으니,
나도 믿음의 눈이 열려
내 작은 이웃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나 사는 동안 힘센 자나 약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차별 않고 따뜻이 대하며
떳떳이 살게 하소서.
(박재순목사)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내가 해준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준 작은 선물 때문에
내가 베푼 작은 친절 때문에
내가 감사한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작은 미소 때문에
내가 나눈 작은 봉사 때문에
내가 나눈 사랑 때문에
내가 함께 해준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기뻐할 수 있다면

내일을 소망하며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작자 미상일본,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 <설교자노트> 구독을 신청하려면, 한국기독교연구소(031-929-5731)로 연락 주세요.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6/20 [14:37]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