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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후보의 '주경복 비판'을 비판한다
[홍헌호의 진단] 이인규 캠프의 낭만주의, 지나치게 모험주의적 교육관
 
홍헌호   기사입력  2008/08/07 [13:16]
나는 주경복 후보 캠프나 이인규 후보 캠프와 어떤 접촉도 한 적이 없다. 말 그대로 ‘제3자’이다. 그러나 <프레시안>에 기고한 이범 이사(前 이인규후보선본 정책위원장)의 두 개의 글( 7월 3일 기고한 “주경복 교육감 후보는 촛불을 하이재킹하는가”와 8월 6일 기고한 “주경복 후보는 왜 패배했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몇 자 적는다.
 
이범 이사는 “주경복 교육감 후보는 촛불을 하이재킹하는가”라는 글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리를 폈다. 이범 이사가 쓴 글의 취지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좀 길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잘 모르는 분들은 대입이 수능성적 기준으로 결정되고, 그로 인한 '한줄 서열화'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나타날 고교 서열화를 걱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미 그러한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대입을 보면 유명대학들이 수능으로 한줄세우기 시켜서 선발하는 정시 정원이 44%입니다. 내신성적과 논술이 주요하게 반영되는 수시 정원이 56%지요. 서울 지역 대학으로 국한시켜 보면 수시 정원이 60% 이상입니다. 앞으로 수시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이제 '한줄 서열화'가 '여러줄 서열화'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이범 이사의 말대로 수시 비중이 높아지면 '한 줄 서열화'가 '여러 줄 서열화'로 변화하는 것일까. 그리고 수시 비중이 높아지면 학생들의 입시부담과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은 줄어드는 것일까. 그의 이런 주장은 최근의 사교육비 관련 통계들에 부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최근 경기침체 속에서도 사교육비 부담은 여전히 높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을 테스트해서 정말로 대학이 뽑고 싶은 학생들을 뽑겠다는 것은 대학의 목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핀란드 교육 목표는 ‘학교 간의 다양성 존중’이 아니라 ‘학교 안의 다양성 존중’
 
이범 이사도 자주 거론하는 핀란드 사례를 보더라도 핀란드 등 북유럽 교육의 목표는 ‘각기 다양한 부문에서 성장의 속도가 다른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서 교육하는 것(통합교육)’이지 대학들과 기업들의 입맛에 맞는 소수 엘리트를 효율적으로 선발하고자 하는 것(대한민국식 교육)이 아니다.
 
"소수 엘리트만을 분리하여 가르치려는 발상은 잘못이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학생이 함께 모여 배울 때, 진정한 교육이 가능하다. 학교 안에 다양성이 깃들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통하는 원칙이다"(프레시안 2007년 10월 22일, 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과의 인터뷰 기사)
 
물론 이범 이사와 이인규 후보는 ‘다양성’이라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고 선거운동에 임해 왔다. 그러나 피터 존슨 회장이 말하는 ‘학교 안의 다양성 존중’과 이인규 후보가 말하는 ‘학교 간의 다양성 존중’은 그 의미가 180도 다른 것이다.
 
교육개발원의 보고서들을 보더라도 최근 주요 선진국들은 우리나라처럼 ‘학교 간의 다양성 존중’이라는 명분 아래 분리교육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안의 다양성 존중’을 목표로 ‘통합교육’을 추구한다. 과거에 분리되어 있었던 인문계와 실업계도 통합하는 추세이고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분리교육이 아닌 통합교육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범 이사는 또 위의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게다가 최근 대학들은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다고 난리입니다. 서울대는 자기들이 직접 개발하면 이해집단들에 의해 왜곡될까봐, 아예 미국 코넬대에 입학사정관제 개발을 의뢰했습니다. 입학사정관제의 특징은 잘 아시겠지만 '성적순 선발'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성적서열' 자체가 상대화되는 것이죠.”
 
이 또한 이범 이사의 이상이라는 ‘핀란드 교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핀란드 교육의 목표는 ‘소수 엘리트 선발을 전제로 한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옛날 이야기로 비유하자면 핀란드의 교육목표는  시각장애인과 수족장애인이 서로 도와가며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나라 대학의 목표는 여러 명의 시각장애인과 수족장애인들 중에서 가장 장애가 적은 학생들만 고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비유를 비장애인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핀란드 교육목표는 다양한 부문에서 성장의 속도가 다른 학생들이 서로를 폄훼하거나 질시하지 않고 도와가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풍토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대학의 목표는 다양한 부문에서 성장의 속도가 다른 학생들 중에서 가장 기업들의 입맛에 들어 대학의 주가를 올려 줄 학생들만을 뽑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 대학의 선발기준이 다양화된다 하여 그것이 핀란드의 교육 이상에 근접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핀란드, 싱가포르식 대학개혁으로 대학평준화 유도해야
 
그렇다면 나의 대안은 무엇인가. 누구나 일정하듯이 입시과열이나 사교육비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학부모나 학생들 목표가 교육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부모나 학생들의 목표는 교육학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의 습득과 감성의 풍부화’ 이런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높은 지위와 많은 보수와 명예가 보장되는 좋은 일자리’이다.
 
선진국에서 입시과열이나 사교육비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은 세칭 좋은 일자리와 좋지 못한 일자리 간의 사회적 보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보진영이 이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가. 없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대학평준화’라는 대안이다. 진보진영은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질 경우 초중고 입시과열과 사교육비 문제가 크게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73년 중학교 평준화가 초등학교 입시과열과 사교육비 문제를 크게 해소했듯이 말이다.
 
문제는 대학평준화를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이냐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가 기업지원정책을 추진하면서 대기업에 대한 지원은 자제하고 중소기업 지원에 집중하듯이 대학정책도 그런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 경제부처의 정책보다 교육관련부처의 정책이 더 불균형지향적이라면 이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OECD에 의하여 모범적인 대학교육개혁의 사례로 인정받고 있는 핀란드식과 싱가포르식 대학개혁을 벤치마킹하여 대학을 연구중심대학과 직업중심대학으로 나누고 후자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과 지원으로 대학의 품질과 취업률, 그리고 학생들의 선호도를 높여 전체 대학의 평준화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러면 진보진영은 직업중심대학의 선호도를 어떤 방식으로 높일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싱가포르나 핀란드 등의 직업중심대학들의 성공사례들(입학생 급증, 취업률 급증, 기업들 선호도 급증)이 다양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교육의 정도(正道)를 기피하는 여론에 일희일비할 일 아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했다. 따라서 진보진영이 다분히 이기적인 욕구에 의하여 교육의 정도(正道)를 기피하는 학부모들의 여론에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번 선거에서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욕구를 자제하고 교육의 정도(正道)에 표를 던진 수 많은 양심들에게 감사의 마음를 보낸다.
 
주경복 후보와 이인규 후보의 차이도 이런 교육의 정도를 어떻게 험난한 현실 속에서 실현해 내느냐 하는 방법론상의 차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 후보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제, 즉 대학들과 대기업들의 다양한 선발기준이 다양한 고교교육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낭만적인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걱정은 남는다.
 
이런 전제가 어느 정도 현실적인 것인지는 이범 이사가 재반론이나 답글에서 해 줄 수 있으리라 믿고 나는 교육전문가 이범 이사에게 몇 가지 궁금증에 대한 질문을 추가로 던지며 글을 맺는다.
 
첫째, 최근 몇 년간 OECD의 중등학생 학업성취도 평가에 의하면 핀란드는 40여 개국 중에서 1~2위, 한국은 3~5위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핀란드에는 초중고생 사교육도 없고 과외도 없다는데 어떤 연유로 이런 성취가 가능했을까. 과연 이인규 후보식의 학교간 다양성 때문인가. 아니면 학교안 다양성 때문인가.
 
둘째, 최근 몇 년간 OECD의 중등학생 학업성취도 평가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40여 개국 중에서 3~5위 수준, 2008년 IMD에 의하면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한 우리나라 대학의  기여도는 55개 국 중에서 53위, 지금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대학의 전면적인 개혁인가. 아니면 초중고생 교육을 수월성교육으로 재편하는 것일까.
 
셋째, 우리나라 평준화 지역의 고교와 비평준화 지역의 고교의 성적 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것이 거의 모든 연구보고서들의 공통적인 결론이라고 알고 있다.(이 문제와 관련한 거의 모든 연구보고서들은 학생들의 성적이 부모의 소득격차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 부모의 소득 격차 변수를 통제할 경우 양 지역 고교의 성적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이 비평준화상태인 우리나라의 대학생 실력이 평준화상태인 유럽 각국의 대학생 실력에 비해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고교든 대학이든 평준화상태의 학생들과 비평준화상태의 학생들 실력이 유사한데 학생들을 혹사시키고 학부모에게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수월성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서열화된 교육을 지향할 필요가 있을까.

* 필자는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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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8/07 [13: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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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쉬움 2008/08/08 [16:17] 수정 | 삭제
  • 대자보가 한국사회 교육모순 부분을 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인터넷상 진정한 진보정론의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다.

    우선 홍현호씨 글에서 동의할 지점은 궁극적으로 대학의 서열구조를 청산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라는 점이다. 계급모순까지 다가갈 정도의 교육문제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의 서열체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대안의 하나로 '대학평준화'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위의 글을 읽으면서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이범씨의 입장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그것은 너무도 잘 직시하고 있는 그러한 대학의 서열체제나 짓누르는 경쟁이데올로기가 도대체 누구, 어떤 계급(층)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주도되고 의도되며 작동되고 있는지 그 적대적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아니 배제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굉장히 지적으로 차분하며 학술적이고 이론적이어 교육전문가로 자리매김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동의자나 지지자를 유인할 만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을 바꾸기엔 큰 힘이 되지 못한다. 필란드와 프랑스와 유럽은 갑자기 생긴 나라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모델로 존재해 왔다. 우리나라에도 진보적 교육개혁가 이론가 운동가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수많은 논문과 책들이 나와 있다. 뭐가 바뀌고 있나?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대 지배계급)에 대해 본질적 전면전도 아니고 도덕적 비판이 배제된 그저 현상과 문제에 비판적 접근 수준에서의 교육제도 개선논리나 제도이론에 매몰되어 있기에 그렇다.

    솔직히 말해 보라. 예컨데, 평준화와 비평준화 간의 장단점 비교나 적합성 논쟁 또는 연구결과 데이터 비교 싸움으로 이 문제의 승리가 결정날 정도로 그만큼 사안이 명쾌하고 단순한가? 물론 그렇다고 연구를 게을리 하거나 이론과 논리로 설득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 아니고 적대 이데올로그들과 싸워야 할 학술분야라면 그렇게 집요해야 마땅하다.

    거기에 대응하는 적대관계들도 결코 놀지 않는다. 현상황 현체제를 유지하거나 강화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도 뛰어난 학벌을 가진 탁월한 이론가요 대단한 교육전문가 집단이다. 게다가 그들은 계급(계층)적 이해에 철저하기에 대응논리 개발에 결코 게으르지 않는다. 그저 힘든 국민들로서야 누구 말이 맞는지 명쾌하게 답가질 수 없기에 현실을 따를 뿐이다. 이해관계는 단순히 논리에 따라 입장이 정리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논리가 자신들보다 뛰어나고 이론이 맞는다고 세상의 이해를 내 놓지 않는다. 어떤 지배계급 지배계층이 점잖게 다가가는 지적인 이론에 자신들의 이익을 내놓는단 말인가.

    한국에서 교육문제는 이미 계급문제다. 정치적 해결이 불가피하다. 서울대 지배계급과 계급적대를 선언하고 그들의 본질을 도덕과 계급 이해의 입장에서 정면으로 건드리며 폭로하지 않는 이상 그들을 숭배하며 따르는 세속의 세력은 줄어들기 어렵고 따라서 세상 바뀌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렇고 그렇게 굴러가는 세상에 진보를 대변하는 운동 명망가 자리 하나 차지하거나 학술회의 구색맞추기 위해 진보토론자 자리 지켜주는 역할로서의 교육전문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