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축복과 저주 촛불시위를 보면서 서울의 축복과 저주에 대해 생각해본다. 서울의 저주는 무수히 많다. 지방의 입장에선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서울의 저주를 웅변해준다. 축복은? 잘 떠오르질 않는다. 촛불시위를 긍정 평가한다면, 이게 축복이 될 수 있을 게다. 엄청난 규모의 인구 밀집도가 뿜어내는 가공할 힘으로 오만한 권력을 응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10대가 주도한 촛불시위를 디지털 기술과 연계시켜 논하고 있다. 연세대 교수 김호기는 "나는 새로운 정치 사회적 흐름의 선두에 서 있는 이 10대들을 '2.0세대'라 이름 짓고 싶다. '웹2.0'이 누구나 데이터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사용자 참여' 중심의 인터넷 환경을 말한다면, 지금 등장하는 '2.0세대'는 인터넷 공간에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자아의식과 사회의식을 스스로 형성해가는 10대들을 지칭한다"고 했다.1)
이에 대해 상지대 교수 정대화는 "지금의 10대가 우리 세대와 구별되는 쌍방향 소통 세대라는 지적에는 별 이견이 없지만 지나치게 강조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과거 세대와 지금 세대가 다른 점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통해서 쌍방향 소통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전자기술적 도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일 터인데 그 도구가 없다고 하여 쌍방향 소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라고 했다.2)
무슨 '쌍방향 소통'이냐가 중요한 것 같다. 주로 분노를 먹고사는 시위의 경우엔 굳이 쌍방향 소통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흐름'이라고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휴대전화와 인터넷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3·1운동, 6·10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을 보더라도 분노의 전파 속도는 매우 빨랐고 그 과정에서 증폭되는 '눈덩이 효과'도 매우 컸다.
4·19를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시위들은 지방에서 먼저 일어났지만, 시위의 힘을 최종적으로 드러나게 만든 건 늘 서울이었다. 높은 밀집도를 자랑하는 가공할 인구 파워와 서울의 미디어 독식 구조 때문이다. 우리는 촛불집회를 24시간 온라인 생중계하는 기술발전엔 놀라면서도 그걸 보자마자 집에서 뛰쳐나가 수십 분 내로 시위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밀집도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0여 년 전 서울대 교수 김형국은 서울의 '한국 민주화 선봉장론'을 제기한 바 있다. 그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는 커뮤니케이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인 까닭에 시위의 동기를 시민들에게 일시에 알릴 수 있고 또한 시위를 순식간에 조직할 수 있는 입지적 이점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제시대 때 백성들의 항일 시위가 장터나 도시에서 발생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와 그 정치적 시위의 입지적 이점이 서울에서 가장 큰 것은 당연했다. 서울이 고밀도의 초대형 도시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 민주화의 성취 면에서는 서울의 공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3) 여기에 휴대전화와 인터넷까지 가세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렇지만 여기서 또 중요한 건 서울시장이 서울 한복판에 잘 만들어 놓은 쾌적한 환경의 광장이다. 지방도시에서의 시위 활성화는 쾌적한 시위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뿐인가. 미디어의 보도도 매우 중요하다. 이게 있어야 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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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측 추산 70만 명이 모였던 '6.10 대규모 촛불대행진'의 모습. ©CBS노컷뉴스 |
즉, '시위의 축제화'를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아날로그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디지털 쌍방향 소통이 잘 이루어져도 자발적 참여자를 불러 모으긴 어렵다는 것이다. 전주의 어느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누군가가 "나도 저런 곳에서 시위 한번 해보고 싶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 해본 생각이다.4)
박정희·이명박의 '스펙터클 정치' 서울의 축복이라고 하는 '공간의 정치학'은 '시각의 정치학'을 수반한다. 서울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펙터클(spectacle: 구경거리, 보기 드문 일대 장관) 집산지다. 모든 미디어까지 서울에 몰려 있으니, 서울은 '스펙터클의, 스펙터클에 의한, 스펙터클을 위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촛불시위는 이 관점에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스펙터클의 정치학'에 대해 많은 말을 했는데, 대부분 스펙터클의 보수적 이데올로기 효과에 주목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대중이 스펙터클에 현혹돼 현실 순응 정서를 갖게 된다는 식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쟈크 앨뤼(Jacques Ellul)는 대중은 스펙터클에만 빠져들고 보다 의미심장한 문제는 외면함으로써 정치적 사건들의 수준과 차원을 분리해 평가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에 처하게 된다고 했다.5) 스펙터클의 지배가 너무 강해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다른 중요한 것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의 스펙터클 중독은 자유민주사회의 쾌적한 호텔 안에서 불길한 초침 소리를 내는 테러리스트의 시한폭탄과 같다고 경고했다.6)
미국의 정치학자 머레이 에델만(Murray Edelman)은 1988년에 쓴 『정치적 스펙터클 만들기(Constructing the Political Spectacle)』라는 책에서 매스 미디어가 상례적으로 '정치적 스펙터클'을 만들어냄으로써 사회적 문제, 위기, 적,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구성하고 재구성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또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는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7)
한국의 최고 '스펙터클 지도자'는 단연 박정희다. 인권유린은 주로 지하실에서 저질러졌기에 대중의 시선에서 차단되었지만, 그가 진두지휘해서 만든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은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터클로 많은 한국인들을 감동시키거나 그들로 하여금 인권유린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스펙터클 정치'에 관한 한, 이명박은 박정희의 제자임을 자처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있다. 그분은 경부고속도로나 거대 공업단지처럼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남겼다. 사람은 눈으로 보면 가장 확실하게 설득당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성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나의 전략"이라고 말했다.8)
실제로 이명박은 청계천이라는 스펙터클로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스펙터클을 연출하기 위해 대운하를 꿈꿨다. 이게 참으로 묘한 아이러니요 패러독스다. 스펙터클로 큰 그가 촛불이라는 스펙터클의 일격을 받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명박은 촛불시위 초기에 자신이 만든 청계천 광장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 착잡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6월 10일 최대 촛불시위 때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며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제가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이라는 노랫소리도 들려왔다"고 했다. 또 그는 "캄캄한 산 중턱에 홀로 앉아 국민을 편안히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다. 늦은 밤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수없이 제 자신을 돌이켜봤다"고도 했다.9)
촛불시위의 스펙터클 효과 시각주의자가 시각주의 스펙터클에 당한 셈이라고나 할까? 평소 스펙터클에 민감한 그였기에 더욱 촛불 스펙터클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물론 완전 굴복은 못하겠다고 끝끝내 버티긴 했지만 말이다. 촛불시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명박의 설명이 정답이다. '끝없이 이어진 촛불'은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질리게 만들게 돼 있다.
『경향신문』 정치 국제에디터 이대근은 바로 그 촛불의 힘을 간파하고 있다. 그는 "이명박은 촛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100만, 아니 1000만 개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는데도 그는 자기가 바뀌는 것보다 촛불을 끄는 게 더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면 방법이 없다. 1970∼1980년대식 스펙터클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그를 위해 10일의 광장에 100만 개의 촛불을 준비하자. 그리고 광장을 떠나지 말자. 1980년 서울역 회군이 전두환을 불러오고, 6 29선언에 1987년 6월의 광장을 떠남으로써 민주화를 왜곡시킨 적이 있다. 청계광장이나 시청광장이 아니어도 좋다. 인터넷 공동체라도 좋고, 직장의 작은 모임, 동호회도 좋다. 가정이라도 상관없다. 소비하는 주체로서 올바른 소비를 실천하는 일도 좋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국가와 자본권력을 눈 부릅뜨고 감시하고 토론하는 곳이라면 그 어딘들 광장이 아니겠는가. 촛불을 꺼서는 안 된다."10) 그러나 한 가지 이견은 있다. 이대근은 "청계광장이나 시청광장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청계광장이나 시청광장을 떠나는 순간 촛불은 죽게 돼 있다. 그건 더 이상 스펙터클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 자크 루소는 "넓은 공간은 상호 간에 개방된 시선을 가능하게 해서 인민 자신들이 스펙터클이 되고 참가자들이 서로 하나 되는 축제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11)
촛불시위는 일종의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y) 현상이기도 하다. 내가 너를 보고 감동 먹고 네가 나를 보고 감동 먹는다. 호기심에서 구경하러 나간 사람이 감동 먹고 구경꾼들끼리 서로 마주 보고 감동 먹는다. 이는 촛불시위의 숭고한 뜻을 폄하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루소의 말을 조금만 더 확대해석 해보시라. 시너지효과의 무한 팽창 현상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현장 묘사 중심의 촛불시위 예찬론을 잘 뜯어보시라. 대부분 '바다'로 상징되는 스펙터클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몇 가지 소개하겠다.
"도도한 촛불의 물결이 모든 걸 삼키고 있다. 인왕산 그늘에 잠긴 청와대는 촛불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위태롭다."12) "지금 대한민국은 촛불이 강을 이루어 출렁이고 있다. 아니, 대한민국을 넘어 바다 저편 낯선 대륙에까지 번지고 있다. 도대체 이 거대한 출렁거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출렁이며 흘러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13) "촛불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는 보았다. 세종로 네거리를 가로막은 컨테이너의 정면에다 '경축 명박산성'이라는 현수막을 내거는 '집단지성'의 창의력과 실천력을. 그것은 시,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강력한 시였다."14) "한국 사회는 지난 40일 동안 광장을 가득 메운 거대한 촛불의 바다 앞에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시간 동안 촛불은 민심을 반영하는 분노의 횃불이었고, 해학과 놀이가 어우러진 축제를 밝히는 등불이기도 했으며, 치열한 거리 토론장의 조명등이기도 했다."15) 촛불시위는 '카타르시스 축제'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상호 간 개방된 시선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유로 넓은 공간이면 다 스펙터클이 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다. 서울 시내라 하더라도 다운타운을 벗어난 넓은 곳에서 촛불시위를 해보라. 효과가 반감될 것이다. 촛불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왜 그런가? 촛불시위는 '공포'에서 출발해 '일상의 억눌림'16)이라는 코드로 전환했으며, 그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카타르시스 축제이기 때문이다.
공포는 '죽음'과 '피' 이미지로 표현되곤 했다. "10년 후, 국민이 죽어가기 시작했다--공포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하이 쇼크 호러"라는 포스터, "저 아직 15년밖에 못 살았어요"라는 피켓, "대통령님 살려주세요, 저는 어린 나이에 죽기 싫어요"라는 댓글, "아무도 죽어가는 그들을 알지 못합니다"는 피켓, "대한민국 국민은 광우병 마루타(생체실험 대상)"라는 구호, "죽음의 도박, 이제 멈추십시오"라는 성명서, 이명박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쇠고기를 먹고 있는 합성사진, "이명박 대통령, 국민의 피를 원하십니까"라는 제목의 기사 등등.
그러나 '죽음'과 '피'는 곧 '일상의 억눌림'과 표리(表裏) 관계를 형성하면서 전자가 후자의 표현과 발산을 스펙터클하게 만드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촛불시위 선도자였던 10대들의 경우엔 '0교시'라는 한마디로 모든 게 압축이 되었다.
"0교시가 싫은데 억지로 시키니까 공부도 안 되고, 아침밥을 먹을 권리를 왜 빼앗아 가는지 모르겠다."(중학생 강아연 15세, 『한겨레』, 5월 3일)
"0교시 허용, 촌지 합법화 등 우리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정책들을 이명박 대통령이 내놨다. 점점 학교가 학원이랑 똑같게 된다."(고교 2년 김강균, 『한겨레』, 5월 5일)
"현 정권은 학생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학생들이 건강하게 지내길 바란다면서 0교시까지 부활해 몸과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10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다음 카페 '2MB 탄핵투쟁연대'에서 활동하며 집회를 이끈 아이디 '안단테' 고2 학생, 『한국일보』, 5월 6일)
"10대들이 대거 광장으로 쏟아진 것은 쇠고기에 앞서 '0교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이번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2.0세대는 불편한 것은 참지 않는다."(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 단체에서 활동해온 전누리 21세, 『한겨레』, 5월 14일) 10대의 뒤를 따라 다른 세대가 촛불시위에 대거 참여하면서 '0교시'의 억눌림은 '1+5'로까지 확대되었다. 광우병만이 아니라 공기업 민영화 교육개혁 공영방송 수도 민영화 대운하 반대로 이슈를 옮겨가며 집회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억눌림'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스펙터클은 한강 공원 같은 곳에선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곳은 평소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인데, 무슨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단 말인가. 집회 장소는 서울 한복판이어야 하고, 반드시 행진이 뒤따라야만 한다. 자동차의 홍수로 물결치던 아스팔트 대로를 걷는 재미와 보람, 이건 결코 가볍게 볼 게 아니다. 과거 통금 해제가 준 감격이 '시간의 정치학'이었다면, 그건 자신의 참여에 짜릿한 전율을 줄 수 있는 '공간의 정치학'이다.
촛불시위 관련 기사를 잘 읽어보시라. 지방에서 원정을 간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내가 보기엔 그 통계를 낼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 수가 많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도 별도의 촛불시위가 열리는데 왜 서울까지 올라가는가? 스펙터클 효과건 카타르시스 효과건 서울과 지방은 감히 비교가 안 된다.
7월 3일이었던가? 그날 오전 우연히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가수 방미의 뉴욕 생활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뉴욕증권거래소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에서 '세계경제의 심장부'를 늘 보면서 살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짓는 표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게 지방에서 서울로 촛불시위 원정을 가는 사람들의 심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왜 촛불시위대는 청와대행을 원하는가? 왜 촛불시위대는 자꾸 청와대행을 원하는가?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일영은 "촛불시위는 포스트모던적이면서도 한국의 시위가 지닌 '전통'적인 모습을 여전히 탈각하지 못하고 있다. 질문을 던져보자. 왜 시위대는 국회나 정당이 아니라 청와대로만 가려고 할까. 의회 및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라면 청와대보다 여의도로 달려가는 게 순서가 아닐까. 정당과 의회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최고 책임자(권력자)와 직접 상대해서 해결하려 드는 한국인 특유의 정치행태에서 답을 발견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지 않을까"라고 했다.17)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청와대행은 누굴 직접 상대해서 해결해보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스펙터클·카타르시스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우리라. 이미 금기와 성역이 사라진 상황에서 청와대는 유일하게 남은 금기와 성역이라고 하는 점이 그런 본능을 일깨우는 것일 뿐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던적'이라고 가리키는 촛불시위의 축제적·디지털적 특성도 일리 있는 진단이겠지만 과거에도 있었던 '스펙터클의 향유'라고 하는 점에서도 볼 수 있다.
1926년 순종 인산(因山: 임금과 왕비 등의 장례식) 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젊은 여성들 사이엔 상복의 멋내기 유행이 파고들었다. 남자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아, 그해 봄 경성에는 때 이르게 백구두가 유행했다.18) 우리 인간은 아무리 근엄한 순간에도 타고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봉준호의 '영상 고현학'을 기대한다 신문을 읽다가 영화감독 봉준호가 스태프들과 함께 촛불시위를 보러 나왔다는 기사에 눈이 갔다. 그는 "시민들이 모인 장관을 사진으로 담아야 할 것 같아 나왔다"고 말했다나.19) 역시 봉준호다! 순간 내 머리에 퍼뜩 떠오른 건 그가 『조선중앙일보』(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연재했던 박태원(1909∼1986)의 외손자라는 사실이었다.20)
이 소설은 서울의 풍속 변화를 그린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현학은 고고학(考古學)과 대치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태원이 자주 들먹인 탓에 유명해진 '고현학'은 일본 학자 곤 와지로에 의해 일반화된 것으로, "우리들이 눈앞에서 보는 것" 즉 "인류의 현재"에 대한 기록을 뜻한다.21)
당시의 서울은 고현학의 좋은 무대였다. 1934년 서울 인구는 38만 명으로 늘었으며, 현대식 건물과 백화점, 극장, 다방 등도 급증했다.22) 박태원은 서울 중심가를 누비며 하루에 일어난 일의 연속적 기록물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탄생시킨 것이다.23)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상 고현학'이다. 특히 촛불시위와 같은 스펙터클을 잘 챙겨둬야 한다. 그 일을 봉준호가 맡아 나섰으니 이 어찌 반갑지 아니하랴. 봉준호가 외할아버지의 훌륭한 업적을 이어받아 영상 고현학의 선구자이자 대가가 되길 기대해본다.
비정규직을 위한 촛불은 안 되겠는가? 이제 이야기를 끝내도록 하자. 후마니타스 대표 박상훈은 "이번 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은 그간 사회운동의 다양한 시도와 발전에 대해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 촛불시위에 나올 시간도 없었다. 비정규직의 실제 참여는 많지 않았다"고 했다.24)
날카로운 진단이요 분석이다. '중산층적 한계'와 더불어 개혁·진보세력의 쇠퇴 또는 몰락을 가져온 대선·총선 결과에서 비롯된 무력감·불안감·죄책감도 촛불시위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와 예찬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일종의 '자기이행적 예언'을 시도했다고나 할까?
사실 가장 피눈물 나는 사람은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그 고통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공포'와 '억눌림'이 없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의 상당수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비정규직을 위한 촛불이 스펙터클로 전환될 수 없다는 데에 '스펙터클 정치'의 한계와 비극이 있는 건 아닐까?
이 글은 주류적 분석에서 벗어나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시위를 '공간의 정치학'과 '시각의 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했다. 그런데 서울에 가서 현장을 직접 보지도 않은 지방 사람이 이런 글을 써도 되는 것인가? 그게 바로 '거리두기'의 묘미다.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가 보게 되면 분위기에 압도돼 오히려 최소한의 거리감마저 놓칠 수 있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가기 전까진 물의 영향을 모르는 법이다. 그러나 현장 보고가 있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글을 너무 흉보지는 말아 주십사 하는 뜻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각주] 1) 김호기, 「쌍방향 소통 ‘2.0 세대’」, 『한겨레』, 2008년 5월 15일.
2) 정대화, 「한겨레를 읽고: ‘386 부모의 영향’은 심각한 오보가 될 수도」, 『한겨레』, 2008년 5월 16일.
3) 김형국, 「나의 서울살이 30년」, 『사상』, 1995년 겨울, 91~92쪽.
4) 강준만, 「서울의 축복과 저주」, 『한국일보』, 2008년 6월 11일.
5) Darrell J. Fasching, The Thought of Jacques Ellul: A Systematic Exposition, New York: Edwin Mellen Press, 1981, p.28.
6) Jacques Ellul, The Humiliation of the Word, trans. Joyce Main Hank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85, p.vii.
7) Murray Edelman, Constructing the Political Spectacl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1.
8) 김성동,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성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나의 전략”: 청계천 복원의 주인공 이명박 서울시장의 24시」, 『월간조선』, 2005년 11월, 129~130쪽.
9) 「사설: 대통령의 두 번째 대국민 사과를 보며」, 『조선일보』, 2008년 6월 20일.
10) 이대근, 「100만개 촛불, 거리의 의회」, 『경향신문』, 2008년 6월 5일.
11) 고명섭, 「프랑스 대혁명은 ‘10년간의 축제’였다」, 『한겨레』, 2008년 6월 21일.
12) 윤평중, 「촛불은 우리를 비춘다」, 『동아일보』, 2008년 6월 11일.
13) 김영현, 「출렁이는 촛불이여, 우리를 씻어다오」, 『한겨레』, 2008년 6월 13일.
14) 이문재, 「촛불은 시, 강력한 시였다」, 『경향신문』, 2008년 6월 14일.
15) 길윤형, 「촛불, 어디로 가나: 홍성태 교수-우석훈 위원 ‘현장 거리 좌담’」, 『한겨레』, 2008년 6월 16일.
16) 박노자, 「일상의 코드, 억눌림」, 『한겨레』, 2008년 6월 19일.
17) 김일영, 「‘촛불’의 희망과 불안」, 『조선일보』, 2008년 6월 12일.
18) 천정환, 「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10: 유행과 신드롬, 광기의 사회학」, 『신동아』, 2004년 11월, 520~529쪽.
19) 길윤형 외, 「“재협상 할 때까지”… 도심 ‘촛불의 바다’로」, 『한겨레』, 2008년 6월 11일.
20) 박태원, 천정환 책임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2005.
21) 김상태, 『박태원: 기교와 이데올로기』, 건국대학교출판부, 1996, 54쪽; 권보드래, 「새로운 맹목을 찾아서」, 장석만 외,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 돌베개, 2006, 43쪽.
22) 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문학동네, 2000, 264쪽.
23) 김주리,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 근대적 패션의 풍경』, 살림, 2005, 86~87쪽.
24) 손제민·이지선·임지선, 「“시위 지나치게 신화화” “참여의 즐거움 보여줘”: 박상훈-하승우 박사의 ‘촛불집회’ 논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