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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반대" 허세욱 열사의 발자취
1주년 맞은 15일, 진보진영 추모제 및 문화제 개최…기념관 개장
 
김철관   기사입력  2008/04/16 [11:16]
지난해 4월 '한미FTA반대'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던 고 허세욱 열사. 1년이 지난 14일 저녁, 허세욱 열사를 추모하고 한미FTA 비준 동의안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서울 광화문 일대에 울려퍼졌다.
 
'허세욱정신계승사업회'는 이날 저녁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앞에서 허세욱 열사 1주기 추모 투쟁문화제를 열고, "허세욱 열사의 투쟁 정신을 이어받아 한미FTA비준과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를 민중들의 힘으로 막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세욱정신계승사업회는 15일 저녁 투쟁문화제를 열고, 한미FTA비준 동의안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철관

앞서 사업회 측은 이날 정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대표단, 한국진보연대 등 진보진영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허세욱 열사 1주기 추모제를 가졌다.
 
이밖에 사업회는 오후 6시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민주택시본부 한독운수분회 사업장 내에 마련된 허세욱 기념관을 공개했다. 현재 사업회 측에 따르면, 16일 오전 현재 까지도 허세욱 열사의 묘에는 많은 노동자들의 추모 행렬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세욱 씨의 사망 1주년을 맞아, 진보진영의 시민단체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은 15일 정오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 민주노동당
 
허 열사는 한미FTA 타결을 앞둔 지난 2007년 4월 1일 오후 3시 55분경 하얏트호텔 협상장에서 불과 50m 떨어진 지점에서 분신했다. 불길 속에 휩싸인 허 열사는 “한미FTA 폐기”,“노무현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쳐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허세욱 열사의 장례는 같은 해 4월 18일 ‘민족민주노동열사장’으로 치러졌다.
 
한편, 허세욱 민주노동열사는 1953년 5월 9일 경기도 안성에서 아홉 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중학교 시절 서울로 상경해 막걸리, 꽃, 박카스 등 배달업에 종사했다. 91년 경기도 부천 한독운수에 입사해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40세인 94년 봉천동 철거투쟁을 시작으로 사회운동에 입문했고, 서울 관악구 봉천6동 철거민으로 지냈던 시절, 강제철거에 맞서 세입자 대책을 행정당국에 요구하는 빈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철거민 생존권 운동을 시작했다.
 
생전 허 열사는 95년 봉천 6동 철거민 시절 부끄러운 기억들을 스스로 지인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 때였다. 빈민운동을 하던 강인남이라는 여자 간사가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냥 구경만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걸 깨달았고, 당시 빈민운동을 전개한 관악주민연대에 가입해 활동했다. 98년 참여연대와 200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사회운동을 관심을 갖게 된다.
 
▲고 허세욱 씨가 생전에 작성한 메모.     © 민주노동당

지난 2002년 다니던 직장 한독택시노조를 민주노총에 가입하기 위해 앞장서고, 민주택시연맹 한독분회 대의원 겸 통일부장 역임을 하기도 했다. 2002년 6월 13일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후, 살인미군 처벌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전면개정 투쟁에 참가했다. 그는 살인 미군들의 무죄선고에 항의 범국민촛불행사에 매일 참여했다. 당시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중에 미군이 세운 추모비 대신 내 퇴직금으로 꼭 두 여중생 추모비를 세우고 싶다”고 말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군 장갑차에 압살당한 두 여중생 사건이후 반미, 민족문제에 눈을 뜬 허 열사는 2004년 평화통일을 사랑하는 모임에 가입하고 용산기지 이전비용 한국부담 반대,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등 반미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허 열사는 용산기지 이전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에 외교통상부, 국방부 앞 농성장을 찾아 용산기지 이전 협상의 문제점을 담은 유인물을 가져가 뿌리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용산기지 이전비용 한국부담과 평택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해 활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했다. 열사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근무 중에 차를 세워두고 서울 평통사 노동 분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 5월 4일에는 평통사 회원들과 평택 황새울 벌판 철조망 설치 반대 투쟁을 전개하다 연행돼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열사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반대, 방위비분담금 삭감 및 폐기를 위한 기자회견, 농성, 1인 시위 등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날 사업회 측은 허세욱 열사 기념관을 개장했다.     © 민주노동당

허 열사는 고된 노동과 박봉에도, 잠을 쪼개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신문을 보면서 빨간 사인펜으로 줄을 쳐가며 공부한 열사의 흔적과 꼼꼼하게 모아든 FTA 관련 자료들은 열사의 학습과정을 보여준다. 운전을 하다 화장실 갈 일이 있으면 참았다가, 미 대사관 옆 열린 시민공원에 있는 화장실을 들러, 한미FTA 폐기를 위해 농성중인 대표단들을 찾아 위로하기도 했다. 한미 FTA 타결이 임박한 2007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는 직접 제작한 1인 시위 피켓을 갖고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2007년 4월 1일 오후 3시 55분, 최종 협상 시한을 넘기면서 진행되고 있는 한 한미FTA 타결을 저지하기 위해, 하얏트호텔 행사장에 주변에서 분신을 했다. 4월 15일 오전 11시 26분 많은 민중들의 절절한 쾌유 염원에도 불구하고 한강성심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4월 18일 오후 서울 시청 앞에서 ‘민족민주노동열사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마석 모란공원 열사 묘역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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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4/16 [11: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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