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다. 예수를 단지 신격화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소 예수를 사는 것이다. 대속적(代贖的) 그리스도론에 기초하여 예수의 초월적 신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풍토에서는 “우리가 몸소 예수를 산다”는 게 몹시 건방지고 심지어 신성모독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진면목 곧 역사적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펼친 하나님나라운동의 역사적 발자취를 그런 대로 잘 드러내는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믿음과 예수를 따름, 예수의 삶을 예배함과 예수를 삶, 이 둘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8).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 이렇듯 예수를 믿음과 예수를 본받고 따름, 이 둘의 일치를 강조하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예수는 신앙의 대상일 뿐이지 우리가 따라 닮아야 할 삶의 모범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교활한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기만? 그렇다. 예수를 믿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지만 우리가 몸소 예수의 삶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까지를 마치 정통 기독교 신앙의 영역인 양 눈 가리고 야옹하는 격이 아닌가. 이 땅의 신자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은 참 뜨거운 편인데 그 믿음이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뭘까? 잘못되고 편협한 신학과 교리가 무엇보다 문제다. 예수에 관한 신학과 교리는 민중해방을 매개로 한 인간해방에 헌신했던 “역사적 예수”의 해방실천에 기초해야 한다. 즉 해방실천이 먼저이고 신학과 교리는 거기에 뒤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서가 거꾸로 뒤집혀 먼저 일정한 신학과 교리 체계를 설정하고 이 좁은 틀 안에서만 예수를 이해하려 드니까, 예수의 일면은 파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나라운동의 참모습이 제대로 포착될 리 없다. 비슷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한국교회의 성경읽기도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약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를 주목해야 한다. 주로 민중전승에 기초한 복음서야말로 신학과 교리의 냄새를 비교적 덜 풍기면서 기원 후 1세기 로마제국의 식민지배 아래 있던 유대 나라의 갈릴리라는 일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펼쳐졌던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보물 창고다. 그런데 이상스러울 만큼 한국교회는 복음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학과 교리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신약의 다른 책들 특히 바울서신을 선호한다. 내 오랜 교회생활에 비춰 보더라도 복음서의 빼어난 예수운동 ‘이야기’의 소중한 가치를 깊이 인식하는 목회자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잘못된 인간이해 또한 믿음과 삶의 불일치를 조장하는 한 원인이다. 믿음은 결국은 ‘인간의’ 믿음이기에 인간 이해에 따라 믿음 또한 달라진다. 잘못된 인간 이해는 왜곡된 신앙으로 귀결된다. 원죄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인간 이해에서는 ‘내가 몸소 예수를 산다’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의 자세가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 나의 믿음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은가? 예수와 내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내가 몸소 예수를 살아야지’ 하는 매서운 마음가짐 하나를 마음에 아로새기지 않는 한, 나는 그럭저럭 신앙생활의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예수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복음서가 던지는 화두(話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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