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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인간 이해, 예수를 "사는" 사람들
[정연복의 민중신학] 진정한 신앙, 대속적 그리스도론 뛰어넘기
 
정연복   기사입력  2008/03/18 [11:37]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다. 예수를 단지 신격화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소 예수를 사는 것이다. 
 
대속적(代贖的) 그리스도론에 기초하여 예수의 초월적 신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풍토에서는 “우리가 몸소 예수를 산다”는 게 몹시 건방지고 심지어 신성모독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진면목 곧 역사적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펼친 하나님나라운동의 역사적 발자취를 그런 대로 잘 드러내는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믿음과 예수를 따름, 예수의 삶을 예배함과 예수를 삶, 이 둘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8).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
 
이렇듯 예수를 믿음과 예수를 본받고 따름, 이 둘의 일치를 강조하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예수는 신앙의 대상일 뿐이지 우리가 따라 닮아야 할 삶의 모범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교활한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기만? 그렇다. 예수를 믿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지만 우리가 몸소 예수의 삶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까지를 마치 정통 기독교 신앙의 영역인 양 눈 가리고 야옹하는 격이 아닌가.
 
이 땅의 신자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은 참 뜨거운 편인데 그 믿음이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뭘까? 
 
잘못되고 편협한 신학과 교리가 무엇보다 문제다. 예수에 관한 신학과 교리는 민중해방을 매개로 한 인간해방에 헌신했던 “역사적 예수”의 해방실천에 기초해야 한다. 즉 해방실천이 먼저이고 신학과 교리는 거기에 뒤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서가 거꾸로 뒤집혀 먼저 일정한 신학과 교리 체계를 설정하고 이 좁은 틀 안에서만 예수를 이해하려 드니까, 예수의 일면은 파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나라운동의 참모습이 제대로 포착될 리 없다.
 
비슷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한국교회의 성경읽기도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약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를 주목해야 한다. 주로 민중전승에 기초한 복음서야말로 신학과 교리의 냄새를 비교적 덜 풍기면서 기원 후 1세기 로마제국의 식민지배 아래 있던 유대 나라의 갈릴리라는 일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펼쳐졌던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보물 창고다.
 
그런데 이상스러울 만큼 한국교회는 복음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학과 교리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신약의 다른 책들 특히 바울서신을 선호한다. 내 오랜 교회생활에 비춰 보더라도 복음서의 빼어난 예수운동 ‘이야기’의 소중한 가치를 깊이 인식하는 목회자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잘못된 인간이해 또한 믿음과 삶의 불일치를 조장하는 한 원인이다. 믿음은 결국은 ‘인간의’ 믿음이기에 인간 이해에 따라 믿음 또한 달라진다. 잘못된 인간 이해는 왜곡된 신앙으로 귀결된다. 원죄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인간 이해에서는 ‘내가 몸소 예수를 산다’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의 자세가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 나의 믿음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은가? 예수와 내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내가 몸소 예수를 살아야지’ 하는 매서운 마음가짐 하나를 마음에 아로새기지 않는 한, 나는 그럭저럭 신앙생활의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예수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복음서가 던지는 화두(話頭)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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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3/18 [11: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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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창석 2008/08/31 [19:27] 수정 | 삭제
  • 김진홍 같은 목사따위?? 님의 글을 보니 확신은 못하겟지만 김진홍 목사 같은 사람의 발 뒤꿈치에도 도달하지 못할 사람같은데요^^
    그 분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나 비젼,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제대로 알고 이런 글을 써도록 하세여..
  • 올 훼 2008/03/20 [12:12] 수정 | 삭제
  • .


    예수를 살아내는[生] 삶의 문제는


    고대 이래 늘 되풀이되는 신(神)과 인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와 짝을 이루는 것일 터인데,



    예수를 '사는[生]' 것이 아니라 '사는[買]' 무리들이 이 땅에 너무 많으며,


    예수가 자신의 피와 살을 팔아 '값없이 준' 말씀을


    민중에게 물질적 부와 권력으로 비싸게 '팔아먹는[賣]' 자들이 양치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우리 나라의 비천한 정신적 도덕적 영적(靈的) 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김진홍 같은 목사 따위가


    '셋방살이 하는 사람은 나라살림도 셋방살이 꼴로 할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이런 촌뜨기의 머릿속에서 '가난한 마음의 천국'이라는 위대한 나라가 태어나고 자라날 공간이 어디에 있겠으며,


    선비의 맑은 도덕적 세계상과 청렴결백한 정치적 의로움의 밥그릇이 놓일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비유하건대, 하늘이 이런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에게 너희의 의로움을 말하느냐


    너희의 의로움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니라.


    라는 말씀의 그 뜻을 우리가 알게 될 때에 이미 그 징벌이 우리와 우리 자식들에게 떨어지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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