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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교회는 정말 성령 충만한 교회인가?
[정연복의 민중신학] 진정한 믿음, 충만한 성령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와
 
정연복   기사입력  2007/12/28 [18:59]
1. 성령과 해방
 
한국교회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일정한 수식어를 동반한다. 죄 사함을 받는 구원, 영혼의 구원,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은 구원 따위의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대다수 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깨끗이 씻음을 받는 영혼 구원"이다. 한국교회는 나름대로 분명한 구원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의 구원관은 어떠한가? 전체적으로 보아 구약에서 구원은 "해방" 혹은 "정의"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즉 구약의 구원 개념은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는 식의 개인적이고 영적이고 비정치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다. 오히려 집단적이고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으로서의 구원에 가깝다.   
 
그 단적인 증거는 구약의 토대를 이루는 출애굽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집트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지도 아래 극적으로 탈출한 집단적 해방사건이요, 지배에 맞선 피지배층의 정치적 투쟁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을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모범적 원형으로 고백한다. 분명히 이 고백에서는 해방이 곧 구원이다. 이 출애굽의 해방신앙은 이후 구약 전체의 기조음을 이루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관을 틀지었다.
 
이 해방과 정의의 구원관은 예수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아니, 구약의 구원관은 예수에게서 더욱 뚜렷한 해방과 정의의 색채를 띠게 된다. 예수는 인간 존재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똑같이 진지하게 다룬다. 즉 인간의 참된 구원을 위해서는 이기심과 탐욕, 노예의식과 숙명적 체념의식 등의 인간 내적인 면의 철저한 변화와 함께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구조 또한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함을 예수는 거듭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구원관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개인과 사회,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개인 "정신"의 개조와 사회 "구조"의 변혁, 이 둘이 예수의 구원관에서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수의 균형 잡힌 인식에 기초한 폭넓고 깊은 인간이해와 세계이해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등 바울의 성령 이해에서도 성령과 자유, 성령과 살림, 성령과 인간화는 별개가 아니다.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구약과 예수와 바울의 구원관에 비추어 볼 때, 오늘 한국교회의 구원관은 인간의 문제를 너무 좁게 추상적으로 다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내면, 인간의 영혼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를 동시에 변화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예수는 성령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자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다(누가 4:18-19). 이렇듯 성령과 해방, 성령과 자유, 구원과 해방, 구원과 인간화, 설교와 정치, 예배와 정치, 하나님 나라와 밥, 사랑과 정의, 정의와 평화, 영혼과 육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상호 긴밀히 연관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성령 충만한 신자는 개인구원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 땅의 자유와 해방, 평등과 정의를 이루는 일을 자신의 선교 과제로 삼을 것이다.
 
그대는 진정 성령 충만한가? 그대의 교회는 정말 성령 충만한 교회인가? 성령 강림절에 즈음하여 조용히 묵상해 보자. 
 
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 요한 3:1-5
 
한국교회가 단시일에 그리스도교 역사상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성령운동이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한국교회와 성령운동은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성령 세미나, 성령 충만, 성령 체험, 심지어 성령 폭발이라는 원색적인 용어에 이르기까지 성령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은 지대하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성령 충만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며칠씩 금식기도와 철야기도에 매달리기도 한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살기를 원하는 이 땅의 대다수 신자들의 믿음은 소박하고 눈물겹다. 생활고에 지치고 병마에 시달리는 가난한 교인들이 죽자살자 성령에 기대어 삶의 새 희망을 찾고 병을 고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더욱 눈물겹다. 삶의 절박한 문제들을 껴안고 몸부림치는 그들을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으랴.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한국교회가 성령 충만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솔직히 많다.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겠다는 이 땅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의 태도 자체는 훌륭하지만, 혹시 성서와 동떨어진 이기적이고 기복주의화된 신앙이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한국교회의 여러 현상들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한국교회의 성령이해는 너무나 기복주의화·물신화되어 있다. 성서가 전하는 성령의 올바른 뜻을 좇아 바르게 살려고 애쓰기보다 교회와 교인들의 필요에 따라 성령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결국은 자유와 해방과 사랑과 진리의 영인 성령이 때를 따라 복을 내리는 도깨비 방망이로 전락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요한 3:1-5를 갖고 니카라구아 솔렌티나메 농어민들이 나눈 복음대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랑이 빠진 종교를 받들고 있었어요.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새로 난다는 것을 몰랐어요. 사람한테 새로운 의식이 생겨날 때에 그 사람은 새로 나는 거예요. 삶의 변화죠. 그게 새 삶이기에 예수님은 새로운 탄생이라고 부르신 거죠. 새 사회가 서려면 새 인간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다시 난다는 것은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산다는 거예요. 세례는 사랑의 영으로 우리를 씻어 줍니다. 이기심의 영에서 우리를 정화하는 영이란 말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쇄신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영으로 다시 나야 한다, 다시 말해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거예요. 새 세상을 만드는 길도 이것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믿는다는 거예요"(에르네스또 까르디날, 『말씀이 우리와 함께』, 분도출판사, 239-241쪽).

 
백성의 지도자요 학식이 높고 성서해석 전문가인 니고데모는 "사랑이 빠진 종교"를 받들고 있었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는 우스꽝스러운 반문으로 거듭남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배운 것 없어도 주님의 뜻을 좇아 믿음 안에서 새 인간과 새 사회를 꿈꾸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애쓰는 솔렌티나메 농어민들은 바로 "사랑"의 빛으로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사랑의 영을 받아 이기심의 영에서 해방되는 삶의 질적인 변화야말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의미라는 것은 얼마나 단순 소박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고백인가!
 
나는 정말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우리 교회는 이기심의 영에서 해방되어 사랑의 영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는가?
 
3. 성령과 민중 - 누가 4:18-19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 마가 1:15)를 예수의 공생애 곧 하나님나라운동의 첫 발언으로 보도한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예수의 '메시아 취임사'로 불리는 오늘 본문을 예수의 첫마디로 내세운다. 아마 누가복음 저자는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정도의 표현을 갖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목표와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 아닐까.
 
본문은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는 확신에 찬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선언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자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 곧 "희년"(레위기 25:8-55)을 선포하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오늘 본문은 빼어난 해방 찬가인 '마리아의 노래'(누가 1:46-55)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기존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인권 회복을 선언하는 자유와 해방의 본문으로밖에는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소위 영적인 성서 해석을 좋아하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더러 영적인 해석이 빛을 발해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큰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하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을 영적으로 주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주석적 폭력이 될 것이다.
 
희년이 뭔가? 오십 년마다 한 번 이스라엘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레위 25:10) 선포하는 해가 아닌가. 희년에는 빚을 모두 탕감하고, 노예를 한 밑천 줘서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므로 희년은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기득권 박탈이지만, 갖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유와 해방과 인권의 완전한 회복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해 희년은 출애굽의 해방전승에 기초한 혁명적인 사회변혁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레위기 신학에서는 바로 이 희년이 "거룩한 해"(25:10)로 고백된다. 다시 말해 자유와 해방의 총체적인 실현을 통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인권 회복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聖靈)은 또 뭔가? 문자 그대로 거룩한 영이다. 왜? 성령은 인간과 세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와 해방의 활동을 간과한 채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니까 거룩하다"라고 교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다.
 
그렇다. 성서의 하나님이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며 그리고 성령이 하나님의 영인 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다름 아닌 자유와 해방을 이루는 것이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등 바울의 성령 이해에서도 성령과 자유, 성령과 인간화는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오늘 본문과 더 폭넓게는 신구약성경에 비춰 볼 때,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신앙 개념들을 좀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언어, 즉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일상생활의 쉽고 평범한 언어로 바꿔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구원과 해방, 구원과 인간화, 성령과 해방, 성령과 자유, 설교와 정치, 예배와 정치, 하나님 나라와 밥, 사랑과 정의, 정의와 평화, 영혼과 육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상호 연관시켜 볼 줄 아는 유연한 시각을 길러야 한다.
 
성경에 뻔히 있는 것을 갖고 자꾸만 "정통" 교리와 신학의 이름으로 이 둘을 분리시킨 채 '나는 성령 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우리도 예수처럼 성령 받아 이 땅에 자유와 해방을 이루는 일에 헌신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슴 떨리는 물음이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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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2/28 [18: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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