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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민중, 그 행간 읽기와 신앙의 당파성
[정연복의 민중신학] 복음서의 갈등 구조,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예수
 
정연복   기사입력  2008/01/08 [20:16]
첫째 마당: 복음서의 갈등 구조
 
복음서의 예수(운동) 이야기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각각의 복음서가 자기 나름의 독특한 관점과 신학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아 예수(운동) 이야기는 한 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따로 떼어서 보지 말고 큰 틀에서 서로 연관지어 볼 때 그 장면들에 담긴 뜻이 보다 분명히 이해된다.
 
모든 드라마나 소설은 갈등구조를 밑바닥에 깔고 전개된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문학작품의 갈등구조는 저자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그 문학이 나온 시대의 이런저런 갈등을 반영한다. 우리 민족의 빼어난 이야기 문학인 『춘향전』을 예로 들면, 춘향을 어떻게든 제 품에 넣고 싶어하는 탐관오리 변사또와 이에 맞서 절개를 지키려 애쓰는 춘향 사이의 갈등은 『춘향전』이 구전전승으로 떠돌거나 문자로 기록되던 당시의 부패한 지배권력과 자칫 이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기 쉬운 힘없는 여성들 사이의 현실적인 갈등관계를 배경으로 한다.
 
빼어난 이야기 문학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복음서의 예수(운동) 이야기 역시 시종일관 갈등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신학과 교리의 색안경을 끼고 성서를 단편적으로 읽는 데 길들여진 신자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얘기지만, 아무런 편견 없이 복음서 전체를 차분히 읽어보면 이 갈등구조가 환히 드러난다.
 
인간 사회의 갈등이란 뭔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기존 질서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오늘의 삶이 너무도 고달파서 새 세상을 갈망하는 사람들, 이 두 집단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대립이다. 성서를 낳은 히브리 민족이나 우리 민족, 더 나아가 모든 민족의 역사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이 갈등구조의 연속이다.
 
갈등은 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힘과 힘의 집단적 충돌이다. 강자의 힘과 약자의 힘 사이의 팽팽한 격돌이다. 현실에서 너무도 명백히 드러나는 이 갈등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천박한 역사의식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일방적으로 약자를 편든다.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부자와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과 긴장과 대결의 관계를 이룬다. 가진 자의 횡포와 위선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대든다. 그래서 예수 주변에는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병들고 율법의 조목조목을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든다. 예수의 핵심 제자들 역시 부자나 유식한 사람이 아니라 뱃사람이나 세리 따위의 낮고 비천한 출신이다.
 
반면에 반(反)예수 진영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예수와 민중들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예수가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마가 3:22)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그들은 예수(운동)이 자기네 기득권을 위협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예수(운동) 이야기는 이렇듯 첨예한 갈등구조 속에 전개된다. 십자가는 예수의 편드는 삶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태초에 예비하신 각본’에 따라 이뤄진 한바탕의 종교적 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복음서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4복음서가 일제히 보도하듯이 자칭 “유대인의 왕”(마가 15:26)이라는 명백히 정치적인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성자(聖者)의 죽음이 아니다. 그 죽음은 민심을 소란케 하고 기존 질서를 위협한다는 판단 아래 유대의 지배계급과 로마제국이 결탁하여 야기된 “십자가형”(마태 27:38)이다.
 
민중신학의 기초를 닦은 서남동 교수가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십자가(cross)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 편에 섰던 예수의 ‘죽임당함’으로서의 십자가처형(crucifixion)을 엄격히 구분할 것을 요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마당: 예수와 민중, 그 행간 읽기
 
갈릴리 호숫가의 뱃사람들, 그리고 세리인 레위가 소중한 생업과 직장을 내팽개치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고 마가복음 기자는 단 몇 구절로 간단히 처리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일까? 오히려 이 간략한 보도의 행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와 뱃사람들, 예수와 세리, 다시 말해 예수와 민중들 사이에는 뭔가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와 민중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아주 간단히 처리하고 있지만, 빼어난 이야기꾼인 그는 독자들이 “역사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그 행간을 읽어낼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예수와 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인간적 친교과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하나님나라운동의 길에 접어들기 전까지 묵묵히 육체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예수와 어쩌면 대를 물리며 어업에 종사했을 갈릴리의 가난하고 무식한 뱃사람들, 그리고 로마에 빌붙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당시 유대사회에서 온갖 멸시와 따돌림을 받던 세리 사이에는 서로 눈빛만 보고 몇 마디만 나눠도 서로를 느끼고 이해할 것만 같은 깊은 감정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밥을 나누고, 서로의 삶의 이야기,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민중들끼리가 아니고서는 쉽게 터놓을 수 없는 애절한 삶의 사연들, 서로의 가슴 속 슬픔과 울분과 희망을 나누었을 것이다. 더러는 시국을 논했을 것이다. 왜 세상이 이리도 불평등한지, 갈릴리 농어민들이 뼈빠지게 농사를 짓고 더러는 밤샘을 하며 고기를 잡아도 왜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의 정체는 대체 뭔지, 세상의 여론이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따위에 대해 목소리 높여 분노를 토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와 민중의 관계는 일방적인 주객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교통하는 대등한 관계였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마가 1:41).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군중들 틈에서 슬그머니 예수의 옷에 손을 대자 “기적의 힘”이 흘러나올 정도로 예수에게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이 잠재되어 있었다(마가 5:24-34). 예수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기존 질서에서 아무런 인간적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자기를 따라다니는 군중들을 “측은히” 여겼고(마가 6:34) 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마태 9:36). 예수는 굶주린 채로 “사흘”이나 자기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참 보기에 안 됐다”는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마가 8:2).
 
이렇듯 예수에게서 참으로 돋보이는 것은 신적인 능력이나 초자연적 치유력이 아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소외된 민중을 보면 절로 솟는 “측은한 마음”, “불쌍한 마음”, 안타까운 심정이다. 치유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 등 모든 기적의 배후에는 민중에 대한 예수의 깊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깔려 있다. 참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하는 그런 마음이 바로 “기적의 힘”(마가 5:29)이라는 것을 마가복음 기자는 독자에게 전한다.
 
그러므로 2천 년 전 유대 땅 갈릴리, “그때 거기”의 예수의 기적은 “오늘 여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야 한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던 예수의 그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우리의 삶을 휘감을 때 뭔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민중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청년예수의 그 순수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이 기억할 때마다 뭔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의 뜨거운 예수사랑으로 그대의 삶은 예수를 닮고 있는가? 그대의 깊은 하나님 사랑으로 그대는 그대처럼 하나님의 소중한 아들·딸인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더욱 깊어졌는가?
 
그대가 “민중”을 외면하면 하나님도 그대를 외면할 것이다(마태 25:31-46).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예수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셋째 마당: 코끼리와 생쥐
                        
오늘 한국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빈부 격차 문제는 오늘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공동체적 삶의 질서마저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 1998년에 접어들어 겨울 한파와 함께 들이닥친 IMF 사태는 빈부 격차를 가속화하고 있다.
 
더욱이 이 빈부 격차는 IMF로 말미암은 경제 위기 상황을 우리가 슬기롭게 극복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그 심각성의 본질이 있다.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래로 선진국의 자본주의가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거대자본을 앞세워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현실에서, 앞으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빈부 격차 심화는 눈앞의 불을 보듯 뻔하다.
 
가난한 사람들, 아니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계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대량 생산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한편에는 힘있는 부자들이 희희낙락하고 있고 다른 편에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눈물짓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당신이 불의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면, 당신은 억압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코끼리가 생쥐의 꼬리를 밟고 있는데도 당신이 자신은 중립이라고 말한다면, 생쥐는 당신의 중립성을 진짜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투투).
 
“압제자의 편을 들고 있는” “중립.” 그렇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원래는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성서의 메시지를 비정치화하여 교회의 사회참여를 소홀히 한 채로 개인 영혼의 구원에만 열을 올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압제자의 편”을 드는 죄악을 범해왔다. 일부 양심적인 목회자와 신자들이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대다수 교회와 신자들은 교회 밖의 현실에는 무관심한 채로 교회 안에 틀어박혀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걸로 만족해왔다.
 
“우리는 생명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믿으며,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며 우리가 참되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러한 신앙의 진리들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삶과 죽음 가운데 자신의 거처를 정할 때 실제로 진리가 된다”(오스카 로메로).
 
그렇다. 배고픈 이들에게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 되지 못하는 진리, 헐벗은 이들에게 한 벌의 따뜻한 옷이 되지 못하는 진리,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한마디의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되지 못하는 진리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다. 교회가 생명의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무관심한 것은 교회의 자기 기만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성서는 세상에서 힘없는 “생쥐”들의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상징되는 땅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 이집트에서 배고픔과 중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 “만나와 메추라기”로 근근히 연명하며 광야를 떠돌던 사람들, 가나안 땅 본토민들에게 멸시와 학대를 받던 사람들, 가난과 불의와 전쟁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들, 로마의 식민지배와 유대의 지배권력의 억압과 착취 아래 신음하던 팔레스틴의 가난한 사람들,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 이야기가 성서의 주류를 이룬다. 기독교는 힘있고 부유한 “코끼리”들의 종교가 아니다.
 
세상의 “코끼리”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는 마땅히 “생쥐”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생쥐”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자신의 모든 영적·물적·인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생쥐의 꼬리를 밟고 있는” “코끼리”의 발을 치우려고 노력할 때에만, 교회가 선포하는 구원의 복음은 “실제로 진리가 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생쥐”들의 교회가 됨으로써 구원의 보편적 사명을 망각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생쥐”는 “코끼리”의 발에서 자유롭게 됨으로써 구원받는다. “코끼리”는 “생쥐”를 짓밟고 있는 자신의 불의한 범죄에서 벗어남으로써 구원받는다.
 
“생쥐”를 편듦으로써 “생쥐”와 “코끼리” 모두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님과 “생쥐”들로부터 버림받게 되리라는 것을 이 땅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명심할 일이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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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1/08 [20: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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