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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 한국 교육엘리트의 나르시시즘1
[인물과 사상의 눈] 국가적 문제를 서울대 문제로 생각하는 포퓰리스트
 
강준만   기사입력  2005/07/09 [13:21]
누구를 위한 학벌 카스트 제도인가?

나는 지난 95년 『전라도 죽이기』라는 책을 낼 때에 많은 고민을 했었다. 주로 음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전라도 차별의 실상을 고발하는 게 과연 좋기만 한 일일까? 전라도 차별 의식이 없던 사람도 그 책을 보면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할 위험은 없을까? 그런 의문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실(失)보다는 득(得)이 더 클 것이라는 판단하에 책을 내긴 했지만, 지금도 그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과 유사한 딜레마가 또 하나 있다. 노골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지방대 차별에 관한 것이다. 그 차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게 과연 좋기만 한 걸까? 오히려 지방대의 긍정적인 측면을 적극 부각시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2003년) 11월 25일 MBC-TV의 『심야스페셜』을 시청하다가 깜짝 놀랐다. 지방대 문제를 다룬 그 프로그램은 광주의 한 편입학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방에서 서울 소재 대학으로 편입하려는 지원자가 올해(2003)에 5만 명에 이를 것이라나. 그것도 놀라운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정작 놀란 건 “지방대 출신 며느리보다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며느리가 더 낫다. 지방에서 무얼 배웠겠는가?”라는 어느 서울 아줌마의 말을 전하는 한 여학생의 증언이었다. 그 말의 내용도 놀라웠지만 저런 말이 그대로 방송되어도 되나 하는 의아심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 정운찬 서울대 총장


그런 야만적인 지방대 차별의 실상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가? 일부 한국인들의 썩어빠진 그 천민적 속물근성을 욕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가? 아니면 일부 서울시민들의 정신 착란 증세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차분하게 ‘포지티브 게임’에 임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이 문제로 내가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일부 언론이 지방대 차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기사를 많이 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방대 차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입하고 나설 정도로 극심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4대 대기업들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대학의 서열에 따라 차등 점수를 매겨 차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 이건 ‘인권’의 문제다. 기업들이 저지르고 있는 대학 차별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 열심히 할 필요없다. 그건 차 떠난 다음에 손 흔드는 격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간판이 중요한 것이지 대학 4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건 중요치 않다. 그걸 일일이 살펴볼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다. 대학 입학시의 점수 하나면 족하다. 그래서 신입사원 채용 평가시 당신이 서울대를 나왔다면 무조건 100점을 주고, 어느 대학은 90점, 어느 대학은 80점, 어느 대학은 70점, 어느 대학은 60점, 어느 대학은 50점을 준다. 50점을 받은 당신이여, 억울한가? 누가 그 대학 나오라고 등 떠밀었는가?”

이건 명백한 카스트 제도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아시는가? 인도엔 브라만(승려계급), 크샤트리야(무사계급), 바이샤(工商계급), 수드라(노예계급) 등 4개 계급이 존재한다. 한국의 학벌 카스트 제도로 말하자면, 이 4개 계급은 대졸자들에 해당된다. 인도엔 4개 계급에 속하지 못하는, 즉 수드라 이하의 계급이 존재한다. 한국의 학벌 카스트 제도에선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인도에서 수드라 이하의 계급은 전체 인구 중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리트(Dalit)’로 불리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은 인도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온갖 멸시와 배척을 받으면서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한다. 이보다 더 낮은 계급이 있다. ‘부족민’ 또는 ‘트리발(Tribal)’로 일컬어지는 토착민들로 약 5천만 명이나 된다.

다리트와 트리발은 아예 카스트에 끼지도 못하는 열외 인간으로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 인도엔 인간 생명 경시 풍조가 매우 심각한데, 그게 바로 이런 카스트 제도 때문이다. 이와 관련, 남상욱은 이렇게 말한다.

“카스트의 본질은 인간을 원천적으로 생각하는 자(영혼이 있는 자)와, 단순히 일만 하는 자(영혼이 없는 자)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카스트 체계하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존재는 영혼을 가진 브라만 등 상층계급에 국한된다. 하층계급, 특히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과 토착부족민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치부된다. …… 영혼이 없고 생각하는 주체도 아닌 최하층에게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상층계급으로서는 크게 개의할 필요가 없다.”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층민들은 가난해도 삶의 만족도가 높고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좋게만 볼 일이 아니다. 카스트 제도가 그만큼 지독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분을 숙명으로 여기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한국의 학벌 카스트 제도는 어떤가?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엔 상대적 박탈감은 있다. 그리고 카스트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 딱 한 번, 10대 후반에만 주어진다. 문은 대단히 좁으며 돈 많이 가진 사람의 자식들이 통과하기에 유리한 문이다.

그 문에 들어서기 위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가난하다고 해서 그 전쟁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삶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식들이 새로운 문에 들어설 수 있게끔 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낮은 계급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다.

상고(商高) 출신으로서 그 천형의 고통을 사법고시라는 특수한 문을 통해 극복한 한 인물이 있었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공식적 영역에서만 그걸 극복했을 뿐 비공식 영역에선 여전히 엄청난 차별이 존재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드라마는 생략하자.

그가 대통령에 나서겠다고 하자 고졸 출신 대통령은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건 이해해야 한다. 섣불리 ‘인권’ 운운할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브라만 계급이 다리트와 트리발 계급에게 머리를 숙이긴 죽기보다 싫은 일이 아니겠는가. 개인적인 차원에선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권력을 가진 공인(公人)들로서 자신의 그런 굴욕감을 공적 판단에 개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후에 선거시 공약대로 ‘지방대 육성’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걸 훼방놓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도 그런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세뇌된 계급의식 때문일까?

2003년 7월 24일에 열린 지방대 발전방안 세미나에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이만희는 “내부적 구조혁신 없는 재정지원은 링거효과나 무임승차 논쟁만 불러올 것”이라며 최근의 지방대 재정지원 논의를 비판했다. “지방대의 기초체력 보강 없는 재정지원은 생명만 연장해주는 ‘링거효과’만 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방대들이 고교졸업생의 감소, 우수학생의 수도권 유출, 정치ㆍ경제력의 수도권 집중 등의 외부 요인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지만 더 큰 원인은 백화점식 학과운영, 몸집 부풀리기, 초ㆍ중등학교보다도 낮은 교원 확보율, 학과통폐합 등의 기본적 구조조정조차 불가능한 집단 이기주의 등 학내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대학은 인재를 길러내기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지도 않는 학위를 대량 양산하는 공장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이만희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세 가지 동의할 수 없는 게 있다.

첫째, 정도의 차이일 뿐, 이만희가 지적한 문제는 지방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모든 대학들의 공통된 문제라는 것이다. 이만희는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둘째, ‘구조 조정’은 반드시 비용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즉, 이만희가 지적한 것들은 겨우 그 비용의 명세만 열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지방대 내부에 있다기보다는 지방대가 ‘지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반대로 서울 소재 대학들이 내부적으로 잘나서 지금과 같은 지위와 평판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단지 ‘서울’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눈덩이 효과’로 그걸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라이벌 대학인 연고대 가운데 어느 한 대학이 전라남도로 캠퍼스를 이전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만희는 그 경우에도 전남으로 옮긴 대학이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서울에 남은 라이벌 대학과 계속 라이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셋째, 이만희의 자세가 잘못됐다. 자신의 그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기존 카스트 제도의 존속을 위해 바친다는 건 잔인한 일이다. 그 좋은 머리로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이면서 카스트 제도라는 인권유린 만행을 척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바쳤어야 옳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학벌 카스트 제도인가? 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의 힌트를 드리겠다. 언젠가 나와 좀 친한 어느 서울 소재대 교수가 내게 사적으로 이런 충고를 한 적이 있다.

“강 교수!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왜 자꾸 서울을 비판해? 그런 비판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먹히지 당신이 그러면 배 아파서 그런 줄 알잖아.”

바로 이거다. 그런 오해받지 않기 위해, 많은 지방대 교수들마저 이 문제에 굳게 침묵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사람이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고? 서울 소재대 교수들 가운데 내가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내게 그런 충고를 한 교수도 그런 주장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지금도 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 않을 것이다.

지방대 교수로 근무하면서 지방대 차별에 대해 비분강개하던 교수들도 막상 자신이 서울 소재 대학으로 옮겨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끔히 입 닦고 굳게 침묵한다.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왜 그러는 줄 아는가? 원로 교수들은 물론 서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가 하나 있다. 무엇인가? 목마른 사람이 샘 파는 법이다. 모든 지방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촉구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행여 행복하거나 평화로운 얼굴 표정 짓지 말라. 이건 인권의 문제다. 가열차게 투쟁해야 한다. 대통령을 만들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인간 집단들이 왜 기존 카스트 제도의 존속을 위해 애써야 한단 말인가?


서울대 총장 정운찬의 나르시시즘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나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주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엘리트가 갖춰야 할 요소 중의 하나는 늘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한국의 엘리트에게는 그게 없다.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고 사회마저도 자신의 이익에 종속시키려고 든다.

한국 엘리트의 그런 속성을 굳이 좋게 해석하자면, ‘나르시시즘’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르시시즘이란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문화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쉬가 『나르시시즘의 문화』라는 책에서 쓴 용법이다.

『나르시시즘의 문화』라는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최고조에 이른 미국인들의 독특한 퍼스낼리티 구조를 탐구한 것이다. 래쉬는 미국인들이 자기 자신 이외의 바깥 세계에 대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굳게 닫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외부 세계를 경험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래쉬가 말하는 ‘닫힘’은 퍼스낼리티 구조와 관련된 것이다. 그가 보기엔 미국인들은 그저 번쩍이는 피상적인 것에만 휘둘려 지낼 뿐 그 어떤 사회적 대의(大義)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즉각적인 만족 중심의 소비자 윤리에만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고(思考)를 우선 당장 이것이 나에게 무슨 효용을 가져다주느냐 하는 데에만 집착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얼어죽을 대의에 관심을 갖겠는가. 공공적 이슈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는가.

래쉬는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나르시시즘의 문화’는 병리적인 것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음울한 상황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방어 기제라고 말한다. 나치 대학살, 핵전쟁 위협, 환경 파괴, 자본주의의 파괴성 등과 같은 음울한 역사와 사회 상황이 대중으로 하여금 자기만의 은신처에 도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엘리트가 나르시시즘에 빠져든 데에도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그런 사정을 이해해주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오직 자기와 자기 집단밖에 모르는 한국 엘리트가 빠져 있는 나르시시즘의 한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2003년 10월 28일 서울대 총장 정운찬은 한국은행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미래와 교육의 비전’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자신의 평소 지론인 고교평준화 제도 폐지를 거듭 역설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지방부터 단계적으로 중ㆍ고교 입시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교평준화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이미 익숙한 것이라 새로울 게 없지만, 정운찬의 주장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그건 “고교평준화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정운찬은 그 주장의 근거로 “서울 인구가 전 인구의 25%인데 서울대생의 40%가 서울 출신이고, 특히 경제ㆍ경영ㆍ법학 등 3개 인기학과의 경우는 60%가 서울 출신”인 동시에 “그것도 서초구ㆍ송파구ㆍ강남구 등 강남권 3개구 출신이 집중돼” 가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신선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간 대체적으로 보아 ‘불평등’의 문제는 고교평준화 찬성론자들의 논거였는데, 정운찬은 흥미롭게도 고교평준화 폐지론자의 입장에서 그 논거를 전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운찬이 불평등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엔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정운찬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했다기보다는 서울대 차원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착각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정운찬의 주장대로 지방부터 고교평준화를 폐지하면 서울대엔 지방 명문고 출신들이 많이 입학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서울대가 ‘부유층의 대학’으로 변질돼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론 무엇이 달라질까? 물론 좋은 점이 있다. 서울대는 소중한 국가적 자산이므로 서울대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도 국익일 것이다. 또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과 수재들끼리만 모여서 공부하는 데 따른 효율성도 사회적 이익일 것이다. 또 없을까?

전 연세대 교수 최정호가 정운찬의 주장에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는 수도권 밖의 모든 지방에선 자치단체장의 재량에 따라 평준화를 풀어주고 특수목적고와 자립형사립고도 오직 수도권 밖의 지방도시에만 설립을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왜?

“그런 학교가 지방에 있다면 왜 조기 유학을 하고, 왜 굳이 집값 비싼 강남으로 이사하겠는가. 옛날엔 서울의 좋은 학교에 가난한 시골 사람이 자식을 보냈다. 이젠 돈 많은 서울 사람이 시골의 좋은 학교에 자식을 보내도 좋지 않은가. 게다가 그 애들이 시골에서 ‘또다른 한국’이 있다는 걸 깨닫는 것도 좋은 일이다. 생판 낯설고 물선 외국 학교에도 보내는 판에. 이것만이 수도권의 초비대화를 막는 분권화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믿는데 어떨지 ……. 게다가 한국 공교육의 더 이상의 붕괴도 막을 수 있는 …….”

일리 있는 주장인 것 같지만,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 주장이다. 최정호는 모두 다 ‘시골의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순 없기 때문에 그 탈락을 다른 방식으로 만회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정운찬과 최정호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면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가려는 유인이 약화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그건 중고교 시절에 서울로 가느냐 대학 입학시에 서울로 가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밖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 그런 이익들을 모두 합쳐 20이라고 하자. 손실은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엔 80이다. 정운찬은 솔직하게 서울대 입학이 계층 이동의 중요한 수단임을 인정했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울대 입학을 위한 경쟁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처절한 ‘계급 전쟁’이다. 고교평준화 폐지는 최일선에서만 벌어지던 전쟁을 전 국토로 확장시키고 징집 연령을 크게 낮추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이 확장된 전쟁에서도 무기(돈)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무기가 약한 쪽의 부모는 자신들의 삶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군자금 확보에 열을 올릴 것이다. 그로 인해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한국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이게 바로 80의 손실이다.

나는 고교평준화 폐지론자들이 차라리 솔직하게 사회진화론을 들고나오면 좋겠다. 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전쟁에서 한국의 승리를 위해선 좀 잔인하더라도 처절한 적자생존(適者生存) 원리가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논쟁이 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불평등은 좋지 않다는 식의 논지로 고교평준화 폐지를 주장하니 매우 당혹스럽다.

정운찬은 기존 ‘계급전쟁’의 불합리성은 전혀 의문시하지 않았다. 10대 후반에 한 번 치르는 전쟁으로 평생이 결정되는 기존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 전쟁의 과부하를 평생에 걸쳐 분산시켜 합리적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염려한 건 나라가 아니라 서울대였다.

서울대의 이익, 그것도 별로 아름답지 않은 집단 이기주의적 이익을 나라의 이익인 양 역설해대는 정운찬의 나르시시즘에서 무얼 느끼는가? 정운찬이 그 이전에 역설했던 ‘지역균형 선발제’도 이제 와서 돌이켜 보건대 서울대 이미지 개선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운찬은 아마도 ‘지역균형 선발제’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급기야 고교평준화 폐지라는 카드까지 들고 나왔을 것이다.

정운찬은 그런 일련의 발상을 ‘한국의 미래와 교육의 비전’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포장하려고 들지만, 그 어떤 포장술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르시시즘은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전국 232개 시ㆍ군 가운데 서울대에 한 명도 보내지 못하는 곳이 70곳을 넘고 전국 1천700여개 고교 중 700개가 한 번도 서울대 진학을 시키지 못했다.”

나는 국민을 끔찍이 생각하는 듯한 이 주장에서 서울대 사람들의 무서운 나르시시즘을 읽는다. 서울대는 ‘대한민국대’라는 발상이 읽혀지지 않는가? 이 지구상 어느 나라의 대학 총장이 위와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전북대 총장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다 웃을 텐데, 정운찬의 위와 같은 소리를 자못 진지하게 경청했을 한국은행 임직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전국 232개 시ㆍ군 가운데 전북대에 한 명도 보내지 못하는 곳이 200곳을 넘고 전국 1천700여개 고교 중 1천600개가 한 번도 전북대 진학을 시키지 못했다.”

전북대 총장만 웃음거리가 되겠는가? 연고대 총장은 물론 세계 어떤 나라의 명문대 총장이 위와 같은 식으로 말한다면, 모두 다 ‘미쳤다’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정운찬은 그 말을 하면서 특유의 그 선한 얼굴로 우국충정(憂國衷情)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서열 철폐는 포퓰리즘인가?

“어느 시대든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가 있다. 서울대는 사회를 리드할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야 한다.”

서울대 총장 정운찬이 『동아일보』 2003년 7월 22일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나는 이 주장에 100% 동의한다. 그런데 서울대는 과연 진정한 정예 지도자를 키워내고 있는가? 전혀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서울대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리드할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회를 리드할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르시시즘에 중독된 정운찬은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하지 않았을까?

“대학 서열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정운찬은 “서울대 출신이 요직을 독식하는 것은 정 총장이 말한 ‘다양성 확보’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이렇게 답한다.

“미국ㆍ영국ㆍ일본 등도 요직에는 대부분 일류 대학 출신들이 앉아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운동권 출신 인사들도 대부분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는가.”

정운찬은 미국ㆍ영국ㆍ일본 등 어느 나라와도 다른 서울대 출신의 요직 점령 비율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나 보다. 운동권 출신 인사라도 서울대를 나와야만 금배지를 달 수 있는, 그 바닥의 서울대 패권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 없나 보다. 아는 바 없는 게 아니라, 그런 문제 제기를 배가 아파서 나온 걸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계속 표출되는 그의 나르시시즘은 그럴 가능성을 높여준다. 정운찬은 “대학이 발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학벌 폐지 운동이 진행된다면 서울대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선 이렇게 답한다.

“정부가 지역 균형 발전을 명목으로 연구비 지원에서 서울대를 차별한다는 주장이 학교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실이라면 문제삼겠다. 서울대는 과학논문색인(SCI) 게재 논문 수를 기준으로 세계 1만여 대학 중 34위다. 열악한 현실에서 선전한 결과다. 여기서 퇴보하면 안 된다. 파이를 키우지 않으면 균형도 발전도 없다.”

이 발언에서도 정운찬이 오직 서울대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서울대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 소가 웃을 소리다. 2002년 한 해 동안 교육부에서 지원한 국고보조금을 많이 받은 상위 10개 대학을 보자. 1위 서울대 1천402억 원, 2위 경북대 211억 원, 3위 고려대 200억 원, 4위 연세대 191억 원, 5위 전남대 177억 원, 6위 전북대 144억 원, 7위 경상대 137억 원, 8위 부산대 136억 원, 9위 충남대 132억원, 10위 포항공대 126억 원 등이다. 서울대가 받은 돈은 2위인 경북대보다 7배나 많고 상위 10위권의 나머지 9개교가 받은 지원금 전체를 합한 금액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 엄청난 특혜를 조금 시정해보자는 게 그래 부당한 서울대 차별인가? 정운찬은 그런 말을 하기 전에 ‘학벌 카스트 제도’와 ‘지역 균형 발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먼저 밝혔어야 했다. 균형 이전에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인가?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해오지 않았나? 그로 인해 생겨난 가공할 부작용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가?

서울대 총장이 서울대만을 생각하는 걸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정운찬은 “서울대는 사회를 리드할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한국의 미래와 교육의 비전’에 대해 수많은 발언을 해왔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정운찬이 오직 서울대만을 생각하겠다면, 속된 말로 폼은 잡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강연하러 다닐 때마다 내걸고 있는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이라는 단골 메뉴를 접어달라는 것이다. 그냥 ‘일류대의 미래와 서울대의 비전’이라는 주제로만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매체엔 정운찬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고 ‘정운찬을 위한 변명’만 여러 건 쏟아져 나왔다. 예컨대, 『대한매일』 논설위원 정인학은 2003년 7월 29일자에 <정운찬 총장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적극적인 변명은 아니다. 세상사의 어려움을 지적한 글이다. 다만 정인학이 세간의 시각이라며 소개한 학벌옹호론에 대해선 토를 달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정인학이 토를 달진 않았으니 말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다른 쪽은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지 말라고 일갈한다. 서울대가 폐쇄된다면 다음 서열 대학이 그 정점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유사 이래 모양이 달랐을 뿐 서열은 항상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학 서열 철폐가 대학의 하향평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정 총장의 포퓰리즘 발언이 뿌리를 두고 있는 토양이다. 엘리트 고등교육을 강화해야 할 판에 수적 우위를 빌미로 견제하려 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13대 무역국이면서 세계 100대 대학 하나 없는 나라에서 일류대 폐해론을 제기하는 것은 소탐대실의 단견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굳이 반론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울대에 대한 문제 제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예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채 억지를 펴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마디 토를 달자면, ‘서울대 폐쇄’나 ‘서열 철폐’는 서울대 비판의 핵심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서울대 폐쇄’나 ‘서열 철폐’에 단호히 반대한다. 서울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서열도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건 ‘고정 서열제’가 아닌, ‘변동 서열제’다. 열심히 하기에 따라 서열이 바뀔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문제삼는 건 서울대 독식 체제다.

서울대의 크기를 확 줄여야 대학들 사이에 경쟁이 가능해진다. 그래야 서열이 바뀔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서울대의 현 독식 체제하에선 경쟁이 불가능하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법칙이 작동한다. 이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서열 철폐를 외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나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 게임을 하자는 게 아니라면 일단 상대방의 선의를 존중해줘야 할 것이다. 서울대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

서울대 학생들의 두 얼굴

서울대 총장 정운찬의 포퓰리즘 발언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빚었으며,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서도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대한매일』 2003년 7월 30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논란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25일. 학벌없는사회 전국학생모임과 한총련 등 6개 학생단체가 서울대 본관 앞에서 총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집회를 가진 것이 도화선이 됐다. 이후 서울대 정보포털 커뮤니티(www.snulife.com) 게시판에는 학생단체를 비난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안티학벌주의자’라고 밝힌 한 학생은 ‘총장님이 바르게 지적하셨는데 왜 반항하냐’며 학생단체를 비난했다. 100여건 가까이 올라온 답글(리플) 대부분도 ‘속 시원하다’ ‘옳소’라는 반응이었다. ‘법학과 01’이라고 소개한 한 학생은 ‘별 XXX같은 논리로 서울대 폐교하자거나 학벌 폐지하자는 소리 들으면 기분이 엿 같아진다’고 했다. ‘안티운동권’은 ‘학벌주의가 싫다면 너부터 모범을 보여서 자퇴하라’고 주장했다. 한 학생은 ‘우리 학교 특유의 실력주의에 기반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뭉쳐야 한다’며 ‘단결’을 호소했다. 한 01학번은 만화책 대사를 인용하며 ‘강자를 끌어내리면 마치 자신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가? 벨(별) 가치도 없군 ……. 쓰레기 같은 것들’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비난 여론을 자성하는 목소리는 대세에 밀려 다시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오래된 인문’이라고 소개한 한 학생은 ‘이런 수준 이하의 글이 환영받을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거대한 파시즘의 광기를 본다. 이런 글이 씌어질 수 있다는 것에서 서울대의 미래를 본다’며 허탈해했다.”

그렇다. 서울대의 미래가 훤히 보인다. 그냥 뜯어먹는 것이다. 서울대에 들어감으로써 남들보다 좀더 유리한 입지에서 좀더 많이 뜯어먹을 수 있는 기회를 쟁취한 것이다. 다만, 그래도 배운 건 좀 있어서 뜯어먹는 행위에 그럴 듯한 명분을 갖다 붙이고 화려한 립 서비스를 베풀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게 한 극이라면, 또다른 한 극은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사회대 건물인 6동의 화장실이 박살난 적이 있었다. “양변기에서 수정주의가 나온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망치로 양변기를 죄다 부수어 버린 것이다.

먼 옛날 이야기다. 2003년 11월 26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가 1984년 학생회 부활 이후 처음으로 무산된 것도 그런 변화상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무산됐을까? 최종투표율이 46.67%에 그쳐 유효 투표율인 50%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의 투표 기간인 3일간 투표율이 33.4%에 머물러 이례적으로 이틀간 연장투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대 학생들은 시대정신에 충실한 것인가? 지금은 민주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세상이니 반(反)독재 투쟁을 할 일이 없어졌다. 이젠 개인의 욕망을 유감없이 실현해야 할 시대다. 그래서 서울대 학생들은 전혀 다른 정반대의 극으로 치닫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극과 극을 치닫지 않으면서 중용을 지키는, 아주 괜찮은 서울대 학생들이 많이 있다. 서울대 인터넷신문인 『SNUNOW』의 편집장 고건혁도 그런 학생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이 논란에 대해 『대한매일』 2003년 8월 2일자에 기고한 <서울대 기득권은 분명히 있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울대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게시판을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된 반응은 학벌없는사회 등의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많은 서울대생들이 입을 모아 오히려 일부 명문 사립대가 패거리를 지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데 이들로 인한 폐해의 책임을 모두 서울대에 덮어씌우고 비난한다고 지적한다.

서울대 안에는 더 이상 서울대의 기득권은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된 듯 보인다. 어쩌면 정 총장의 발언은 이 같은 서울대 내부의 인식을 여과 없이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

대학서열을 철폐하기 위해 서울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포퓰리즘으로 치부하는 서울대생들의 인식은 옳지 않다. 오히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기득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서울대생들이다. 엘리트의 권리는 주장할 줄 알지만 엘리트의 의무에는 무관심한, 서울대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저 입신양명의 도구 정도로 여기는, 결국 성찰 능력을 상실하고 남의 비판을 신경질적으로 내치는 우리, 이것이 서울대생의 자화상이 아닐까.

세계적인 대학, 경쟁력 있는 대학이라는 허무한 구호에 앞서 지금 서울대에 필요한 것은 뼈아픈 자기 성찰이다. 안에서는 볼 수 없는 기득권을 바깥의 시선을 통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서울대생들의 반응을 보며 날이 갈수록 서울대가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에 뭔가 특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익에 연연하는 이들을 양성하는 곳이 아닌, 사회적 엘리트를 키워내는 국립 서울대로 거듭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 나는 ‘사회적 엘리트’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점에서 반(反)엘리트주의자들과는 다른 입지를 갖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반엘리트주의자들의 생각은 존중하겠지만, 그건 하나의 지침으로 삼을 이상일 뿐 비현실적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대 학생들 중 거의 대부분이 내 생각과 같을 것이라고 믿는다.

2003년 11월 서울대 총학생회와 서울대 인터넷뉴스 『SNUNOW』가 서울대 학부생 8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80%가 학벌문제의 폐해에 공감하고 있으며 학벌문제와 서울대의 연관성에 대해 93.4%가 서울대가 학벌에 따른 사회적 폐해에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반면, 절반가량은 사회 진출 과정에서 ‘서울대 출신 프리미엄’을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순인가? 그렇진 않다. 당연한 현상이다. 사회 전체의 차원과 개인 차원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남들보다 더 힘들여 공부했는데, 그에 따른 프리미엄을 못 누린다는 건 부당한 일이다. 서울대 학생들이 가장 먼저 서울대 프리미엄에 접하게 되는 건 아르바이트일 것이다.

2003년 10월 서울 8개 대학 학보사가 각 대학 학부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달에 76만 원 이상을 받는 ‘고소득 대학생’ 비율은 서울대 21.7%, 연세대 13.0%, 이화여대 8.9%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한 결과다. 나는 서울대 학생들이 그런 프리미엄을 한껏 누리길 바란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차원에선 학벌주의 폐해를 우려하는 문제의식은 가져주기 바란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서울대 학생들의 ‘두 얼굴’이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두 얼굴’을 철저하게 가져달라는 주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일단 자신이 서울대 입학을 위해 혈투를 벌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기 밥그릇까지는 찾아먹되, 이후부터의 게임의 성격과 룰을 바꾸는 데엔 적극 앞장서 달라는 것이다. 즉, 나의 처방은 기득권을 전면 부정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가자는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과격한 해법을 지양하고 이른바 ‘윈-윈 게임’으로 가자는 것이다. 자기만 이기고 사회는 지는 게임을 계속하겠다면 그건 도둑놈이다. 나는 서울대 학생들부터 도둑놈으로 전락하지 않는 걸 보고 싶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4년 1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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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7/09 [13: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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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찬 2005/07/09 [21:41] 수정 | 삭제
  • 언론사 노조활동으로 해직된 후 가방끈이 짧아서 강의는 엄두도 못내고 놀기 좋고 책
    보기 편한 직장 찾아 삼만리. 7년이라는 세월을 신촌소재 모대학교 행정직원으로 기획
    과, 구매과, 연구지원과, 도서관 열람과 밥을 순차적으로 먹은 바 있는 네티즌이다.

    그러니 대학의 항시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을 약간은 안다고 자부해도 그리 욕먹을 일은
    아니다. 서울대 정운찬총장 및 교수협의회의 최근 행보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함축된 것
    이라 전혀 건질게 없느냐면 그건 아니다.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생존권적 인간
    적 대우가 가능한 삶의 질적향상까지를 포함한 머리맛댄 진지한 토론으로 생산적 결론
    도출은 얼마든지 가능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과 열우당의 반응은 아연질색이다.

    어디 전쟁 터졌나? 런던 테러가 서울대 관악캠퍼스에도 발발했다는 말인가? 무슨 넘의
    "초동진압"이라는 군사용어가 왜 튀어나와야만 하는데? 미우나 고우나 대학총장, 대학
    교수면 그래도 최고 지성인데 "손을 봐야 한다", "조져야 한다" 등의 폭력적 망언을 쏟아
    내는 것이 과연 국정을 책임지는 막중한 위치의 정치인들이 감히 입에나 담을 수 있는
    소린가?

    저잣거리 장사꾼들조차 흥정이 뒤틀어져 열받아도 이런 막말은 안 한다. 국정운영의 묘
    미는 양보까지를 포함한 토론과 협의를 반복한 국익의 시스템 창출인 것이지 막말 경연
    대회는 아니지 않는가? 참 한심하기 그지 없다. 좀 있어봐라. 노무현과 열우당이 입에
    게거품물고 입바른 소리하는 강준만교수도 "초동진압"으로 "손을 봐야 한다", "조져야 한
    다"는 소리 나오지 말란 보장 있나?

    참 이런 저수준의 난리에 난리 이런 난리도 없다. 초등학생 따라 배울까 겁난다. 아이구
    이 풍진 세상 날도 더운데 아이스케키나 무꼬나서 볼일 보자....
  • 조동만 2005/07/09 [16:09] 수정 | 삭제
  • 흐미, 오늘 대자보 대박나는 날이다.
    한국 인터넷 언론의 미래를 이끌어 가실 분을 두 분씩이나 만나다니.....
    감읍하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