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정 의원의 포용론
황우석 교수의 마지막 기자회견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여당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가운데 한 명인 정동영 전 장관이 황 교수에 대한 포용론(?)을 주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정 전 장관은 13일 SBS라디오 〈진중권의 SBS 전망대〉에 출연해 "황 교수가 머리 숙여 진지하게 사죄, 용서를 구했다"며 "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녕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정 전 장관은 지금까지 저질러진 황 교수의 치명적 잘못들과 거듭된 거짓말들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말인가? 아니면 잘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정 전 장관이 황 교수의 치명적 전비(前非)들과 수많은 거짓말들에 대해서 과문하다면 지적 게으름이 심각한 상태라고 판단해도 무방한 일일 것이고, 황 교수의 잘못과 거짓말들에 대해서 잘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한다면 정 전 장관의 정의(正義) 관념과 윤리의식을 다시 점검해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이미 황 교수는 연구과정의 윤리적 흠결과 논문 조작에 대한 책임만으로도 과학자로서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이다. 서울대 조사위에서 밝혔듯이 이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최소한의 윤리의식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고 물러나 자숙하는 태도를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황 교수는 정 반대로 행동했다. 진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는 ‘줄기세포가 바꿔치기 당했다’, ‘원천기술이 있다’는 등의 치졸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 왔다.
황 교수는 1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종전과 다름없이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전가와 감성적 애국심에의 호소로 일관했다. 거기다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여기에는 젊은 연구원들이 소품으로 동원되었다-과 검증되지 않은 연구성과에 대한 대언론 발표가 더해졌다.
"논문의 허위 데이터는 사실이며 책임을 지겠다"고 말 한 후에 "논문조작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황 교수에게 뉘우침이나 반성을 기대하는 일은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정 전 장관은 "황 교수가 머리 숙여 진지하게 사죄, 용서를 구했다"고 평한다. 정 전 장관은 황 교수의 눈물과 언어마술에 현혹되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각 있는 사람치고 황 교수가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엄밀함과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세계에서 논문을 조작하는 등의 치명적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단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이유만으로 너그럽게 용서하는 법이란 없다. 이는 불관용이나 무자비함이 아니고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원칙의 문제다.
하물며 황 교수에게는 ‘개전의 정’조차 없지 않은가?
황우석과 대한민국을 맞바꿀 것인가?
황우석 사태는 한국사회가 내장하고 있는 모순과 병폐들의 축소판이라 칭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그 안에는 국익이라는 정체불명의 이데올로기, 광신적 민족주의, 결과 만능주의, 경제 지상주의 등이 넘실대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위에서 열거한 이데올로기들에 중독된 채 반성과 성찰도 없이 질주를 거듭해 왔다. 황우석 사태는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진실이 대낮같이 환하게 드러난 지금에도 맹목적으로 황우석을 옹호하는 이들은 대개 애국이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었거나, 황우석을 지지했던 자신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고 말해도 그리 박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국민들이 이렇듯 광기와 비이성에 미혹되고 있을 때 정치인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진실과 원칙에 기초해서 사태를 직시하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인들의 존재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적지 않은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황우석 마케팅에 열중했던 자신들의 과거가 부끄러워서인지 반성에 무척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유감스럽지만 정 전 장관도 이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다.
황 교수를 용서하고 기회를 주자는 정 전 장관의 속내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정 전 장관의 발언은, 지난 12월에 "황 교수는 앞서가는 사람이자 우리의 희망이므로 지킬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 자신의 기존 입장을 철회할 면목이 없어서 혹은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황 교수에 대한 지지여론을 의식한 행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 교수에 대한 처리는 정치인들의 체면이나 정치적 셈법 혹은 온정주의, 국익 등에 의해 좌우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다.
만약 그 알량한(?) 국익을 위해 황 교수를 용서해주고 기회를 준다면 한국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결과 만능주의와 경제 지상주의의 독소는 치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고, ‘진실’과 ‘윤리’라는 가치는 교과서에서나 찾을 수 있는 단어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익과 온정에 이끌려 거짓과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결연히 맞서 싸울 의지를 벼리는 일이다.
‘국익’과 ‘군대의 명예’에 포획되어 있던 프랑스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진정한 공화국으로 거듭난 것처럼 대한민국도 황우석 사태를 통해 진실과 윤리가 존중되는 사회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