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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와 관용, 故 양신규 교수를 그리며
[추모] 호남사랑과 광주항쟁을 자랑스러워한 경제학자의 서거에 부쳐
 
최용식   기사입력  2005/07/29 [10:59]

내가 양신규 교수를 처음 안 것은 안티조선 사이트인 [우리모두(www.urimodu.com)]에서였다. 그는 내가 그곳에 진출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 맹활약이 전부였다면 그는 내게 그처럼 강렬한 첫인상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지금은 유명인사가 된 사람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 달랐다.

그는 다른 저명한 필진들과는 전혀 다른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하찮은 글이라도 자신의 글에 대한 댓글에는 답글을 열심히 달아주곤 했었다. 악질 스토커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거의 예외가 없었다. 비난이나 비아냥거리는 반응에도 진지한 자세를 전혀 잃지 않았다.

이런 그의 진지함이 삶의 무게를 너무 가중시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분야에서나 진지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니, 내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0년 5월 월간 <말>지 토론회에 참석, DJ노믹스를 설파하던 고 양신규 교수     © 하종강의 꿈과 노동 제공

그는 작은 차이를 용납할 줄 하는 드문 사람이었다. ‘같은 길’을 가다가도 작은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 길을 갈라서서 으르렁거리고 결국은 동지에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적’으로 변하는 것이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작은 차이를 용인하지 못해 동지를 버리고, 큰 차이를 보이는 적과는 손을 잡는 풍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에, 나는 그가 더없이 그립다. 큰 도움을 받고도 작은 차이를 견디지 못해서 등에 비수를 꽂는 사람도 있기에, 그가 없음이 내 가슴 한 구석을 뻥 뚫리게 한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제대로 평가할 줄 하는 드문 사람이었다. 특히, 나는 그로부터 황송하게도 ‘한국의 그린스펀’이라는 별칭을 감히 받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나를 위해 장문의 글을 남겨주기도 했다(이것이 내게 더 특별한 감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에 접근하는 자세는 그와 나는 전혀 달랐다.

나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믿는데 비해, 그는 현 경제학으로도 얼마든지 경제현상을 읽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내가 현 경제학의 최근 발전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그에게 멸시 당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나는 경제학 학사 학위조차 없는 재야의 서생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대학을 거쳐 MIT대학에서 촉망받는 교수였는데, 그는 초야에 묻힌 나를 높이 평가해줬다.
 
▲고 양신규 교수와 다정한 한 때를나누고 있는 최용식 소장     © 21세기 경제학 연구소 제공

이 세상에 하찮게 보이는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학벌을 먼저 따지는 것이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경력이나 직함을 먼저 따지는 것이 세태가 아니던가. 학벌도 없고 직함도 변변치 않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이런 삭막한 세상에 그가 없다니, 나로서는 더욱 큰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호남출신임을 유난히 앞세우고, 고향사랑이 곧 애국심의 근원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숱한 불이익을 당했다. 호남출신이면 무조건 폄하를 당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어떤 고위인사는 ‘호남출신이라는 사실이 천형(天刑)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을 정도가 아니던가. 그랬다. 아무런 이유 없이 호남출신은 무조건 배척을 받아야 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른 아이들에게 물으면, 비겁하다 멍청하다 불결하다 뒷통수친다 게으르다 등의 선입견을 드러내곤 한다. 이런 왕따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근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도 호남에 가해진 근거 없는 아니 조작된 편견을 앞장서서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약자의 편이어야 할 진보들이 더욱 그랬다.

이것이 세상인심인데, 그는 굴하지 않고 호남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광주항쟁이 총칼의 위력을 여지없이 무디게 함으로써, 다시는 군부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그는 철석같이 믿었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하곤 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로부터는 폄하를 당하거나 미움을 받았다. 이것도 그의 삶에 너무 무거운 짐을 안겨준 것은 아닐까?

또한 그는 지나치게 친미적인 자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일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미움을 살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인데, 그는 이 세상과 타협할 줄을 몰랐다. 적당하게 넘기는 일은 그의 성품에는 전혀 맞지 않은 듯 했다. 이처럼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성품이 삶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은 더 아름답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그가 더욱 그립다.

그는 우리나라를 좀 더 살기 좋고 좀 더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었지만 이 땅의 친지들과 꾸준히 교류를 했었고, 작은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었다고 전한다. 이런 그가 이 세상에 없다니 ......

이제 어디에서 그와 같은 올바른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이제 어디에서 그의 정열을 느낄 수 있을까? 이제 누구에게서 그의 솔직함을 볼 수 있을까? 이제 누구에게서 그의 진정한 고향사랑을 맛볼 수 있을까? 이제 어디에서 가식 없이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제 어디에서 그의 진지함을 찾아볼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몹시 그립다.
 
[참고기사] 이종민, '개혁'을 하자는 것인가? 말자는 것인가? - 양신규 교수에 대한 반론 -(대자보 49호, 2000년 10월)

 * 필자는 21경제학연구소(www.taeri.org) 소장이며, <대한민국 생존의 속도>(리더스북, 2005) 등 다수의 경제학 서적을 출간했습니다.
* 양신규 교수 추모사이트 : 하종강 소장의 <노동과 꿈>(http://www.ha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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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7/29 [10: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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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쏘랙스 2005/08/04 [05:11] 수정 | 삭제
  • 그러고보니 두분 형제 같이 인상이 비슷하시네요..
  • 자유인 2005/07/29 [21:25] 수정 | 삭제
  • 편히 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