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서민아파트는 바람잘 날이 별로 없다. 한밤중에 어디선가 부부싸움이라도 났는지 고함이며 울음소리, 뭔가 깨지는 소리가 공기를 갈라놓거나 노상 취객들의 고성방가가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이다. 밤뿐인가. 대낮에도 술에 취해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우리 동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부유한 아파트촌은 벤치에 앉아 맥주캔을 따는 것도 교양 없는 행동으로 통한다고 한다. 그 동네 사람들은 품위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가 사뭇 다를 것이다. 남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자제할 줄 알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별로 잘못하지 않아도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사람들일 테지. 하찮은 일에도 감사나 사과의 말이 튀어나오는 사람들은 교양인임에 틀림없다. 이런 사람들이 넘친다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만약 하찮음의 경계를 넘어선 일이라면 ‘교양인’들은 그들 특유의,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대처 방식이 따로 있다. 아쉽지만 교양이니 품위니 하는 말은 더 이상 딸려가지 않는다. 가진 자들 중 이익이 걸려 있는 일에까지 점잖게 행동하는 이는 무척이나 희귀하다. 이들로서는 아무 데서나 술을 마시지 않는 정도의 절제와 예절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며, 그건 오히려 든든한 물적 자본이 받쳐준 한 자락 마음의 여유에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품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터럭이라도 건드리지 않을 사소한 데서나 발휘될 뿐, 제가 가진 것에서 부스러기라도 남한테 떼이겠다 싶으면 짐승만도 못하구나 싶은 ‘교양인’들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기득권자들에게 돈과 권력으로 쌓아올린 자신의 철옹성은 어떤 양보나 타협도 허락되지 않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자신과 인터뷰한 잡지사 기자가 끼니를 걸렀음을 간파하고 샌드위치를 듬뿍 챙겨주어 그를 감동시켰던 한나라당 대변인 모씨는 남의 배를 채워줄 아량은 있어도 학벌이 낮은 이가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건 봐주기 힘들다. 대통령 노릇은 자기 집단만의 몫인데 대학 구경도 못해본 자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얼마나 분하겠는가. 그런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대학 못 간 사람들의 이유 없는 박탈감으로 간단히 치부하고 마는 것은 그를 포함한 이 나라 기득권자들의 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1%의 투정이나 시기로 모는 삼성 재벌의 태도도 우연한 것이 아니다. 가진 자들에게 공통된, 잘 난 자신을 못난 이들이 배 아파한다는 심사는, 자기 것의 정당성을 그런 식으로 강변할 수밖에 없는 초조함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초조함이나 불안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공정한 경쟁에서 이긴 결과가 아님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서민들이 품고 있는 한탄은 최소한의 합리성과 규칙마저 저버린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관련되어 있다. 없는 ‘것’들이 자신을 저주하리라 보는 가진 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소시민들은 희망 없는 사회에 대한 좌절감을 자신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간 기득권층에게 돌리지 않는다. 헌법재판관이 탈세하는 나라에서 서민이 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도리어 자신을 향해 고스란히 겨누는 것이다.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갈지자를 걷는 우리 아파트 취객의 절망감은 자기 몸을 갉아먹는 결과밖에 얻는 것이 없다. 가진 자들이 콤플렉스에 사무쳐 소외된 이들을 바닥까지 능멸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여옥 부류의 망언이 결코 관용을 입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옆 동네의 고급 아파트 주민들은 몇 년 전 주변의 노점상들을 모조리 몰아냈다. 자가용이 드나들 때 불편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이권과 무관한 사소한 불편에는 너그러운 것이 기득권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하긴 부유촌 자락에 줄지어 있는 남루한 노점상들이 ‘교양인’들의 눈에 거슬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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