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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버리고 떠나려는 탈주의욕망
이동연목사의 생명창조 시대의 자기경영시리즈 2
 
이동연   기사입력  2003/06/30 [18:20]

     예전에는 청소년들이나 가출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성인들이 가출하는 경우가 많아 지고 있다.  성인가출은 청소년 가출과는 또 다른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아직 부모의 무한한 보살핌 속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야 할 아동들 속에 불신과  불안, 증오의 씨를 뿌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귾임없이 자아를 성찰해야 한다     ©로댕 작, <생각하는 사람>
성인들은 왜 가출하느냐? 많은 경우 경제적 이유, 부부간의 애정 전선 이상 등이 주 요인이겠으나 적지만 분명히 엄존하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 요인은 '자기 찾기'이다. 무슨 이야기냐?  내가 '누구의 남편과 아내'로 '누구의 부모'로 '누구의 자식'으로, '어느 직장의 무슨 포지션'으로 살아 온 게 싫다는 거다.
  
     내가 그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그냥 나로 살고 싶다는 거다. 그냥 자기로 살려는 욕망은 인류가 존속되면서부터 누구나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  있어 왔지만 근래에 들어 부쩍 많아지는 이유가 있다.

     인간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체질이 결정되듯이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머리 속에 집어 넣느냐에 따라 사상이 결정되고 인품이 결정되면 기호도가 결정된다. 미아리의 점쟁이 보다 더 정확히 한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인지과학'과 주변 정보기술이 더 발전하게 되면 아마도 발견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운명 결정론'을 말함이 아니고,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는 뇌속의 데이타들이 조화를 부려 움직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만일 한 개인의 뇌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개인이 놓여진 삶의 정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면, 그 개인이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지배해 온 뇌 속의 데이타를 결정할 권한이 정보화 사회이전에는 일방적이었다. 왕정체제에서는 황제의 일장훈시를 들으며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순종하고 살았다. 간혹 왕정 시절에도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었던 천민(賤民)인 망이, 망소이, 노비인 만적 같은 이들이 드물게 나타기도 한다. 그러나 만적처럼 '태어 날 때부터 왕후장상의 씨가 다르냐'고 외쳐도 그 외침은 더 이상 전파되지 않고 주변에서 맴돌다가 끝났다.
   
    산업 사회에 들어 와서도 일방적 담론의 주체인 권력주변에 자본가가 편입되었을 뿐 그 양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교묘하게 자본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을 위한 가치와 사회적 담론을 형성, 유포하였다. 여기에는 학교의 교육, 상업광고, 미디어, 종교들까지 총동원되었다.
  
    그 광경은 쉽게 학교나 교회를 연상하면 된다. 저 연단에서 연사가 일방적으로 청중을 향해 자기의 견해를 일직선으로 내리 꽂는다. 그저 청중은 저 연단에서 내려오는 정보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주입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특정의 소수에서 불특정의 다수에게로 유포되는 사회적 담론과 가치는 그 시대의 금과옥조가 된다.

    사회적 금기, 어느 특정집단의 터부(Taboo. 禁忌)란, 그 사회의 여론주도층, 그 단체의 어른들이 정한 금과옥조를 벗어나는 일이다. 이 일방형 정보 제공 사회에서는 가치와 행동에만 터부가 있는 게 아니다. 사람에 대한 터부가 훨씬 더 심각하다.
  
    프랑스의 한 기호학자의 말처럼 '사회적 터부를 어긴 사람이 곧 터부대상'이 되어 가치와 종교와 사회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개인의 인간성을 그냥 말살해 버린다.  우리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 모든 윤리와 가치의 출발은 귀족계층이 노예를 순치시키기 위해 만든 것' 이라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
   
     산업사회이전까지는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여 확산시키려면 엄청난 자본이 들었다. 당연히 모든 정보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짜여졌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 들어 서서는 별 자본 없이도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와 정보를 창출해 사회적 공감을 얻어 낼 수 있다.

     거대화, 집중화를 추구하는 산업사회에 자본주의 체제가 결합하면서 모든 가치는 전부 화폐로 환원되었다. 여기에 다양한 재화의 가능성은 다 은폐되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 들어 와서는  단 열 사람의 가치라도 찾아주어 세상 앞에 당당히 내놓아 유통의 과정 속에서 선택과 소멸을 반복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변하고 있다. 더 이상 정보 생산과 유통의 권리가 특정 소수에게만 있지 않다.  누구나 자기의 견해와 자기 계층을 얼마든지 대변하며 타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어느 사회나 지도층보다는 평범한 서민층이 훨씬 더 그 수가 많다.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다수가 활발히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고 강화할 수 있는 발언과 정보를 소통하기 하면서 권력과 금력 앞에 참고 억눌렀던 자기의 의견과 감정을 이제는 스스럼 없이 드러 내고 있다.
  
     이처럼 자기는 한번 드러 내면 자꾸 드러 내고 싶어 진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구는 명예욕과는 확연히 다르다. 명예욕은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생명 창조사회에서의 자기를 드러 내려는 욕구는 타인의 시선과는 별개로 그냥 자기 식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사회를 향해, 사회적 합의를 해감에 있어서 언제나 침묵을 지키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극히 수동적 인성(人性)에 길들여 살다가 갑자기 모든 사회적 의제 설정과 방향 결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억눌렸던 자아가  분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나라는 이름 옆에 붙어 있는 회장 OOO, 부장 OOO, 아빠OOO. 아내 OOO, 등 수식어로 살아 온 사람일수록 그 분출욕망이 휠씬 커서 과도한 분출의 부작용까지도 무릎 쓴다. 도리어 나라는 존재 앞의 수식어에 어느 정도 충실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오로지 그 수식어만을 위해 존재하지 말고 그 수식어가 나를 위해 존재하도록 사는 사람이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다. 타이틀의 종이 되지 말고 타이틀의 주인이 되면 그 타이틀에도 더  충실할 수가 있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도 : 미래신화의 원형]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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