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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교육, 굿판을 거둬치워라!
구조적 모순, 분배구조의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정상화해야
 
이태경   기사입력  2003/11/22 [10:57]

1. 반복되는 죽음의 행렬에 대한 한 소묘(素描)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시험이 치러졌고, 시험이 끝난 후에 으레 그래야 할 것처럼 수능성적을 비관한 수험생들의 자살이 줄을 이었다. 채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 이 어린 청년들의 죽음은 신문과 방송의 한 귀퉁이를 잠시 차지한 후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수능고시날 한학생이 점심식사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책을 보고 있다.     ©한겨레
필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지금 필자는 수능고사장에서 초조하게 시험지가 필자의 앞에 놓이기를 기다리는 수험생의 신분으로 지난 1년간 전투와도 같은 수험기간을 견디어냈다. 이 한 번의 시험이 필자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숨이 턱 막힌다. 1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필자는 부모님과 친지들이 바라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수없이 많은 상념들이 마치 탄환처럼 스쳐지나간다. 부모님과 친지, 담임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렸다는 죄책감,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말 것 같다는 두려움, 수험기간 동안의 고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허망함,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 대한 분노 등의 감정이 착종(錯綜)되어 필자를 감싸고 있다. 이제 필자는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손에서 놓기로 마음먹는다.

정신을 차린 순간 필자의 몸은 아득한 허공 가운데 떠 있다.
저 밑에 있는 대지가 무섭게 빠를 속도로 필자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진다.
 
 필자의 의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과연 필자는 진정 자살을 한 것일까?
      
2. 도대체 한국사회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뒤르켕을 굳이 인용할 필요없이 가장 실존적이고 내밀한 개인적 결단으로 여겨지는 자살의 주된 동인(動因)은 기실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구조적인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하였다는 절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살을 택한 청년들의 죽음에 한국사회는 어떠한 그리고 얼마만한 책임이 있는 것일까? 이제 한국사회에서 교육-교육은 문화자본의 다른 이름이다-이 갖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에서 교육의 정의는 1. 지식을 가르치고 품성과 체력을 기름, 2.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심신을 발육시키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계획적·조직적으로 행하는 교수적(敎授的) 행동. [가정교육, 학교 교육, 사회 교육 등이 있음.]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대학입학으로 대표되는 교육은 사전적 의미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어쩌면 사전적 의미의 교육과 현실의 교육이 갖는 사회적 의미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달 사이의 물리적 거리보다 더 멀듯싶다.

한국사회에서 교육-대학입시로 대표된다-이란 한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가족이 머물 계급을 결정짓는 일종의 생존게임이며 이 게임에서 패배한 자들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이 게임은 단판 승부다. 한국사회에서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사회의 주류(main current)에 편입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의미이고, 은폐된 카스트 제도의 맨 윗 계급에 속할 자격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오래전부터 한국사회는 이른바 'SKY'출신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사회적 부와 권력과 담론 등을 그들사이에 교환하는 구조로 고착되어 왔으며, 이러한 구조는 더욱 더 공고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학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울대가 위치하고 있고 그 밑으로 많은 대학들이 서열화 되어 있으며 '학력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이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출신학교가 어디냐에 따라서 한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가족의 사회적 운명이 거의 결정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이 사회의 주류 중 일원이라면 당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을 세습하려는 강한 욕망에 의해서 자식들의 교육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부를 아낌없이 사용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사회적 부와 권력의 분배에서 배제당하고 있는 비주류의 일원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파출부로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들의 사교육비 조달에 결사적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래의 기사는 2003. 11. 19자(수) 경향신문 보도이다.           

2003년도 사교육비는 13조6천여억원으로 교육부 예산의 55%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초·중·고생, 학부모 등 1만9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교육비 실태 조사 결과를 19일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는 취학전 사교육비가 제외돼 실제 규모는 훨씬 더 클 것으로 분석됐다.

강남 1인당 사교육비 年478만원! 한국교육개발원이 19일 밝힌 올해 사교육비 실태 조사 결과는 사교육비가 줄어들지 않고 계층간·지역간 편차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학생과 학부모들은 과외를 시키는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을 꼽고 있어 대학입학제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사교육비 경감은 ‘공염불’에 그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지출은 소득·성적순에 비례=연간 1인당 평균 사교육비는 소득이 높을수록, 학생의 성적이 높을수록 큰 것으로 조사됐다. 월소득이 4백50만원 이상인 상층이 지출하는 사교육비는 4백35만원으로 저소득층(1백50만원 이하)에 비해 4배 가까이 많았다. 중상층(3백만~4백50만원)은 3백만원, 중하층(1백50만~3백만원)은 2백18만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부모가 판단하는 자녀의 성적 수준별 사교육비는 상위권이 3백26만원, 중위권 2백59만원, 하위권 2백60만원으로 성적이 높을수록 사교육비 지출 규모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강남이 최고=지역별 1인당 연간 사교육비는 서울 강남이 4백78만원으로 읍·면지역(2백3만원)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강남을 제외한 서울지역은 3백13만원으로 수도권(3백58만원)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광역시 지역은 2백76만원, 중소도시는 2백49만원이었다.

◇4가구당 1가구꼴로 30% 이상 지출=사교육비가 가구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9%라는 반응이 34.9%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20~29%(21.8%), 0~9%(19.7%), 30~39%(14.3%) 등이었다. 특히 소득의 30% 이상을 사교육비로 지출한다는 비율은 23.5%로 4가구당 1가구 꼴이었다.

◇초등학교가 가장 많아=학교급별로는 초등학교가 7조1천6백억여원으로 중학교(4조7백60억원)나 일반계 고교(2조2천3백20억원)에 비해 훨씬 많았다. 반면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일반계 고교생이 29만8천원으로 중학생(27만6천원), 초등학생(20만9천원)보다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초등생은 학습지, 중·고생은 학원 선호=사교육 참여 형태(중복응답)는 학습지 과외(38.6%)가 가장 많았으며 종합반 학원(27.0%), 단과반 학원(24.4%), 개인과외(14.3%), 그룹과외(10.0%) 순이었다.

학교급별로는 초등학교의 경우 학습지, 중학교는 종합반 학원, 고등학교는 단과반 학원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용별(중복응답)로는 교과중심 사교육(83.0%)과 예체능 중심 사교육(80.6%)이 주종을 이뤘다. 예체능 과외 비율은 초등학교가 51.5%로 실업계고(17.1%)나 일반계고(17.1%), 중학교(9.1%)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찬제 기자〉

위의 기사가 지시하는 것처럼 사교육 시장은 무섭게 팽창하고 있으며 사교육비가 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이미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강남으로 대표되는 부자동네와 읍면지역으로 대표되는 낙후지역 사이의 지역간 불균형, 소득수준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의 편차도 심화되기만 하는 추세이다. 즉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아이들의 장래를 결정짓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학원공화국이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부와 정력을 다해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취학전부터 시작된 입시전쟁에 심신이 피폐해지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리가 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사정이 이와 같을진대 어떻게 공교육이 정상화 될 수 있으며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교육-공동체 정신을 함양하고 심신을 도야하는 등-이 가능할 것인가! 입시제도를 개선한다고 해서, 사교육비 경감 방안을 마련한다고 해서, 입학정원에 지역별 할당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교육이 대학입시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고 공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세 번 아니다!
대학입시에서 승리한 자에게 사회적 부와 권력이 독점되고 있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한 명문대 입학을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는 계속될 것이고 아이들의 죽음은 이어질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그의 출신학교가 그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면 이른바 '기러기 아빠'들과 조기유학 열풍은 더욱 일반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마처럼 얽힌 교육-대학입시 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3.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자!

전면적인 분배구조의 개혁만이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
무릇 명의(名醫)는 환자의 병이 어디서 기인하는가를 정확히 살펴서 그 원인을 제거한다. 즉, 명의는 병의 근원을 찾아 내어 가장 적절한 처방을 내리며 대증요법을 배격한다.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교육문제'의 해법을 찾는 길도 이와 동일하다고 할 것이다. 도대체 왜한국사회 전체가 대학입시라는 무한경쟁에 내몰려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있다. 대학입시에서 승리한 자들이 이 사회의 주류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부와 권력을 독점적 기회가 많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분배구조의 전면적인 개혁'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구성이다. 공장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손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생산참여자들에게 정당한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평가가 주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난마(亂麻)처럼 얽힌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근본적인 해법일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착한 후에야 공교육은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고,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안식과 평화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이들은 공화국 시민의 덕성을 배울 것이고 자신들이 가진 소질과 개성에 따른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당한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평가가 따르기 때문에, 명문대를 나와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또다시 분배구조의 전면적 개혁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필자가 주장한 바 있는 지대조세제-토지가치체-의 실질적 시행이다.
한국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강남 복부인들의 더러운 욕망과 암내나는 교양이 아니라 육체노동자들의 억센 근육과 정직한 땀방울이다. 한국사회의 희망은, 강남 복부인의 자녀들이 명문대를 입학한 후 짓는 음흉한 미소에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교육을 받으면서 행복해하는 웃음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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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1/22 [10:5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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