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학생들에게 강제로 일제고사를 보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잘렸다. 반면에 작년 5월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다 적발된 초등학교 교사는 3개월 정직 처분만 받았었다. 촌지 해외여행을 다녀온 교사들도 경징계만 받았었다.
성실의무, 복종의무, 품위유지 등 복잡한 기술적인 논점들이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강요하지 않은 죄로 잘렸다는 것이 맞다.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시험 보도록 해야 하는데, 몇 명의 이탈자가 생기도록 방조한 것이 화근이 됐다. 즉, 일제고사를 약간 흔들기만 했을 뿐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과 매우 배치된다. 학생을 성추행한 ‘죄’와, 시험을 강요하지 않은 ‘죄’ 중에 상식적으로 어떤 게 더 중한가? 일반적으론 전자가 더 나쁜 짓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체제에선 후자를 더 나쁜 짓이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성추행자에겐 교단에 설 것을 허락하지만, 시험을 흔든 자는 잘라버렸다.
성추행은 인간에 대한 범죄다. 이런 것은 한국 교육에서 중요하지 않다. 한국 교육은 인간다움과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시험흔들기’는 무얼까? 시험을 흔든 자는 왜 잘려야 할까? 여기에 한국교육, 한국사회의 심연이 있다.
- 화끈하게 밟아서 기강을 잡아라 - 성추행의 행위자와 피해자는 이렇다.
강자 -> 약자
그러므로 이것은 문제가 안 된다. 한국은 강자 중심 사회니까. 또 한국은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다. 성추행은 이런 구조이기도 하다.
남성 -> 여성 그러므로 성추행은 별것 아닌 일이다. 여성이 남성 관리자를 성추행했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남성 권력자가 ‘아랫것’들을 성추행하다가 재수 없게 걸린 것은 동정을 살 만한 일이다. 상명하복 구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약간의 일탈에 불과하다. 그런 정도 가지고 실업자로 만드는 건 야박하다.
멀쩡한 사람을 실업자로 만들려면 진짜 나쁜 짓을 했어야 한다. 일제고사 흔들기 사태의 구조는 이렇다.
약자 -> 강자 위에서 하달한 명령을 ‘아랫것’이 우습게 여긴 것이다. 이것은 기강의 문제다.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영’이 선다. 일제고사는 글자 그대로 ‘일제히’ 보는 시험이다. 이탈자가 생기면 ‘일제고사’가 아닌 ‘일부고사’가 된다. 이러면 안 된다. 일부고사가 되면 일제고사의 효과가 약화된다. 그러므로 초장에 확실히 군기를 잡아 향후 일사불란한 일제고사 시행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것은 사용자의 명령을 노동자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대충 넘어가면 규율이 무너진다. 또, 여기엔 전교조가 엮여 있다. 즉, 노조의 문제다. 노동과 노조를 확실히 휘어잡으려면 화끈하게 밟아놔야 한다. 가장 화끈하게 밟아주는 방법이 잘라버리는 것이다.
- 일제고사는 중요하다 - 일제고사라는 시험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흔들려선 안 된다. 이것은 국가질서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탈자가 있어선 안 된다.
여기는 민주공화국이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을 평등하다고 간주한다. 이러면 곤란하다. 어떻게 부잣집 자식과 가난뱅이 자식이 평등할 수 있나? 그러므로 모든 국민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일제고사를 봐야 한다.
일제히 시험을 치르게 해 경쟁을 시키면 모든 국민의 자식들에게 서열이 생긴다. 즉, 평등이 깨지는 것이다. 그 서열은 부잣집 자식과 가난뱅이 자식의 인생행로를 어렸을 때부터 달라지도록 만든다. 이 나라를 귀족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국가의 중대사를 감히 노조 노동자 따위가 흔들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천번 만번 잘려야 마땅하다.
일제고사를 통해 모든 국민이 부담하는 사교육비가 커져 사교육산업이 진흥된다. 그리하여 국민의 소득이 사교육 자본에게 이전된다. 일제고사를 자꾸 보면 시험공부에 치인 일반 국민의 자식들은 점점 바보가 되어 간다. 국민을 ‘가난한 바보’로 만들어 공고한 귀족사회를 건설하려는 야심찬 기획! 이래서 일제고사는 중요하다. 성추행? 비교할 바가 아니다.
촌지 교사 사건은 약자로부터 강자에게 돈이 이전된 사건이다. 그러므로 경징계만 받아도 된다. 어차피 국민의 호주머니로부터 돈이 빠져나간 일이다. 학원비로 쓰나, 등록금으로 쓰나, 촌지로 쓰나 결국엔 빠져나갈 돈이다. 별일 아니다.
반면에 일제고사 흔들기는 국민의 돈을 지키는 일이다. 교육현장에서 일제고사가 우스운 꼴이 되면, 사람들이 일제고사 대비 사교육에 돈을 안 쓸 것 아닌가? 이러면 안 된다. 국민은 돈을 써야 한다.
왜 돈을 써야 하냐고? 모든 국민이 최선을 다해 사교육비를 쓰면서 시험을 봐야, 사교육비 순서대로 서열이 갈려, 부잣집 자식이 귀족이 될 것 아닌가. 돈을 펑펑 쓰도록 해야 한다.
전교조 교사 몇 명이 잘린 것에 불과한 사태가 아니다. 이번 징계는 모든 노동자, 노조에 대한 공격이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우습게 자르는 문화에서 노동자는 결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또, 일제고사는 전 국민의 아이들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지금은 교사 몇 명이 당했지만 결국 모든 국민의 목젖에 창끝이 닿을 것이다. 범국민, 범노동의 차원에서 잘린 교사와 연대해야 한다.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