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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의 유산, 노무현과 ‘비판적 지지론’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와 굴원의 '어부사'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정효동   기사입력  2006/06/14 [22:24]
1. 우물 안 개구리
 
『莊子』「外篇」인 「秋水」에서 장자는 ‘우물 안 개구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물에 갇혀있는 개구리가 하늘을 쳐다본다. 우물의 입구가 동그랗게 생겼다면 이 개구리는 하늘이 동그랗게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우물의 입구가 네모져있다면 이 개구리는 하늘이 네모난 모양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동그라미의 세계관 또는 네모의 세계관의 의존해서 살아가기가 쉽다. 하늘이 그저 조그마한 동그라미나 네모로 보이는 까닭은 따지고 보면 ‘내’가 동그라미의 우물 속에 또는 네모의 우물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가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세상이 동그랗다거나 또는 네모나다는 생각이 혹시나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품어보는 것이다. 일단 이 의문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동그랗거나 네모난 자기의 우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개구리는 자신의 우물을 탈출하기가 힘이 든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개구리의 뜀뛰기는 계속해서 시도되어야 한다. ‘내’가 과연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끊임없이 뜀뛰기를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알고 보면 이는 다름이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들어놓은 우물과 자기 스스로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개구리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우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자기 스스로가 굳건하게 믿어온 동그랗거나 네모난 우물이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이 개구리는 이제까지 우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해온 자신의 생각을 걷어내고 이 우물을 반성적인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우물에 폭우가 사정없이 내리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 우물의 수위가 갑자기 팍 높아지게 된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 우물의 세계가 최초로 붕괴되면서 이 우물 속의 ‘나’는 비로소 한 단계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난 뒤에 아직은 새로운 자기의 세계가 출현하지 않은 혼란스러운 ‘나’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이제 또 다시 ‘내’ 뜀뛰기의 운동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나’에게로 제대로 되돌아간 자기복귀 또는 자기회복의 단계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개구리는 다시 한 번 힘차게 뜀뛰기를 하게 된다.
 
우물의 수위가 높아진 덕분으로 이 개구리는 드디어 우물 밖으로 뜀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마침내 우물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자기 앞에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우물 밖으로 나와 보니 평소에 우물 안에서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하늘과는 너무도 다른 광활한 하늘이 자기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지게 된 것이다. 하늘이 조그만 동그라미나 네모가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이 개구리는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에 놀라서 자기 자신의 무릎을 탁하고 치게 된다. 사실 자기 무릎을 쳤다는 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자기 스스로가 두들겼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때부터 이 개구리의 마음은 자신이 새롭게 보게 된 세계를 따라서 자기 스스로가 자기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로 무한하게 드넓어지게 된다.
 
사실 우물 안에 갇혀있던 개구리와 우물 밖으로 탈출한 개구리는 동일한 개구리일 뿐이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이는 둘이 아닌 다만 하나의 개구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우물 밖의 개구리는 이미 전혀 다른 개구리이다. 이미 같은 개구리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왜 다른지 또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道德的 主觀主義’의 개구리라면, 우물을 탈출한 개구리야말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된 개구리라고 생각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또는 如實하게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동그랗거나 네모난 하늘과 다른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동그랗거나 네모난 하늘은 이제 사실이 아닌 당위로 격상된다. 따라서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그려놓은 조그만 하늘의 모습만을 서서히 당위론적으로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개구리는 동그랗거나 네모난 모습을 지니지 않은 하늘을 부인하고 거부하고 배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적 당위의 관점을 주관적으로 주장하고 강요하게 되는 것은 자기반성의 불철저함에서 기인한다.
 
반드시 무엇 무엇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주장하고 강요하는 관점은 타자를 배제한다. 타자를 자기 자신이 지닌 틀에 꿰어 맞추는 것이 도덕적 주관주의의 폐해이다. 결국 하늘이 그저 조그만 동그라미이거나 네모일 뿐이라는 자기 생각이 항상 문제적으로 되는 것이다. 도덕적 주관주의의 우물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자각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물 밖으로 뛰쳐나온 개구리는 이제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세계를 생각하는 일이 대단히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된다. 비로소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세계가 똑바로 보이기 시작하는 까닭은 ‘내’가 ‘내’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당위가 아닌 사실의 관점에서 읽혀지기 시작한다. 당위론적인 관점에서 왜곡되었던 세계가 이제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세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때부터 ‘나’는 ‘내’게 주어진 세계라는 환경과 무모순적인 합일로 나아가게 된다. 세계에 대한 미리 전제된 그 어떤 선입견도 배제되며, ‘나’는 다만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나’와 세계를 합일시켜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나’를 지속적으로 반성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나’는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우물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해서 얻게 된 ‘나’의 활발한 생명현상인 것이다.
 
우물 속에 갇혀있는 도덕적 주관주의는 완고하게 자기 자신만을 자기 자신에게 주장하고 나아가서 이처럼 주관화된 자신의 도덕적 자아를 타자에게 끝없이 고집하고 강요하는 정신분열증적 자아로부터 비롯된다. 이처럼 우물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말하는’ 자아는, 자신의 주관적인 우물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해서 비로소 타자의 이야기를 주의하구 집중해서 ‘들을 줄 아는’ 자아로 거듭나게 된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 내면의 정신분열로 인하여 타자와 대립하고 갈등하고 분열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 관건은 ‘내’ 자아가 지닌 모순을 스스로 치유해내는 일이다. 이러한 자기 치유는 타자와 공동체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며, 타자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 장점이 있으면 따라 배울 수 있게 되며, 타자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 단점이 있으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나’는 ‘내’ 고유한 삶과 ‘내’가 소속한 공동체에서의 삶이 무모순적인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드디어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서 ‘나’를 제대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우물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면 세상이 비로소 똑바로 보이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알고 보면 ‘내’가 똑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우물 안에 있던 때와 ‘내’가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이후의 세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내’가 우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세상이 탈바꿈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세상은 ‘내’가 우물 속에 갇혀있을 때나 ‘내’가 우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나 ‘如實’한 상태로 있었다. 세상이 달라 보이는 까닭은 바로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보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이 달라져서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져서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내’ 앞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항상 끊임없이 변화해가면서 언제나 一時的인 유동상태에 놓여 있는, 생명활동을 해나가고 있는 자연스럽고 유연한 主體의 발견인 것이다. 이 진정한 주체의 발견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生生한 변혁의 과정을 끊임없이 또 지속적으로 겪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다만 먼저 ‘나’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일 뿐인 것이다.
 
2. 屈原과 假漁翁
 
‘국민의 정부’ 말기에 이미 우리 민중들은 87년 체제를 버리고 떠날 마음을 지닌 적이 있다. 87년 체제를 생각하면 영화 ‘동방불패’가 떠오른다. 민중 이연걸은 강호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면서 이제 87년 체제를 버릴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 당시 우리 민중은 ‘국민의 정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진보 진영 일부에서 꽃피운 ‘국민의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심각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바로 이 대목이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진 최초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보면, 민주노동당은 이 ‘비판적 지지론’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 나아가서는 87년 체제에 대한 심각한 반감으로 그 시작을 알렸던 셈이다. 이 사실은 민주노동당의 前史와 관련해서 대단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 당시에 나는 ‘새정치 국민회의’의 태생적 한계에 관한 얘기들을 부지런히 떠들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까운 지인들과 계급정당의 필연적 대두와 성장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뜻밖에 돌출적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에 따라서 곧바로 또 다른 형식의 ‘비판적 지지론’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 내 지인들은 격론을 거치면서 각각 제 나름의 입장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87년 체제의 재생을 꿈꾸는 이처럼 변형된 ‘비판적 지지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는 그때 87년 체제가 더 이상 리모델링이 될 수 없다는 쪽으로 내 입장을 정리해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노무현을 통해서 87년 체제의 리모델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의 핵심은 87년을 어떻게 성격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나는 87년을 부르주아 시민혁명으로 그 성격 규정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역사는 87년 체제를 궁극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결국 87년 체제는 돌파되어야 하는 것이며, 보다 더 발전된 형태로 止揚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던 셈이다. 결국 ‘止揚’이 가지는 ‘들어 올려지고’ ‘없애 가져지다’는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내 지인들의 대부분이 지니는 상황 인식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87년 체제를 역사의 궁극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는 측면이 아주 강했다. 심지어 그들은 ‘未完의 혁명’이라는 修辭를 동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는 보충하구 채워넣어서 마저 완성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개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능성을 노무현에게서 찾는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입장들과 나의 입장이 엇갈리는 부분이 그 당시에는 비교적 선명하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87년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은 내가 보기에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과 당위의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87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당위의 범주 속으로 우겨넣어 파악함으로써 이미 그 자체로 그들은 87년을 그들의 주관적인 편견을 따라서 심하게 왜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87년을 다만 ‘있는 그대로의’ ‘如實한’ 사실로서만 보고자 하는 것이 그들과는 다른 내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87년에 관하여, 우물 밖에서 사실에 입각한 과학적 견해를 제출하는 일이 차단된 분위기가 보다 일반화되어 갔으며, 이제 87년은 우물 속에서 도덕적 주관주의에 따라서 해석되는 비과학적인 협잡이 하나의 시대의 유행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비로소 이러한 입장의 엇갈림은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입장의 엇갈림에 관한 대목이 바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길이 선명하게 엇갈리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면, 노무현이 등장하던 시기에 이미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의 엇갈림은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그동안의 과정은 이 엇갈림이 보다 더 선명해진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문제는 87년 체제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와 결부되고 있다.
 
그러니까 민주노동당은 87년 체제 ‘이후’를 위해서 태어난 정당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 있어서 민주노동당은 87년 체제를 폭파시키기 위한 성격을 지니는 정당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87년 체제의 바깥을 끊임없이 탐색하면서 87년 체제를 빠져나오는 일을 그 자신의 자연스러운 소명으로 삼고 있다. 그 반면에, 열린우리당 쪽으로 돌아선 개량된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에 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87년 체제가 포기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어디까지나 87년 체제의 내부에서 그들의 생각을 멈춰버리고 말게 된다. 사실이 당위로 격상하는 비과학적인 협잡의 불건강한 토대는 이렇게 해서 마련된 것이다.
 
‘동방불패’ 노무현이 민중 이연걸과 만나는 첫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대단히 낭만적인 관계설정이 이루어진다. 술이 있고 풍류가 있는 멋스러운 만남으로 동방불패라는 노무현의 영화는 시작된다. 동방불패 노무현이 규화보전을 손에 넣은 것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다고 보자. 아! 아! 그러나 이 일을 어찌 하리! 규화보전의 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개혁의 투박하고 호탕한 남성성을 거세해야만 한다는 것을! 청와대라는 대리석 건물이 노무현을 갈수록 아리따운 여자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아리따움에 반한 협잡꾼들이 十方에서 모여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미 여자이며, 그것도 팜므 파탈이다. 그는 87년 체제를 마지막으로 말아먹을 구시대의 막차임에는 틀림이 없다. 87년의 ‘영웅적인’ 명망가들은 레떼의 강을 건너면서 이제 ‘在野’의 야만성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이제 충분히 병든 중원의 문명 속으로 들어가 지나치게 문명화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의 배신은 이제 그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동방불패에게 있어서 민중 이연걸은 없다. 다만 한나라당을 이연걸이라고 우길 뿐이다.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사랑에 빠진다. 한나라당과 연정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악의 꽃’이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그 연정 때문에 노무현은 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된다. 규화보전을 손에 넣었건만 묘족의 중원정벌은 끝끝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사랑하니까’를 외치면서 동방불패의 아름다움에 반한 지지자들이 하나 둘 씩 벌떼처럼 몰려들었지만 이미 팜므 파탈이라는 노무현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미 그는 ‘개혁’을 거세해버림으로 인해서 강호의 패자 자리를 서서히 포기해온 것이다. 민중의 거문고는 이것이 바로 강호의 비정함이라고 노래를 한다.
 
노무현의 문제 그리고 그의 환경을 이루는 사람들의 문제와 더불어 ‘비판적 지지론’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문제적으로 되는 대목을 지적한다면, 바로 87년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명확한 입장 정리를 결여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문제를 찾을 수가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87년 체제를 깨뜨린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 87년 체제가 역사 발전의 궁극적인 형식으로 간주되는 한,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87년 체제의 유지와 보수에 그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진보와 보수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관점 또는 퍼스펙티브의 문제가 중요하다.
 
87년 체제의 내부에서 사고한다면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는 없다. 87년 체제의 바깥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87년 체제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향후 이 땅에서 진보와 보수를 규정하는 기준은 다름이 아니라, 87년 체제의 폐기선언이 있다면 이는 진보일 것이며, 87년 체제의 폐기선언을 거부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보수의 우물에 갇힐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묘족의 중원정벌을 동방불패가 꿈꾸었지만 실패한다. 그렇다면 묘족은 87년 체제의 방어자이자 수호자 정도로 규정될 수가 있겠다. 묘족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중국의 楚나라이다. 항우와 유방의 ‘楚漢戰’에 등장하는 초패왕의 나라는 훨씬 후대의 일이다. 춘추전국시대의 楚나라가 바로 묘족의 나라이다. 그 초나라의 유행가가 바로 ‘楚辭’이다. 이 ‘초사’라는 문학 장르를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屈原’이라고 보는 것이 통설적인 입장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굴원의 ‘漁父辭’를 통해서 굴원의 정신세계를 한 번 엿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곧 87년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 보수적 新 기득권 계급인 ‘위장 개혁론자’들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는 지난날 ‘비판적 지지론자’들의 정신세계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굴원의 ‘어부사’를 읽는 일은, 87년 체제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심어준 다분히 ‘일반적인’ 생각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굴원이 권력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배제되어가는 심정을 읊조린다. 굴원의 얼굴은 초췌하고 몸은 바짝 마른 상태이다. 그러자 어느 이름 모를 어부(假漁翁)가 굴원에게 그처럼 권력의 핵심에 놓여있던 三閭大夫 굴원이 어쩌다가 이렇게 초라한 몰골이 되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굴원이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 깨어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내가 세상으로부터 쫓겨난 것이다.” 여기에서 굴원은 여전히 자신이 만든 우물을 완고하게 지켜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는 여전히 外物만을 문제 삼고 있을 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문제 삼는 일에는 전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이 정도면 굴원은 거의 老醜의 단계까지 와있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이 어느 이름 모를 어부는 굴원의 문제점을 차분하게 지적해준다. “聖人은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능히 세상의 변화와 함께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흐리면 어찌해서 그 진탕을 휘저어서 물결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들이 다 취했으면 어찌하여 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쫓겨날 짓을 하였는가?”
 
그러나 굴원의 답변을 들어보면, 이 어부의 말에 대한 굴원의 이해도가 대단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역시 굴원은 자기의 우물을 끊임없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자기 스스로를 한계지울 뿐, 앞서의 언급에서처럼 ‘들을 줄 아는’ 자아를 지니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고 한다. 어찌 깨끗한 몸으로 능히 더러운 물건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상강의 흐름에 나아가 강물 속 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는 일을 당할지언정, 어찌 희디흰 淸白함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것인가?” 이쯤 되면 굴원의 자아는 거의 ‘로빈슨 크루소’의 자아이다. 끊임없이 자기 呪術的인 독백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 타자와 더불어 대화하는 화술을 굴원은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泰山은 태산이 아니다. 그저 잠시 쉬어가는 ‘김민기’의 작은 고갯마루 ‘봉우리’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태산이 태산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 까닭은 태산이 대평원에 ‘나 홀로’ 우뚝 선 산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고갯마루인 태산이 태산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태산은 山脈을 형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산이 다른 산과 함께 어깨동무하는 산이 되어버리면 더 이상 ‘영웅적인’ 태산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산은 바다와 같은 대평원 속에서 무인도처럼 갇힐 때라야만 비로소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태산의 쓸쓸한 권위를 내세울 수가 있을 따름이다.
 
자기 우물에 집착하지 않는 이 이름 모를 어부는 우물 안 개구리인 굴원의 이러한 자기 독백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어부는 굴원을 떠나가면서 노를 두드리며 여유 있게 노래를 한다. “창랑의 물이 맑구나. 가히 내 갓끈을 씻으리로다. 창랑의 물이 흐리구나. 가히 내 발을 씻으리로다.” 어부가 더 이상 더불어 말하지 않고 떠나간 까닭 또한 중요하다. 어부는 굴원의 우물을 존중해주는 방식으로 굴원을 존중해준 것이다. 어부가 굴원에 대한 계몽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은 것 또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어부가 굴원을 계속해서 계몽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는 어부가 굴원을 닮아버리는 일로 된다. 즉 굴원을 계몽하겠다는 생각은 어부 자신의 우물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부가 자신의 우물을 굴원에게 강요하게 된다면 이는 굴원과 동일한 방식의 오류 속으로 어부 스스로가 빠져드는 일로 되고 마는 것이다. 대화를 거부하고 독백만을 하겠다는 굴원에게 이 어부는 적절하게 대처한다. 어부는 굴원이 그저 그렇게 독백만을 계속하도록 그냥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굴원은 어부의 外物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굴원이라는 ‘창랑’을 어부 스스로가 거스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굴원을 통해서 우리는 묘족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가 있다. 나아가서 우리는 87년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만 하면 된다는 87년 체제의 방어자 또는 수호자들의 심리상태가 굴원의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쫓겨나서 자신의 몰골이 초췌하게 된 굴원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그리고 그 원인 진단에 있어서 굴원이 채택하는 방법론적 전략은 我와 物을 二分論的으로 분리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 속에서, 우물 속 개구리인 我는 절대적으로 긍정되고 있으며, 자신이 지닌 우물의 틀에 부합하지 않는 物은 절대적으로 부정된다. 여기에는 物의 부정을 我의 긍정으로 교환하는 選民意識이 어김없이 개입되고 있다. ‘너’의 ‘그릇됨’을 選民인 ‘나’의 ‘참됨’으로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굴원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의 ‘참됨’은 반드시 ‘너’의 ‘그릇됨’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참됨’은 ‘너’의 ‘그릇됨’과 ‘관계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지, ‘나’ 스스로 규정해나가는 자기 ‘참됨’의 콘텐츠가 여기에서는 도대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宿主로 해서 기생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넓게 본다면, 이는 87년 부르주아 혁명이 만들어낸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가지는 근본적인 자기모순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아직까지는 자기 자신을 어렴풋하게 의식만 하고 있을 뿐인 계급이며, 철저한 자기 인식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계급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칸트는 “이래서 자기의식은 도저히 자기인식이 아니다.”라고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했던 것이다.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되었다.” 라고 말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세계관이 통용될 수 있었던 87년 체제의 화석화된 모순과 갈등들이 이제 메두사의 머리를 쳐들고 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2006년의 현 정국을 ‘도덕적 주관주의의 궤멸’로 정리를 해내고 있다. 문제적으로 되는 것은 여전히 87년 체제에 대해서 가지는 우리의 관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의식이 바로 굴원의 의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漁父辭』에서 이 어느 이름 모를 어부는 87년 체제를 훌륭하게 극복해내고 있다. 그것은 87년 체제가 잉태한 ‘도덕적 주관주의’의 우물 바깥으로 나아가 87년 체제의 파국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87년 체제에 구속되지 않고 보다 더 진전된 자세로 세상의 변화된 흐름을 읽어내고 그 흐름과 함께 할 필요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흐리다면 어찌해서 그 진탕을 휘저어서 물결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체제 변혁을 꿈꾸지 아니 하는가 라는 이 어부의 문제제기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취해 있으면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이 민중의 마음을 읽고 민중과 함께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굴원처럼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한다면 민중과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그 모든 정치세력은 그것으로 곧 자신의 생명력을 다하게 되기 마련이다. 
 
어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노를 두드리며 노래를 한다. 민중이 맑구나. ‘내’ 머리로 그 맑은 민중을 따라가리라. 민중의 마음이 뒤틀려있다면 ‘나’는 이제 ‘내’ 몸으로 그 민중을 따라가리라. 이제 이 어부는 다시는 87년 체제의 수호자 또는 방어자들과는 얘기를 나누지 않게 된다. 이 어부는 그저 말없이 묵묵하게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성격이 보다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는 87년 체제가 황혼녘에 이르게 된 오늘의 시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금 87년 체제의 弔鐘을 경고하고 있다. 해답은 87년 체제의 바깥에서 찾아져야 한다. 87년 체제의 내부에서 해답을 찾는다면 어김없이 오답처리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87년 체제가 그려주는 동그랗거나 네모난 하늘만을 하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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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6/14 [22: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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