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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에서 2002년, 열린우리당의 형성과 붕괴론
'87년 체제' 이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형성에 관한 정치적 고찰
 
정효동   기사입력  2006/05/19 [23:59]
열린우리당에 관한 이 문건은 2004년 총선 직후의 여름에 구상되어 그 해 겨울부터 그 다음해 초까지 가까운 사람들과 많은 토론을 거친 다음에 작성된다. 이 문건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다. 이 문건은 87년 패러다임의 종식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가서야 비로소 현실 설명력을 갖기 시작하는 문건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뒤늦은 시기인 2006년 늦봄에 나는 이 문건을 '대자보'에 기고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문건이 아닌 2006년 현재에 관한 나 자신의 치열한 사고의 결과물이며, 이를 통해서 나는 현실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이론가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은 게오르그 루카치가 1962년에 작성한 "소설의 이론" '서문'의 틀을 거의 모방에 가깝도록 그대로 옮겨와서 작성한 것이다. 만약 이 글이 루카치를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미리 밝혀둔다.-필자 주.

이 문건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87년 부르조아 시민혁명과 그에 따른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쟁취를 전후한 제반 사회적 분위기가 당시 민주화 항쟁을 지지했고 견인했던 이른바 운동권 명망가 계층에 끼쳤던 불가피한 영향에 대한 주목에서 비롯하였다. 당시 나는 제도권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특히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영웅적인 제도권 정치인들에 대한 열광적인 태도에 대해서 격렬하고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당시 나의 마음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이러한 전면적 거부의 태도는 처음에는 명확하게 표현되지 못하였다.
 
지금도 나는 1990년 겨울 어느 술집에서 내 동지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들이 나눈 대화의 중심에 선 인물은 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인 이 아무개이었다. 지금은 동지라고 말하기에는 어색하게 되어버린 그 당시의 내 동지들이 나에게 이 아무개의 구체적인 영웅적 행동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이 아무개를 거부하는 나의 태도를 반박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나는 "영웅적 행동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더욱 더 나쁘다"라고 대답했을 따름이다. 당시의 이같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심정적이던 나의 태도를 보다 분명히 의식하고자 했을 때 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삼김씨로 대표되던 제도권 정치인들은 아마도 신군부의 해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군부독재 체제 하에서 기생해오던 친일숭미 낡은 기득권 세력은 틀림없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리고 낡은 기득권 세력의 귀족적 특권에 대해 이른바 제도권 민주화 세력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도 다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세계적인 반공주의자 이승만이나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격하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서 이 점에 대해서도 역시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의 문제가 생기는데, 그 문제란 과연 누가 우리를 부르조아 국가의 법철학적 질서로부터 구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의 '비판적 지지'가 김대중의 궁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전망은 생각만 해도 나에게는 끔찍스럽게 느껴졌다. 그도 이승만 정권 당시에 친일의 경력이 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와는 다른 생각을 내가 가질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문건의 첫 구상은 다분히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87년 이후에 전개된 지역분할의 정치구도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이 문건으로 가다듬어진 것이다. 2004년 당시 이 문건을 내어놓지 않은 것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다. 탄핵정국의 여파는 흡사 흑사병처럼 퍼져있었다. 노무현이라는 영웅적 개인에 대한 숭배의 분위기는 이 문건의 설득력을 대단히 떨어뜨릴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나는 광적인 영웅숭배의 분위기로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떨어져나오게 되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위장개혁에 대한 병적 열광으로부터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자기 본래의 이해를 위한 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이 문건은 드디어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제 지역분할의 정치구도는 이 문건에서 제시되고 있는 보혁대결의 정치구도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이 필요한 시기에 이 문건은 그 전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건은 87년 체제의 성과물들을 독점적으로 장악한 영웅적 시민계급이 세계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절망이라는 분위기 속에 젖어드는 분위기에서 작성된 것이다. 2004년 비로소 나는 이때까지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었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급조된 내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열린우리당의 그 자체만을 순수하게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거의 20년이 지난 87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열린우리당이 급조된 분위기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 작업이라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이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열린우리당의 올바른 사용가치적 이해에 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내가 취했던 아직은 여물지 못한 '비판적 지지'에 대한 거부태도와, 그리고 이와 결부된 당시 시민사회에 대한 거부가 순전히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가장 추상적인 사고의 차원에서조차도 나의 주관적인 입장과 객관적인 현실을 연결시키는 매개과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점은 방법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즉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당시 나의 세계관, 나의 학문적 작업을 전개하는 방법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칸트에서 헤겔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었지만 이른바 정신과학적 방법에 대한 나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신과학적 방법에 대한 나의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내 고향 안동에서 받았던 어린 시절의 유학적 세계관의 인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당시 나의 '비판적 지지'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은 충분히 마르크스주의적이지 못한 당시의 내 정신과학적인 여러 경향의 혼재에서 나온 전형적인 산물이다. 실제로 당시 나의 이론 공부는 좌우의 다양한 경향들을 끊임없이 넘나들고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정신과학적 방법이 갖는 한계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몰락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우파적 실증주의가 갖는 역사적 배면을 들추어내면서, 또는 논리학이나 미학 등과 같은 지적 분야가 보여주고 있는 탈역사적 평면성에 비해, 정신과학은 비록 많은 한계를 지니지만 '역사'를 여전히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노력조차 포기해버리지 않았음을 인정해줄 수는 있다. 여전히 소설가들이나 시인들이 문화 생산자로서의 위세를 위협받고 있지 않았고 이들 중 일부는 80년대의 시대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운동권 엘리트들의 부르조아 명망가로의 성장에는 하나의 중요한 지적 세례가 있기도 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에 관한 지침으로서 속류 유물론을 열심히 학습하기도 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는 당시의 우리들에겐 이론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도 광범위한 종합이 시도되고 있는 하나의 사유체계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이 새로운 방법이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보수적인 종교적 외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직은 충분히 과학적이지 못한 종교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은 객관적으로 그 근거를 결여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에 운동권 엘리트들이 학습한 이론들은 아직도 여전히 정신과학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재능 있는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정신과학적 방법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었다. 이미 환멸의 90년대가 이들의 주도 아래에서 성급하게 열리고 있었다. 이 정신과학적 방법은 나중에 몇몇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견실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는데 당시의 젊은 연령층에 있었던 우리들은 미처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 경향이나 한 시대와 같은 몇 개 되지도 않는, 그것도 대부분 직관적으로 파악된 특징으로부터 일반적인 종합 개념을 만들어 내어서는, 이러한 일반화로부터 연역적으로 개별적 현상에 접근하여 설득력 있는 하나의 포괄적인 종합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에는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 하였다.
 
이른바 '포스트'주의의 망령들이 세계가 정지해버린 것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 '책상의 춤'을 추면서 한가로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후반의 경제 위기와 이러한 이론적 경향성들의 상관관계를 반성하는 작업은 여전히 여러가지 동기에 의해서 차단되어져 있다. 이를테면 90년대 이후 서구에서 수입된 제 이론들은 87년 체제의 유지에만 종사하고 싶어했을 뿐, 87년 체제를 뛰어넘는 전망의 제출 자체를 죄악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하나의 스스럼없는 운명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와 열린우리당의 등장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새로운' 기득권 계급의 성장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다. 이를테면 낡은 도둑을 몰아내고 새로운 도둑이 등장하는, 그래서 '질적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정치적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신 기득권 계급은 90년대에 유행한 정신과학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종교적으로 활용한다.
 
이들에게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우선하여 '내가 무엇을 선호하는가'가 문제로 된다. '내가 무엇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생각하는가'에 우선하여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는 싫어한다고 생각하는가'가 집중적으로 문제가 된다. 항상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지극히 단순한 양자택일적 사고가 하나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호오(好惡)의 '취미판단'은 정치를 하나의 취미생활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90년대의 이론적 경향성들이 내려준 집중적인 세례가 2000년대의 구체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고 있는 '돈키호테'들의 몇몇 관점을 충분히 해명해낼 수 있게 된다. 이들은 90년대 이 땅의 외국이론 수입상들이 길러낸 사생아들인 셈이다. 이론가로서의 삶은 충분히 반성적이어야 한다. 이론가로서의 삶이 기계적인 것으로 되는 경우에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다. 따지고 보면,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과 한나라당 지지율의 고공비행에도 90년대 이래 이 땅의 이론수입상들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정한 부분의 범죄행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유너머'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수레바퀴 밑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90년대의 정신과학적 방법론은 그 조악함에도 아랑곳없이 그 자신이 갖는 미학적 호오(好惡)의 취미판단이 갖는 말(언어)의 풍부함으로 인해 이제는 그 역사철학적 특수성을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너무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90년대의 이론적 상황이 낳은 사생아들인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지치지 않고 그 스스로를 전개해나가는 정치적 소설 쓰기의 논리학을 세심하게 지켜본다면, 이들이 지닌 방법은 다만 이들이 일종의 개념이라는 외투를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킴으로써 현실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시키고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소설 쓰기의 유형은 다양할지라도 그 방법론은 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러한 정신과학적 방법론은 90년대를 관통해오던 오래된 인습이다. 그러나 2006년 현재에도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에필로그는 실제로는 87년 체제를 순전히 이념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사실상의 결론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이 에필로그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몇몇 영웅적인 인물들의 발전을 통해서 열린우리당의 붕괴를 암시해주고 있으며, 그 이후에 전개될 그 어떤 상황에 대한 그 나름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징후가 배태되고 있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을 급조한 부르조아 명망가 당사자들은 지지자들의 '감정교육'에 나타난 도식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정작 열린우리당이라는 작품에서 기껏해야 '모든 열정이 식어버리고 난 후의 착 가라앉은 아기방의 분위기'라든가 '문제적인 환멸스런 정치적 소설 쓰기의 종말보다 더 절망적인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어느 특정한 국면에 나타난 열린우리당이 갖는 이러한 분위기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보혁대결의 진영논리가 제출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혁대결의 진영논리에 숨겨진 배면을 들추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 객관적 필연성이 논증될 수 있어야 한다. 종교적인 믿음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게는 그들이 갖는 자의적인 '종합적' 방법에 의해 너무 나르시시즘적으로 왜곡되어 해석되고 있는 '이상적인' 열린우리당의 현실적인 해체가 그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정신과학적 방법이 지니는 이러한 추상적 종합의 한계를 올바르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앞에서 말한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견강부회적인 면은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열린우리당을 급조한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여러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으로 나아가는 길이 원칙적으로 봉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다루고 있는 지지자들에 대한 '감정교육'에서의 시간(역사)이 하는 역할에 관한 분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열린우리당에서는 구체적인 민중의 삶에 대한 분석의 결과가 곧바로 여전히 신빙성이 없는 추상으로 떠오르고 만다.
 
열린우리당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열린우리당의 주관적인 소설 쓰기가 갖는 시간적 문제의 발견은 기껏해야 '감정교육'의 후반부에서만 객관적으로 된다. 열린우리당의 위장개혁이 완전히 실패하고 난 이후의 세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도 열린우리당이 그 나름대로 해나가는 타당한 현실분석은 여전히 추상적이다. 하지만 새롭게 제출되고 있는 시간의 주인은 현대 소설을 쓴다. 87년이 아닌 2006년의 소설 쓰기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시간이 지속된 꼭 그만큼 자신의 시간은 고갈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87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의 구체적인 제출과 함께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 변화는 87년 체제의 단순한 양적 반복이 아닌 괄목할만한 질적인 전환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열린우리당은 87년 체제의 종교적 정신과학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하나의 전형적인 부르조아 명망가 정당이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은 지지자들을 '감정교육'에 의해서 끌여들여야만 하는, 낡은 정신과학이 갖는 방법론적 한계를 전혀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린우리당이 갖게 된 그동안의 정치적 성공은 단지 우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정신과학의 영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이 부르조아 명망가 정당은 이상에서 말한 그 제한적 성격 안에서는 훗날의 발전과정에서 그 중요성이 드러나게 될 몇 가지의 특징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자본론'의 '절제설'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는 대목이지만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보다 더 인습화된 '반공'의 정신과학적 방법을 강인하게 고집하고 있는 우리보다도 나이가 많은 연령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를 그들의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공'의 정신과학적 방법을 극복하려는 노력에도 '반공'의 정신과학적 방법은 그대로 복제되고 있다. 그들의 노력은 대부분의 경우에 비합리주의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면은 열린우리당과 심지어는 민주노동당에서조차도 여전히 보여진다. 내가 알기로는 김대중의 새정치 국민회의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이러한 복제의 결과가 호오(好惡)의 취미판단이라는 미학적 문제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하나의 정신과학적 사례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87년 체제의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열린우리당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미학적 범주의 역사화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87년 체제가 파괴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여전히 유지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 놓여진 심연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87년 체제를 역사발전의 궁극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면서 87년 체제의 내부로 들어가 그것의 유지와 보수를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87년 체제를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나타난 특수한 형식으로 파악하면서 87년 체제의 외부로 나아가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역사적인 과학적 가치와 영원한 종교적인 가치의 실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방법론적 심연을 벌여놓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론적 심연이 보혁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 것이다. 정작 열린우리당 자신은 이러한 대립을 그렇게 넓게 벌여놓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87년 체제를 파악하는 방법론에 관한 그들의 기본적인 보수적 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의 방법론은 일단 87년 체제의 그 모든 성과물들을 초역사적으로 설정해놓고 난 후 이를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여러 변형 속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방식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이러한 방법론은 때때로 '반'한나라당 또는 '반'조선일보 등등에 관한 호오(好惡)의 개별적인 미학적 분석에서 성공을 거두어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를테면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인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을 찾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네 편'을 배제하고 '내 편'을 껴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악마화되고 또 모든 것이 자기정당화가 되는 철학적 보수주의가 갖는 세계관적 기초는, 정신사적으로 보면 이승만, 박정희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또 이로써 정신(그나마의 '정신')의 변증법적 진화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정신과학의 제반 영역을 대표했던 당시의 주도적인 영웅적 인물들인 삼김씨의 역사적, 정치적인 면에서의 보수적 입장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 흐름 속에서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는 돌연 '역사적 상대주의'를 피력한다.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을 자신들이 지닌 역사적 상대주의로 환원하여 정신과학적 제 경향 속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몰락'이라는 그들의 표면적인 구호 속에서 모든 범주를 철저하게 역사화 시키면서 87년 체제를 미학적, 윤리적 면에서는 물론 논리적인 면에서도 일체의 초역사적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이로 인해 통일적인 역사 발전 과정까지도 지양시키고 있는데, 왜냐하면 한나라당을 거꾸러뜨려야겠다는 열린우리당의 극단적인 역사적인 다이나미즘은 종국적으로 정태주의로 변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역사 그 자체의 지양으로까지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몰락'이라는 표면적인 호소에서 보여지는 역사적 다이나미즘은, 내적으로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민주노동당과의 관계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것이 완결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억지 주장을 하다가 또다시 한나라당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새로운 시작을 거듭하는 일종의 순환운동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로써 생겨나는 것은 이승만, 박정희 방식의 역사주의와 대비를 이루면서 이승만, 박정희의 정신적 유산을 활용하는 하나의 분리주의적 성향인 것이다.
 
나는 열린우리당이 지지자들을 조련해나가는 '감정교육'이 지니는 미학적 범주의 본질과 그 종교적 형식의 본질에 바탕하여, 또 그것들에 역사적으로 근거가 주어진 변증법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또 이러한 범주들의 긴밀성과 역사의 내적 연관성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변증법을 바탕으로 해서 변화 속에서도 지속하는 면, 다시 말해 본질의 지속적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변화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의 방법론은 매우 중요한 상관관계를 밝히는 면에 이르자,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제 현실로부터 유리됨으로써 매우 추상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방법론은 결과적으로, 너무나 자주 자의적인 건축적 구성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론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 것은 87년으로부터 15년이 지난 뒤, 그러니까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면서 마르크스적인 입장에서 87년 체제의 미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때이다. 내가 80년대에 유행했던 스탈린 시대의 속류적 사회학에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저서에서 '책상과 펜대의 춤'이 횡행하는 미학적 시대에 관해 말한 부분을 찾아내어서는 이를 계속 발전시키고자 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역사적, 체계적 방법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그 구상과 그 구상의 실행이라는 면에서 보면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일종의 실험적 정당의 수준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근본 의도의 입장에서 보면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올바른 해결의 방향을 향해 보다 접근해가고 있는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와 관련되는 정치적 미학화의 제 문제는 역시 87년의 유산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철학적으로 보면 열린우리당의 '감정교육'에 의한 미학적 발전은 지금까지 열린우리당이 걸어온 길을 규정하고 있는 미학적 제 원칙의 지양이라는 면과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은 열린우리당 스스로를 소멸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러한 면 때문에 항상 민주노동당이 문제적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즉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가 미학적인 좋음(好)으로 표현되어왔듯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반대 또한 미학적인 싫음(惡)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역사철학적 상황, 곧 87년 체제가 그 철학적 사고와 사회적, 국가적 실천 속에서 이미 열린우리당이 지닌 정신과학적 방법론에 의해서 정신의 자기도달에 이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미학적 정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현실이 그 아무런 문제성이 없이 정신과 화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87년 체제를 역사의 종국적인 형식으로 이해해버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형식적으로 보아 87년 체제의 유지와 보수를 위해서 급조된 부르조아 명망가 정당처럼 보여지지만, 그 배면적 전개의 과정을 잘 뜯어보면 이는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열린우리당은 87년 체제가 지리멸렬한 상황에 빠진 세계의 과학적 반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에서는 현실이 그들의 미학적 감수성에 의존하는 정치를 위해서는 더 이상은 유리한 토양을 제공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여러 징후들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맞닥뜨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정당 형식이 지닌 근본 문제가, 그 자체 속에서 하나의 원환을 이루고 있는 87년 체제의 형식 세계에서 비롯하는 완결되고 총체적인 형식들, 다시 말해 그 자체 속에서 더 이상의 역사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 내재적으로 완결된 형식세계를 어떻게 미학적 취미판단의 논리로 처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열린우리당 지지자들과 나의 현실파악에 있어서의 '다름'에서 비롯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현실파악은, 미학적인 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철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87년 체제의 내부에서 미학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고, 민주노동당 지지자인 나는 87년 체제의 바깥에서 열린우리당을 역사철학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그 주변에서는 오늘날의 현실을 두고, "오늘날에는 더 이상 자연발생적인 삶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열린우리당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날이갈수록 더 자학적으로 되고 스스로를 자해하게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을 급조한 당 내부의 사람들보다는 열린우리당 주변에서 열린우리당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벌써 낡아버린 이 부르조아 명망가 정당에 대해서 더 비판적이고 또 더 깊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둘은 삶에 대한 비슷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또 87년 체제에 대한 비슷한 시각을 지니고 있는 까닭으로 오늘날의 현실에 비슷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정은 동일하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열린우리당의 이름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자인 나를 공격하게 되는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정신과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갖는 이와 같은 나의 반대 입장은 미학적, 철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필자가 영웅 이인영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가 어떠했었던가를 시사한 앞서의 언급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만들어나가고 있는 현실은 열린우리당 스스로에게 "이미 도덕적 가치가 완전히 타락한 세계상황"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윤리적 색깔로 어둡게 채색된 현실에 대한 비판주의는 다시 한나라당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87년 체제를 역사 발전의 최종적인 형식으로 파악함으로써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87년 부르조아 시민혁명은 열린우리당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87년의 성과물을 독점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잡기 훨씬 이전부터 사실상 87년 시민혁명의 성과물들은 영웅적인 개인에 의해서 독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전기적 사실을 여기에서 밝힌 까닭은 87년 체제에 있어서 나중에 가서 중요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경향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열린우리당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은 근본적으로 87년 체제에 반대하여 87년 체제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하나의 복고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적 집단에게 재기의 에너지를 공급해주었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좋고 싫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미학적 취미판단의 정치 속에는 비합리적인 한나라당에게로 그 자신을 접근시키는 미리 예정된 경로를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역사철학적 필연 속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은 끊임없이 비합리적으로 되어갔으며, 결국은 이 땅의 정당사에 있어서 가장 비합리적인 정당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7년 체제의 출발에서부터 이러한 '감정교육'에 의한 호오(好惡)의 취미판단에 의존하는 미학적 정치의 씨앗은 이미 도처에 잠재적으로 도사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서히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결국 청년 마르크스를 정신과학적 방법론으로 잠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를 속류적으로 해석하여 더 이상 니체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마르크스와 니체는 하나같이 기존의 현상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과감하게 말하게 된 시대에는 호오(好惡)의 '감정교육'이 책상과 펜대의 어지러운 춤으로 펼쳐지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흡사 자신이 가장 진보적인 것처럼 떠들어대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이 신자유주의를 열심히 뒷바침하고 있는 오늘날의 프랑스 철학계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론의 사회철학적 토대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반자본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초기 자본주의에서의 삶의 끔찍한 양상과 반문화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과 관련되고, 또 어느 면에서는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적 비판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 땅의 경우에도, 이러한 태도로부터 점차적으로 박정희 제국의 정치적 낙후성을 합리화하는 일종의 옹호적인 태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게 되면, 시민사회의 탈정치화를 가속시키는 이러한 '비정치적 고찰'의 중요한 정치평론서들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87년 체제의 발전 과정을 두고 보면, 87년 시민혁명에서 형성된 신 기득권 계급은 후퇴하면서 벌이는 스케일이 큰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세계는 87년에 정지해버렸으며 그 이후의 세계는 그저 87년 체제의 유지와 보수를 통한 이 새로운 기득권의 자기 확대 재생산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열린우리당은 87년 체제가 잉태한 낭만적 시민성을 두고, 그것이 전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현재'라는 변화된 현실과 논쟁을 벌여 본 수세적인 방어전이다. 그리고 이에 나는 이러한 신 기득권 계급의 낭만적 시민성이 전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죽음에 탐닉하고 있는 이 신 기득권 계급의 낭만성을 향한 공감이 갖는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영적인 불건강성과 부도덕성과도 이 수세적인 방어전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그들의 철학적 출발점을 87년 체제의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변혁 이데올로기에서 찾고 있기는 하지만, 위에서 보는 바의 이러한 분위기는 조금도 찾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몰문화적 풍토에 대한 나의 반대 입장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위장개혁의 비참성'과 그것의 현재적 잔재에 대한 일체의 동정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민주노동당은 87년 체제의 붕괴가 가시화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열린우리당처럼 어제의 낡은 것들을 보존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폭파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물론 이러한 면은 매우 순진하고 전혀 근거가 주어지지 않은 유토피아니즘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열린우리당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부르조아 의회로의 진출은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또 이와 함께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삶에 적대적인 경제적, 사회적 범주가 붕괴하게 되면 자연발생적이고 인간적인 삶이 생겨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사건이다.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민주노동당에게서 그들이 공격하기에 손쉬운 유토피아적 모멘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여기 이 땅의 현재에서 기대되어지고 있는 것이 87년 체제를 고수하는 하나의 새로운 개량적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이 시스템의 내용으로 발견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87년 체제를 탄생시킨 속류 유물론적 세계관의 유치한 유토피아니즘을 두고 쓴 웃음을 금할 수가 없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유토피아니즘은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던 정신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해내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는 나날이 어려워지는 민중들의 경제적 현실을 사회적으로 넘어서려는 전망은, 날이 갈수록 더 노골적인 반동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87년 체제가 잉태될 당시 이러한 유토피아적 생각의 파멸에 대한 예견은 아직도 전혀 미분화된 맹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계급 교환은 우연적인 것이지 결코 경제 이론적 관찰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공공연하게 되어갈수록 이러한 유토피아적 생각의 파멸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되어간다. 계급이 교환되는 변혁은 이제 더 이상 이론적으로는 분석될 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속류적인 견해가 춤을 추게 되고, 이제 다만 '천년'을 이어갈 고정된 계급에 관한 불편한 논증만이 심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따름이다.
 
만약 우리가 87년 직전의 마지막 몇 해와 87년 직후의 몇 년 동안에 혁명적이라고 믿었던 여러 유토피아적 생각을 회고하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낡아져버린 열린우리당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역사적 입장에서 보다 공정하게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열린우리당이 지닌 이론적인 동요와 불확실성에 대한 비판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
 
87년 체제가 잉태한 유토피아니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열린우리당이 현재 이 땅에 새로운 국면을 조성한 또 다른 하나의 특성을 올바르게 조명하는 데에도 적합한 근거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국면은 일찍이 새천년민주당의 조속한 몰락과정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 적이 있다. 이 경우의 또 하나의 다른 특성이란 간단히 말하면 열린우리당을 급조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좌파적' 윤리관과 '우파적' 인식론의 융합을 시도하려는 하나의 세계인식이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기묘한 합성어의 잉태는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다.
 
신군부 군사독재 치하의 친일파가 건설한 이 국가는 하나의 원칙적인 야당세력을 자신의 체제 내부에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극도로 밋밋하고 아류적인 성격을 띤 계몽주의적 전통에 근거하고 있었고, 또 해방공간에서의 값진 좌파적 전통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87년 당시의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어느 정도 개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한다면, 87년 체제는 과격한 혁명을 겨냥한 좌파적 윤리관이 철저할 정도로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현실해석과 결합해서 나타난 최초의 부르조아 국가 시스템이다. 국민의 정부가 제출한 이데올로기에 오면 이러한 입장이 벌써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나라당의 파시즘적 반공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열린우리당의 정신적 투쟁 속에서도 이러한 면은 한층 더 강화된다. 많은 사람들이 '좌파적' 윤리관에서 출발해서 김대중은 물론 심지어 노무현까지 진보적 세력으로 동원해서 이를 파쇼적인 반동인 한나라당에 대항하도록 하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훨씬 먼저인 87년 당시 이미 등장하고 있는데, 오늘날 열린우리당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아직까지는 매우 영향력 있는 정당이다.
 
87년 체제에서 좌파적 윤리관이 했던 역할은, 신군부에 대한 승리가 이루어지고, 체제 복고와 문민 정부 초반의 경제적 황금기의 도래와 함께 눈에 띌 정도로 약화 내지는 소멸되었지만, 그러나 그 대신 비타협의 가면을 쓴 타협주의에게 시대에 알맞은 권력을 넘겨주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가 이미 앞서 비판하면서 말한 것처럼 87년 이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지식인의 상당수는 "심연과 없음(無), 그리고 불합리성의 가장자리에  있는, 모든 안락시설이 구비된, 이를테면 '심연이라는 초호화 호텔'에서 살고 있다. 느긋하게 즐기는 식사 시간이나 예술품 사이에서 매일처럼 바라보는 심연의 광경은 이러한 세련된 안락시설에 대한 쾌감을 단지 증가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좌파적' 윤리관과 '우파적' 인식론의 종합을 고수하고 있는 90년대의 이 땅의 외국 이론 수입상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확고부동한 성격에 존경심을 갖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그들의 이론적 입장이 지니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부적합성이 조금도 경감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생산적이고 진보적인 87년 체제의 반대세력이 '수유너머'를 넘어서서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해서 실제로 태동하고 있다면, 이러한 반대세력은 좌파적 윤리관과 우파적 인식론의 결합과는 이미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87년과 환멸의 90년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이데올로기의 전사(前史)를 깊이 알기 위해서 열린우리당을 관찰하고 분석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적인 관찰대상과 분석대상으로부터 유익한 점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방향정립을 위해 지지한다면, 그것은 단지 방향상실을 상승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따름이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초기에 87년 체제를 자신의 방향 정립을 위해 참고한 적은 있지만, 이때 민주노동당의 건강한 본능은 87년 체제의 최후의 수세적인 방어자인 열린우리당을 정면으로 거부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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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19 [23: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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