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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닮은꼴, 정운찬의 나르시시즘 2
[인물과 사상의 눈] 서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집단 이기주의적 자폐증
 
강준만   기사입력  2005/07/13 [14:19]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한우의 몽매주의

한국 사회엔 서울대가 안고 있거나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를 슬기롭게 ‘윈-윈 게임’으로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서울대 비판을 ‘서울대 폐쇄’나 ‘서열 철폐’로 몰고 가면서 반론을 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예컨대,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한우는 그런 무지몽매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는 『주간조선』 2003년 8월 7일자에 쓴 <정운찬 총장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 총장이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울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을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 것은 요즘 지식인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대단한 용기다. ‘학벌없는 사회=서울대 없는 사회’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서울대가 없어진다고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학벌없는 사회 운운하는 단체는 센세이션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1차 타깃을 서울대로 정한 것이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정 총장은 누구나 동의하면서도 우리 사회 지도층의 어느 누구도 입에 담지 않으려는 주장을 했다. ‘어느 시대든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가 있다.’ 이어 그는 ‘서울대는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정 총장이 ‘서울대만’이라고 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서울대는’이라고 하는 한 그것은 한 대학의 교육철학이며 외부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학벌주의의 폐단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서울대 총장에게 가서 따지는 몽매주의적 방식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격의 타깃을 잘못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학벌주의를 줄이고자 한다면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서 싸워야 할 곳은 서울대가 아니라 한국 사회 구석구석이다. …… 정 총장은 현재 바른 길을 가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내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건 생각의 다름이 아니다. 이한우가 엘리트의 탈을 쓴 채 저지르고 있는 무지 몽매주의가 나를 안타깝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되려 서울대 비판을 무지 몽매주의로 몰아붙이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을 쓰고 있다.

나는 이한우에 대해 ‘몽매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이한우나 나나 피차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아닌데다 요즘 세상에 ‘몽매’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그의 용어를 그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아 보라는 고귀한 뜻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중요한 사회적 공인에게 그 위상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게 몽매주의적 방식이라니 이런 언어 폭력이 어디에 있는가. 이한우의 그런 언어 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 그가 『조선일보』 2003년 10월 21일자에 쓴 <‘사이비 좌파’가 설치는 세상>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보자.

이한우는 이 칼럼을 그야말로 무지 몽매주의의 완결판이라 할 만한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관념적인 사이비 진보세력’을 국민이 불신임해야 한다나 어떻다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지, 왜 그렇게까지 무리하는 걸까? 지 마음에 들면 대단한 용기고 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척결해야 할 대상이 되니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나만 해도 이라크 파병 찬성파를 불신임해야 한다거나 내쫓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데, 이한우는 왜 저리 폭력적인 심성을 갖게 된 걸까? ‘코아 그룹’에 끼고 싶어 안달하는 강박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무지몽매하기 때문인가?

도무지 모르겠다. ‘서울대 옹호론’이 한결같이 전형적인 『조선일보』 수법을 쓰고 있다는 게 재미있다. 『조선일보』 수법이라 함은 상대편의 수사적 과장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한 번 더 뻥튀기를 한 다음에 그걸 자신의 반론의 논거로 삼는 수법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일본은 없다’고 했더니 자신이 어저께 일본에서 왔다며 비행기 표를 내미는 꼴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엘리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서울대의 나르시시즘을 그대로 빼박는 언행을 보이고 있는 건 나르시시즘의 문제가 한국의 모든 엘리트에게 만연돼 있는 고질병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어느 기러기 아빠의 죽음

2003년 10월 25일, 두 딸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고 딸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부인마저 떠나보낸 40대 ‘기러기 아빠’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일어났다. ‘기러기 아빠’에 대해 늘 ‘꼭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세상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그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접하면서 착잡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기러기 아빠는 한국적 삶의 각박하고 처절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수신문』 03년 11월 3일자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는 ‘기러기 아빠란 교수사회에선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 학과에서 과반수 이상이 기러기 아빠인 경우도 접하기 어렵지 않다. …… 기러기 교수들이 하나같이 털어놓는 건 ‘외로움’과 ‘그리움’이다. …… 눈앞에 현실로 닥쳐오는 건 재정적인 부담감이다. 지난 9월 『매일경제』 신문에서 기러기 아빠 7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월평균 418만 원에 연평균 5천만 원 이상을 송금비용으로 쓰’는 걸로 나타났다. 많은 기러기 아빠가 수입 대부분을 자녀 유학비용에 바치는 것이다. ㅇ대의 ㄱ 교수도 ‘연봉 6천만 원 정도로는 세 가족 송금비로도 벅차며 마이너스 통장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해 충격을 준다.”

충격과 더불어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내 눈을 더 번쩍 뜨이게 만든 건 『문화일보』 03년 10월 29일자에 실린 <어느 기러기 아빠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사설이었다. 전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연간 수만 명이 조기유학을 떠나도 교육당국은 통계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불법 및 편법적 유학에 대해서도 방관적 자세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 본 적이 있는가. 모두가 공교육의 황폐화와 학교 선택권이 억제된 데서 오는 필연적 사태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기회 있을 때마다 교육의 불균형과 고교평준화 폐지를 얘기할 정도면 그 심각성의 정도가 예사롭지 않다. 망가진 공교육이 바로잡히지 않는 한 기러기 아빠들의 불행은 계속될 것이다.”

조기ㆍ편법ㆍ불법 유학이 ‘공교육의 황폐화와 학교 선택권이 억제된 데서 오는 필연적 사태’다? 그래서 정운찬이 역설하는 고교평준화 폐지가 그런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

믿기 어려운 말씀이다. 나에겐 이런 시각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다. 내 생각으론 조기ㆍ편법ㆍ불법 유학의 이유는 너무도 뻔한 정답이 이미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보통사람들도 아니고 서울대 총장에서부터 유명 저널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탁월한 지식인들이 그런 주장을 해대니 이 어찌 불가사의가 아니랴.

알고 하는 말일까, 모르고 하는 말일까? 똑같은 주장 반복하기 싫어 교육 문제에 대해 입 닫고 살고 싶어도 계속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이 난무하니 했던 소리 또 할 수밖에 없다.

다시 정답을 말씀드리겠다. 조기ㆍ편법ㆍ불법 유학의 이유는 국내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데에 있다. 경쟁이 치열한 것 자체를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그건 사회적 활력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교육 경쟁이 전 생애에 걸쳐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쟁이 아니라 10대 후반에 딱 한 번 치르는 대학입시 경쟁으로 판가름나는 경쟁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경쟁 자체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역설하는 건 ‘경쟁의 합리화’다. 대학 간판 하나로 평생을 우려먹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서울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왜 고교평준화를 증오하나?

『조선일보』는 고교평준화를 증오한다. 설마, 증오하기까지야 하겠는가? 하긴 그렇다. 『조선일보』가 공개적으로 증오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짧으나마, 이 글을 읽고 그 표현의 적합성을 판단해 주시기 바란다.

『조선일보』 사회부장 김형기는 2003년 6월 27일자에 쓴 <교육에 침투한 포퓰리즘>이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고교평준화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하였다. 서울대 총장 정운찬이 이 칼럼에 감명을 받아 약 한 달 후에 그 유명한 포퓰리즘 발언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정운찬과 『조선일보』가 결과적으로 한통속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김형기는 미국, 일본, 독일 등 3개 선진국의 사례를 거론하면서 그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0여 년에 걸친 평준화 실험이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학생들의 학력신장과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체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적인 조류에서 유독 거꾸로 가는 나라가 하나 있다. 바로 한국이다.”

몰상식의 극치다. 한국을 포함하여 각 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학입시 전쟁의 강도와 양상이 각기 다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는 나라들인 양 말하는 건 몰상식을 넘어 사기라고 해도 좋겠다. 그래서 김형기의 결론은 무엇인가?

“평준화 여부를 여론에 맡기는 발상은 전형적인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다. 교육에 침투하는 포퓰리즘은 금방 눈에 띄지 않을지는 몰라도 서서히 우리 후손과 나라를 망가뜨릴 것이다.”

으악! 후손과 나라까지 망가뜨린다? 나는 고교평준화를 폐지한다 해도 그것이 후손과 나라를 망가뜨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고교평준화에 대해 절대적인 찬반 양론 모두를 거부한다. 그 어느 쪽이건 명암(明暗)이 있다고 보는 쪽이다. 『조선일보』는 이런 자세를 유지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서 적극적인 선동에 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2003년 7월 10일자 사설도 걸작이다. 제목이 <서울대, 지역 할당보다 경쟁력이 급하다>이다. 지역할당제는 서울대의 이미지 개선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밝혀졌지만, 『조선일보』가 지역할당제에 반대하는 이유는 색다르다. 또 ‘포퓰리즘’ 타령이다. 이 사설의 결론 부분만 인용한다.

“설사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사회정책적 접근 방식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정치단체나 사회단체 등이 맡을 몫이고 해당 대학은 오히려 교육의 본질과 경쟁력 측면에서 아예 반대하는 것이 자연스런 역할 분담일 것이다. 그런데도 서울대가 오히려 앞장을 서고, 사회에선 이것도 일종의 포퓰리즘 아닌가 하고 우려의 눈길을 던지게 됐으니 처지가 뒤집혀도 크게 뒤집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메바를 방불케 하는 단순 논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의 경쟁력 향상에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것에 진정 찬성한다면 합리적 경쟁을 방해하는 서울대의 과도한 물량 중심의 독과점 체제를 문제삼으면서 ‘소수 정예주의’를 역설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조선일보』의 고교평준화에 대한 증오는 10월 하순 전사적 차원에서 표명되었다. 『조선일보』는 03년 10월 23일부터 28일까지 ‘고교평준화 30년’ 시리즈를 통해 ‘고교평준화’에 대해 맹폭격을 가하였다.

10월 25일자 사설이 대히트였다. 제목이 <평준화는 ‘사이비 종교’다>였다. 평준화를 찬성할망정 나처럼 일장일단을 인정하는 사람의 생각을 ‘사이비 종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준화를 폐지하지 않으면 후손과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치는 집단의 신념이 ‘사이비 종교’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이 사설의 내용은 ‘사이비 종교’의 성격이 다분했다. “교육사회주의적인 발상이 교육행정 책임자들 사이에 버티고 있”다나? ‘빨갱이 사냥’으로 군사독재정권의 애첩 노릇하던 시절의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나 보다.

『조선일보』 10월 28일자는 “고교평준화 30년. 줄이려 했던 사교육비는 매년 조 단위로 늘고 ……” 운운하면서 평준화를 사교육비 상승의 주범으로 몰아붙였다. 또 이 신문은 평준화를 지키려는 서울시교육청 때리기에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일보』의 이런 전방위적 노력의 바탕에 깔린 심리는 무엇일까?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김종엽의 분석이 탁월하다. 그는 엘리트 계층이 고교평준화를 반대하는 이유로 그들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 계급 재생산, 계급적 분리 욕망 등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세 번째 이유가 주목할 만하다. 평준화 제도가 섞이고 싶지 않은 계층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를 섞어놓는 것에 대한 상류층과 중상층의 불만이 크며, 이는 노골적인 차별의 심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문화적 취향과 감각의 차이라는 형태로 매우 강하게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문화적 취향과 감각도 나르시시즘의 징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해선 생각해보는 걸 포기하고 오직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게끔 훈련받은 취향과 감각은 이성으론 격파될 수 없는 세계일 것이다. 거의 정신질환의 수준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서울대를 좋아하는 『조선일보』의 집착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언론사가 학벌 더 따진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조선일보』는 언론사들 가운데 최악(最惡)이다. 최근의 『조선일보』 신입 기자들 중에도 서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건 통계 수치가 없는 만큼 10여 년 전의 통계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의 1988∼1991년 신입기자 가운데 서울대 출신은 얼마나 됐을까? 놀라지 마시라. 75.8%였다. 그 라이벌인 『동아일보』의 경우엔 이 기간 중 서울대 출신은 51.2%였다. 또 『동아일보』는 5개대 이외의 ‘기타대’ 출신자가 9.3%나 된 반면, 『조선일보』는 전무한 걸로 나타났다.

이건 결코 정상이 아니다. 미친 것이다. 그렇게 미친 상태에서 『조선일보』가 고교평준화를 증오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조선일보』의 이런 광기(狂氣)는 일관되게 다른 분야의 보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노동 관련 보도를 보라. 『조선일보』는 철저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면서 상류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신문이다. 『조선일보』를 껄떡대고 읽을 그 수많은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미어진다.

서울대 교수 오세정의 나르시시즘

나는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오세정이 『중앙일보』 2003년 10월 30일자에 기고한 <서울대 비판에 대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내가 알기로 서울대에 오세정만한 분이 없다. 대단히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분이다. 서울대에 대한 자기비판의 목소리도 많이 내는 분이다. 내가 한숨을 내쉰 건 그런 분까지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하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이 칼럼의 일부를 소개한다.

“가끔 서울대 구성원인 필자가 보기에도 꼴불견일 정도로 기득권을 휘두르는 일도 있지만, 과연 없어져야 마땅할 만큼 문제점투성이인지 객관적으로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 서울대가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할 뿐이라는 비판도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다. 오히려 과거 서울대 입학이 어려운 집안 출신 학생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통로 역할을 했던 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또한 전체적으로 서울대 졸업생이 사회의 기득권 계층에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득권에 저항하는 진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980년대까지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서울대 학생들은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지금도 많은 졸업생이 각종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 개혁이란 무조건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있는 것을 잘 이용하는 것, 이것이 슬기로운 길이 아닐까.”

오세정은 서울대에 대한 비판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다. 누가 서울대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단 말인가? ‘서울대 폐교론’이라고 하는 수사적 과장법 속에 담긴 소중한 문제의식을 ‘폐교’라는 단어에만 집착해 반론을 펴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아니 말은 바로 하자. 말 그대로 서울대 폐교를 바라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간 제기된 서울대 비판을 살펴보면 그 누구도 그걸 진지하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혀 파괴적이지 않은, 매우 건설적인 비판과 대안이 많이 제시되었으며, 나 역시 그렇게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간 축적된 건설적인 비판과 대안을 전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위와 같이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의 성실성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과거 서울대 입학이 어려운 집안 출신 학생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통로 역할을 했던 점을 무시하기 어려우니 어쩌자는 건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과거에 그랬으니 그 공적을 감안해 서울대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서울대가 ‘출세의 전당’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겨우 ‘출세의 분배 정의’로 대처하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서울대 출신이 운동을 많이 했으니 이해해달라는 주문도 그렇다. 운동권에서 서울대 출신만 집중적인 사회적 보상을 받고 있는 현실도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라도 해볼 생각이 없는지 묻고 싶다. 하기야 서울대에 대한 문제 제기를 겨우 ‘파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분에게 무슨 질문을 던진다 한들 개 짖는 소리로밖엔 들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오세정의 대책 없는 나르시시즘에서 ‘잔인한 순진’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지금 서울대의 가장 큰 문제는 나르시시즘이다. 바깥 세계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닫혀 있다. 한국 사회의 최정예 엘리트 지위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오직 자신과 집단 이기주의의 관점에서만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울대 사람들의 나르시시즘은 중증(重症)이다.

만인에 대해 만인이 뜯어먹는 사회의 엘리트라는 게 원래 잘 뜯어먹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곤 하지만, 이젠 엘리트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진정한 엘리트가 전무한 이 사회에서 엘리트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건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김민수를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대법원에 계류 중이어서 바깥에서 논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차라리 미대 교수들이나 대법원에 가서 로비를 하라.”

서울대 총장 정운찬의 말씀이다. 1998년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탈락한 전 서울미대 교수 김민수가 2003년 9월 29일부터 서울대 본부 앞에서 복직투쟁을 위한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나온 이야기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달라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정운찬은 천막 농성 현장을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점심을 해결하거나 아예 늦게 식당으로 향하는 등 도망다니기 바쁘다고 한다. 자신의 과거 주장을 그렇게 배신해도 되는 걸까?

정운찬은 총장 선거기간 중 김민수 복직대책위와 가진 면담에서 “김 전교수의 복직문제는 학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김민수마저 “정 총장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대안”이라고까지 말했었다.

오죽하면 ‘수구언론과 똑같은 정운찬 총장’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겠는가. 좋다. 과거의 말을 뒤집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깊은 뜻이 있는 걸로 이해하자.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국립대 교수의 자율성이 워낙 잘 보장돼 있다 보니 한 학과나 단과대학 내 교수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총장이 개입하여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고충을 이해하면서도 정운찬이 좀더 넓고 크게 생각해줄 걸 요청드리고 싶다. 어차피 서울대 총장이란 자리는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일개 국립대 총장의 자리를 넘어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서울대 입시정책과 관련해 서울대 총장이 발언을 하면 신문의 1면 머릿기사를 장식할 정도로 세인의 관심도 집중돼 있는 그런 자리다.

정운찬이 그런 높은 위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서울대에 국한된 실무적이고 최소주의적 언행을 보여왔다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운찬은 그렇게 하진 않았다. 늘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으면서 한국 교육 전반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 왔다. 최근 어느 조사에서 정운찬이 교육 분야 ‘최고의 리더’로 뽑힌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운찬은 김민수와 관련된 문제를 서울대 문제로만 보지 말고 한국 대학의 문제로 보면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그건 교육인적자원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피해선 안 된다. 교육인적자원부를 설득하는 일도 정 총장의 몫이다.

가칭 ‘대학분쟁조정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만드는 건 어떨까? 교수 채용 및 재임용 갈등이 매년 전국적으로 수백 건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그런 기구의 설립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 자꾸 위원회를 만드는 것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므로 인권위원회의 내부 기구로 두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김민수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이런 종류의 갈등은 사실상 인권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은 대학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대학 당국은 그건 법원이 할 일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학 스스로 자신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모독하는 발상이다. 대학분쟁조정위원회는 국가 기구의 형식으로 존재할망정 교수가 중심이 된 사실상의 대학 자율 기구다. 대학은 정녕 대학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을 다 법원으로 가져가기를 원하는 건가?

대학분쟁조정위원회를 만들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김민수를 포함하여 지금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많은 교수들에게 그때까지 계속 기다리라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학생들 보기도 낯뜨거운 일이다. 일종의 과도기적 처방으로 대학본부 소속 교수제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갈등을 빚고 있는 단과대 또는 학과 내 다른 교수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총장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현 상황에서 그거나마 여의치 않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게끔 정운찬이 앞장서 달라는 것이다. 부디 정운찬이 명실상부한 ‘최고의 리더’가 돼 주기를 기대한다.

서울대 교수들도 이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여겨주면 좋겠다. 서울대가 ‘서울강남귀족대’로 지목받고 있는 이때에 서울대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만약 김민수가 복직되지 못한다면 그게 학생들에게 주는 교훈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보신주의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슬기로운 처세술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과연 그걸 원하는지 묻고 싶다.

대학은 최악의 관료조직이다

대학 총장은 정부 부처의 장관이나 공기업이나 사기업의 사장과는 크게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권한이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직선제 총장의 경우 교수들의 비위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임명제 총장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직선제로 상징되는 대학 민주화가 문화와 관행으로 완전히 정착될 때까지는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직선제를 지지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서울대 총장 정운찬만 너무 탓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한 이야기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총장은 교수들의 졸(卒)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학은 최악의 관료조직이다. 모든 면이 다 관료조직이라는 건 아니고 ‘자기 증식 경향’에 관한 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서울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드는 최대의 장벽이다.

사실 정운찬이 서울대 문제의 핵심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핵심을 찌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서울대의 구조 조정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신입생이 4천 명이다. 미국 대부분의 대학은 1천500명을 넘지 않는다. 이 수준까지는 어렵겠지만 많이 줄여야 한다. 서울대 대학원생은 등록생 기준으로 1만1천 명이다. 하버드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이 중 대부분이 로스쿨 등 전문학위 과정인데 우리는 순수 학위 과정에만 몰려 있다. 수는 줄이고 내용은 강화해야 한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서울대의 크기를 확 줄여달라는 것이다. 1천500명 수준이 왜 어려운가? 1천 명 이하 수준으로 확 줄여버려야 한다. 엘리트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의 개념이다. 왜 그렇게까지 줄여야 하는가? 독과점의 폐해를 여기서 다시 되뇌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서울대는 과감한 자기 축소를 할 수 없게 돼 있다. 왜 그런가? 그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관료제의 전형적인 폐해와 비슷한 것이다. 누가 자기 조직이 축소되는 걸 바라겠는가? 무한팽창을 추구하게 돼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울대의 자기 축소는 총장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서울대 교수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벌써부터 누구 마음대로 정원을 줄이느냐고 아우성치고 있는 게 서울대의 현실이다.

정운찬도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위와 같은 발언을 하기 한 달 전에 서울대가 아닌 한국 대학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일반론적인 발언을 했을 것이다. 정운찬은 한국에서 대학의 부실팽창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그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경제와 마찬가지로 대학도 소위 ‘나도주의(me-tooism)’에 젖어 팽창을 계속해왔다. 대학들은 ‘나도주의에 따라 다른 대학이 종합대학을 하면 우리 대학도 동참해야 손해를 안 본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커다한 종합대학이 돼버렸고 과잉 규모로 고생하고 있다.

둘째, 대학도 한국 경제처럼 규모의 경제-좀더 넓게는 범위의 경제-를 과신했다. 규모의 경제란 규모가 커지면 기업의 단위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학은 이러한 논리에 따라 ‘대학을 키우고 학생 수가 많아지면 원가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집착해왔다. 그래서 대학은 계속 팽창노선을 걸어왔다.

셋째, 국가 정책목표에 따라, 대학은 사회의 장기적인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적으로 공급측면만을 따라 학생 수를 늘려왔다. 예를 들면, 정부가 고급 노동력이 부족하므로 공대의 학생 수를 늘리자고 하면, 한 대학이 공대 정원을 늘렸다. 그리고 다른 대학이 모두 따라했다. 지방경제를 육성한다고 해서 한 지방에서 지방대를 키우니 다른 지방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 중심 대학을 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대학원생 수를 늘렸다. 우리나라의 대학원생 수가 인구 1천 명당 6.1명을 상회하는데 반해, 미국은 3.9명, 일본은 1.7명에 불과하다.

그 결과, 경제와 마찬가지로, 대학 역시 너무 커져서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 지식전수 단계를 넘어 지식창출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과도하게 팽창해 있는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다. 대학의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을 포함한 과감한 구조조정을 제안한다.”

정운찬의 이런 주장에 감명을 받은 『문화일보』 논설위원 이상우는 <정운찬 총장의 쓴소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 집단을 들여다보면 적자생존 법칙에 따라 구조조정해야 하는 이유는 선명하다. 상당수 대학이 매년 학생 수가 부족해 ‘덤핑 모집’을 하고 있다. 학력은 아예 보지 않는 ‘묻지마 대학’들도 있다. 대학 간판만 걸려 있지 대학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지금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는 지방대 육성 프로그램이다. 방향은 그럴 듯하다. 그런데 수순이 틀렸다. ‘선(先) 정리-후(後) 합병’이 순서다. 부실 대학을 놔둔 채 이리 저리 대학을 묶어 ‘연합 대학’을 만든다고 그게 ‘우량 대학’이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지주(持株) 대학’까지 망하게 된다. 회생 불가능한 기업에 공적자금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벌써 대학가에 지방대 육성 예산지원을 둘러싼 ‘로비설’이 파다하다. 그런 말이 나돌면 정말 곤란하다.”

그렇다. 정말 곤란하다. 나는 이상우의 개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동시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이론을 제기하고 싶다. 즉, 이상우가 수순이 틀렸다는 주장을 하려면 그 이전에 ‘윗물’부터 문제삼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라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덤핑 대학’과 ‘묻지마 대학’이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 대학들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서울공화국’ 체제라고 하는 외부에 있다는 걸 깨닫는 것도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예산 지원을 둘러싼 ‘로비설’도 그렇다. ‘로비’는 서울 명문대들의 장기이며, 그들이 살점을 다 뜯어먹고 난 뼈다귀 씹는 게 지방대들의 몫이었다. 이제 와서 살점 좀 뜯으려니까 새삼스럽게 ‘로비’를 문제삼는다는 건 너무도 불공평한 일이다.

지금 나는 그런 작태에 대한 옹호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건 일부 지방대의 상황이 비참하다는 것일 뿐, 그들이 하고 있는 그런 수법의 기본 취지나 방법은 서울 명문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자면,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대학은 어느 경우에건 자기 생존과 증식을 꾀하는 본능을 갖고 있는 최악의 관료조직이라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인 이 모든 게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를 놓고 우리는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나는 대학에 대한 사회적 개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개입에 이미 많은 문제들이 노정된 이상 대학에도 사회가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대학이 그런 개입을 부당한 간섭이라고 주장하기엔 자격 미달이다.

한국 엘리트의 자폐성(自閉性)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하겠지만, 나는 한국 엘리트의 자폐성(自閉性)을 들고 싶다. 각 분야의 엘리트 계급이 한국 사회 전체를 보지 않고 자기 혹은 자기 집단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면서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의 조화를 기하려는 심성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엘리트의 이기적 탐욕이 지나치다는 뜻인가? 아니다. 이건 그것과는 좀 다른 문제다. 이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기질이거나 ‘아비투스(습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사실은 국익을 해치는 일을 하면서도 애국적인 행위를 한다고 굳게 믿는 착각이 가능해진다.

엘리트란 무엇인가? ‘엘리트’라는 개념 자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평등주의에 단호히 반대하는 나로서는 엘리트의 필수조건이 거시적 차원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안전과 번영에 대해 고민하는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구를 지키랴”라는 식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이라고 조롱해도 좋다. 엘리트에겐 그런 의식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엘리트에겐 그런 의식이 박약하다. 예컨대, 한국의 정치 엘리트가 어떤 사람들인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선 교육 엘리트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나는 이들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대학입시 전쟁에 대한 생각을 밝혀야 한다. 그 전쟁의 부작용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이익 추구가 조화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모든 대학 총장들이 다 교육 엘리트에 해당되겠지만, 여기선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할 SKY(서울-고려-연세대) 총장만 문제삼겠다. 나는 이들의 과공(過恭)에 자주 놀란다. 이들은 한국 사회 전반의 교육 문제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대학의 이익만 생각하는, 매우 낮은 곳에 늘 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SKY가 잘되는 건 곧 국익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그렇진 않다. 한국의 엘리트 시장에 있어서 SKY에 의한 기존 독과점 체제의 강화는 SKY의 이익엔 기여할 수 있을망정 대학입시 전쟁을 더욱 격화시켜 이미 충분히 피폐해진 모든 한국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다원적 경쟁체제’다. 그래야 경쟁의 병목 현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평생 경쟁 체제로 갈 수 있다. 즉, 대학의 기존 ‘고정 서열제’를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변동 서열제’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SKY가 기존의 문어발식 팽창주의를 지양하면서 소수 정예주의로 내실화를 기해야 한다.

나는 2003년 11월 7일 연세대 김우식 총장과 고려대 어윤대 총장이 ‘기여입학제’를 공동 추진하겠다고 밝혔을 때 그런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는 “재정확충이 제대로 되지 않는 한 세계화하고 있는 교육환경에서 국제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주장에 100% 동의하기 때문에 꼭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느 신문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연고대만을 생각하는 겸양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 나라 교육계를 대표하는 SKY 총장이라면 세계 1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그 엄청난 사교육비를 대학 재정 확충용으로 돌릴 수 있게끔 국가적 차원의 고민을 해보고 그걸 밝히는 게 도리이겠건만, 그들은 일편단심 SKY의 이익만 생각한다.

나는 차라리 SKY 총장들로부터 국가주의적 사회진화론의 입장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장점을 역설하면서 현 대학입시 전쟁을 ‘필요악’으로 옹호하는 주장을 듣고 싶다. 그들이 모든 언론매체가 양산해내고 있는 대학입시 전쟁의 참혹상을 고발하는 기사들이 오히려 나라 망친다고 호통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야 그들의 언행에서 적어도 일관성만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국제 경쟁도 국민이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지 국제 경쟁 그 자체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부디 SKY 총장들이 낮은 곳에만 임하려는 겸양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슬기롭고 책임감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SKY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지방분권은 ‘죽 쑤어 개주는 꼴’인가?

많은 지방 사람들의 희망인 지방분권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다. 전북대 교수 이정덕은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지방분권을 싫어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난 어떤 사람은 지방분권을 하면 지방 토호들이 다 해먹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방 공무원이 능력이 없어 제대로 일을 못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러한 엉터리 주장이 설득력 있게 포장되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말이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했던 말과 왜 그렇게 똑같은지 깜짝 놀랐다. 한국은 부패하고 무능해서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나라라면서 병합하였다. 그리고 독립해봐야 부패하고 무능해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며 계속 지배했다. 수도권 사람들이 이러한 논리로 중앙집중을 정당화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더욱 알 수 없는 건 진보적인 지식인들마저 ‘지방 토호’ 핑계를 대면서 지방분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새전북신문』 기획팀장 원도연은 <서울의 반란>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지방분권에 대한 반대자들의 논리는 다양하지만 갈래를 타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며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는 역차별 주장이다. 지방분권에 대해 가장 먼저 총대를 맨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표적이다. …… 두 번째는 선 경쟁력 강화 후 지방분권 주장이다. 손학규 경기지사의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

중앙대 강내희 교수의 주장도 한꺼풀 껍데기를 벗겨보면 여기에 속한다. 그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분권정책이 ‘정부와 시민사회의 수평적 분권이 아니며, 시민의 자치역량 강화도 별로 중요한 목표로 설정되지 않아 지방 토호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례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주민소환제도 같은 민주화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분권만 추진하면 죽 쑤어 개주는 꼴이 될 수 있다’고 한층 세련되고 진보적인 논리를 펼쳤다.”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들과 지방 토호들 중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는 지방 토호들을 더 혐오스럽게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에게 비리가 적잖이 있을 텐데, 어느 쪽의 죄질이 더 무거울까? 이 질문에 대해선 조금 더 생각할 것이다. 계속 더 생각해보기 바란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수평적 분권’은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앞세워 ‘작은 진보’를 폄하하는 시각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중앙, 아니 대한민국의 권력을 재벌들이 장악한 현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면서 지방 토호의 권력장악만 문제삼는 게 온당한가?

죽 쑤어 개를 준다? 그 개는 지방 토호일 것이다. 재벌을 아무리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재벌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지방 토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지방 사람들은 중앙 재벌보다는 자기 지역 토호가 더 잘되기를 바란다. 왜? 중앙 재벌이라는 게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지방 토호라는 애벌레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주장을 지방 토호를 위한 변명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방분권의 절박함을 너무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니냐고 질타하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다. 지금 지방경제를 누가 죽이고 있나? 지방 토호들이 죽이나? 천만의 말씀이다. 전주 이마트 도민연대 대표 김현종은 <전주권 경제 비상사태를 고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역상권의 붕괴 조짐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다. 서울의 대형 유통 자본들이 전주권과 전라북도를 마지막 황금어장으로 여기고 속속 진출하는 현실 속에서 필자는 올해 초부터 예견해온 지역상권의 해체와 붕괴를 읽는다.

특히 모 기업이 중화산동 소재 부지에 매장 면적 7천평 규모의 대형 쇼핑몰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은 전주시내 신흥 주거지역인 백제로 주변 상인들의 폐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계획대로라면 까르푸는 노송동ㆍ인후동 일대를, 롯데쇼핑몰은 효자ㆍ삼천ㆍ평화동까지 지역상권을 초토화시킬 것이다. 이미 영업 중인 이마트가 서신동 상권을, 내년 초 개점 예정인 롯데백화점이 구도심권의 유명 브랜드 명품점들을 몰락시키고 있거나 몰락시킬 것이다.

전주 경제는 광주나 대전과 성격이 다르다. 광주에는 4만여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하남공단이 있고, 대전에는 유성과 대덕 일대에 중앙에서 이전해온 정부부처, 군부대, 연구기관이 즐비해 대략 20만 명쯤의 생계를 책임져주고 있다. 이에 반해 전주는 안정적인 자금 유입 경로가 광주, 대전에 비해 극히 협소하다. 따라서 광주와 대전은 유명 백화점, 대형 할인점이 7∼8개씩 자리잡아도 자금이 마르지 않지만 인구 63만의 전주는 현재의 이마트 하나만 가지고도 쩔쩔매는 형편이다. 올 초부터 추진된 이마트 지역법인화 운동은 이러한 위험을 미리 내다보고 최소한의 방어선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 특히 전북과 같은 ‘지방 중의 지방’의 사정이 절박하다. 너무도 절박해 죽 쒀서 개줘도 그 개가 ‘우리 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박한 것이다. 죽 쒀서 서울 주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방분권을 하면 지방 토호들이 다 해먹는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죽도 못 먹고 사는 지방 촌놈들의 생각이라는 걸 서울 양반들이 제대로 알아주면 좋겠다. 늘 지방 토호 비판하느라 바쁜 나로 하여금 이런 한심한 글을 더 이상 쓰지 않게끔 해주면 고맙겠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4년 1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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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7/13 [14:1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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