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지식-기술이 없는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 간다면 대게 가게를 차린다. 작은 밑천을 들여 식구끼리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겠지 하고 구멍가게, 채소가게, 세탁소 등등을 말이다. 뉴욕에서 자리잡은 한인채소상은 유명하다. 헐리웃 영화에 한국인 가게주인이 권총강도한테 봉변당하는 장면이 더러 나온다. 그만큼 한국교포들이 구멍가게를 많이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구멍가게조차 차리기 어렵다. 유통재벌이 골목상권을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10여년전에만 해도 직장을 잃으면 가게를 차려 먹고 살았다. 이제는 유통재벌 계열의 편의점, 슈퍼마켓이 동네를 점령해버려 구멍가게를 낼 엄두조차 못 낸다. 그 까닭에 실직자들이 밥집, 술집, 빵집, PC방, 노래방, 미장원, 통닭집에 달려들어 전국 어딜 가나 넘쳐난다. 경쟁이 심하니 퇴직금만 날리고 빚더미에 올라 앉기 일쑤이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유통시장을 개방했다. 외국자본-거대자본이 가격파괴를 앞세워 유통시장에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외국자본은 할인점이란 이름을 붙인 양판장(대량판매장)을 중심으로 시장공략에 나섰다. 거대자본은 양판장과 백화점을 양손에 들고 시장쟁탈전을 폈다. 그 탓에 자본력이 취약한 지방토착자본과 중견급 재벌들이 운영하던 백화점들은 퇴출됐다. 이어서 미국의 월마트도 프랑스의 까르푸도 손들고 철수했다. 이런 판이니 재래시장과 구멍가게가 초토화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통시장이 재편됐다. 유통재벌 계열의 백화점은 세계적 유명상표만 취급하는 최고가품 전문점으로 탈바꿈했다. 대형마트라고 이름을 바꾼 양판장은 생활용품 중심으로 판매전략을 전환했다. 여기에는 식당, 정육점, 쌀가게, 생선가게, 철물점, 문구점, 옷가게, 꽃가게, 빵가게, 미장원 등등에 수선집까지 있다. 자영업자의 모든 영역을 취급하면서 전국의 중소도시까지 침투했다. 양판장 하나가 들어서면 그 일대 자영업자와 재래시장은 몽땅 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서울에 위치한 대형 유통업체. © CBS노컷뉴스 | |
유통시장 개방 이전에 19개에 불과하던 양판장이 400개 이상으로 늘어나 포화상태다. 매장 3,000평(9,900㎡) 규모의 입지를 확보하기도 어렵고 과당경쟁이 심해지자 또 다시 판매전략을 바꿨다. 몸집을 줄여 골목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전략이다. 기업형 슈퍼마켓으로 동네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양판장에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고객을 찾아 가서 배달까지 해주는 이른바 슈퍼슈퍼마켓이 그것이다.
골목 상권은 거의 침탈됐다. 삼성테스코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136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데 금년에 100개를 더 늘릴 계획이다. 이에 맞서 롯데유통의 롯데슈퍼는 115개 점포에서 30~40개를 더 개점한다고 한다. 111개 점포를 갖은 GS리테일의 GS슈퍼도 증설경쟁에 가세할 전망이다. 유통업계의 선두업체인 신세계의 이마트가 골목시장 진출을 선언하고 나섰다. 동네 자영업자의 몰락은 이제 시간의 문제로 등장했다.
유통재벌들은 아파트 단지와 주상복합건물 저층부를 집중공략할 태세다. 아파트상가 입주상인들이 이제 파탄날 처지다. 아파트 단지 언저리에는 소형 트럭에 채소, 과일, 생선을 실은 행상들과 좌판을 차린 노점상들이 있다. 그들도 유통재벌의 먹이감이 되어 삶의 터전을 잃을 판이다. 유통재벌이 동네상권을 침탈함으로써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또 지역경제가 더욱 쇠퇴하고 있다. 유통재벌이 지역에서 번 돈을 서울 본사로 빼내가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자영업자가 1년전에 비해 26만9,000명이나 줄었다. 2008년 대형매장 매출액이 2004년에 비해 9조2,000억원 늘어난 반면에 재래시장은 그 사이에 9조3,000억원이나 줄었다. 역대정권에 이어 이명박 정부도 서민경제의 붕괴를 본 척도 않는다. 국회가 더러 유통재벌의 영업행위를 규제하려고 입법화에 나서나 번번이 좌절된다. WTO(세계무역기구) 규정에 어긋난다는 경제관료의 주장에 굽힌 탓이다. 외국자본과 국내자본을 차별하지 않는데 무슨 규정에 어긋난단 말인가? 국내자본끼리 경쟁하는데 왜 외국자본을 핑계되나?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대형매장 허가제와 영업시간 제한을 실시한다. 노는 날과 밤에는 문을 닫고 뉴욕 도심에 월마트가, 파리 도심에 까르푸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네에서 노는 사람은 다 가게 주인이다.”라는 말이 그들의 절망적인 삶을 말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