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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걸이 덧댄 공원 벤치, 기막힌 속내하고는...
[광화문 단상] 노숙자 눕지 못하게 ‘속보이는 행정’에 말문이 막혀
 
최방식   기사입력  2007/05/26 [16:02]
며칠 전 대전에 다녀오다 심야에 서울역 맨바닥에 웅크려 잠든 이들을 봤습니다. 심야 열차를 내린 시각은 2시 30분. 개찰구를 지나 대합실을 가로지르는 데 꽤 많은 이들이 바닥에 누워있습니다. 의자에 기대어 눈 감은 몇몇 이들과는 다르게요. 집을 나온 이들이거나 돌아갈 집이 없는 이들인가 봅니다. 의자에 누우면 될 텐데 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의자 여러 군데에 팔걸이를 덧대 누울 수가 없게 돼 있군요.
 
2년 전 쯤 일겁니다. 바로 이곳에서 잠자던 이가 숨진 채 발견된 일이 있었죠. 철도청은 별일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여기 기거하던 이들은 사인을 규명하라며 거세게 항의한 일이 있었죠. 당시 철도청은 대합실에서 노숙자를 쫓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고요. 다른 어느 역에서는 바닥에서 자다 셔터에 깔려 숨진 이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까칠해졌을까요?
 
서울역 맨바닥에 웅크려 잠든...
 
서울역 대합실 의자가 팔걸이로 3~4등분돼 있는 이유는 뭘까요? 자리싸움 하지 말고 한 의자에 서너 명씩 앉으라는 것일까요? 자리를 갈라놓지 않으면 한 사람이 여러 자리를 차지할까봐요? 새벽에 나와 보니 분명히 알겠습니다. 노숙자들이 눕지 못하도록 그리 만든 겁니다. 정말 속보이는 짓이군요. 벤치에 못 눕게 하면 그들이 안 오나요?
 
최근 8주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파페포포 안단테’란 제목의 조그마한 책입니다. 글이 듬성듬성한 만화책입니다. 인기가 좋다기에 한 번 읽어봤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내용이더군요. 청소년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사랑이야기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가슴 아픈 벤치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습니다.
  
▲ 노숙자들이 눕지 못하도록 벤치에 팔걸이를 덧대놨습니다. 노숙자들은 결국 차가운 맨바닥에 웅크리고 잡니다. 우스꽝스런 행정에 가슴이 아픕니다.     © 파페포포 안단테 책 중에서
어느 동네에 벤치가 하나 있었답니다. 신문을 읽는 아저씨도 오고, 점심을 먹으러 누나들도 왔답니다. 할아버지들 몇이 와 바둑을 두기도 하고 그 곳에서 쉬었다가 가기도 했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집 없는 아저씨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벤치에는 사람이 오지 않았답니다. 집 없는 이들이 심야에 거기 누워 잠잔다는 이야기를 들은 행정관청 공무원들이 나무 조각 세 개를 덧대 팔걸이를 만든 뒤부터요. 노숙인들이 눕지 못하도록 그런 거죠. 밥을 먹고 바둑을 두거나 놀이를 하기가 불편해졌고, 결국 아무도 찾지 않게 됐다는 겁니다. 서글프죠. 몹쓸 공무원들입니다.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개포동에 가면 임대아파트 단지가 하나 있습니다. 10평 남짓 규모죠. 처음 이 아파트를 지을 때 빈민들이 들어온다고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답니다. 가난뱅이들이 옆에 살면 집값이 떨어진다나요? 도곡동 타워팰리스 옆에 사는 빈민들도 지금 쫓겨날 처지죠. 부자 곁에 사는 게 죄일까요?
 
가슴 아픈 벤치이야기 하나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하나 생각납니다. 자신 것을 지키려고 성문을 굳게 닫고 홀로 사는 이 이야기 기억하실 겁니다. 봄이 와 새가 울고 꽃이 피건만 자신의 성 안은 한 겨울이니... 성문을 열어 제치니 아이들이 들어와 놀고, 새들이 날아오고, 결국 꽃이 피었다는 교육용 동화죠.
 
하기야 교육과 현실이 어디 일치합니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빈부에 귀천이 없다고 배우지만 우린 그 반대로 사니까요.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인데. 그러니 공부 못하고, 돈 없는 이들은 쓸모없는 세상 아닙니까? 정말 기가 막히죠. 슬픈 세상이고요.
 
할 일 없어 미국에서 잠시 노닥거릴 때 들은 이야깁니다. 어디나 톨게이트에 가면 차량 행렬이 쭉 늘어서죠. 한 운전자가 톨게이트인 줄 모르고 가다가 뒤늦게 끼어들었답니다. 손을 들어 양해를 구했고, 뒤 운전자는 흔쾌히 양보를 했답니다. 끼어든 이는 고마운 마음에 뒤 차 통행료를 지불하고 갔고요. 수금원에게 그 말을 들은 뒤차 운전자 역시 뒷사람 거라며 통행료를 지불했고요. 뒷사람 통행료를 내주는 행렬이 한 한국사람 때문에 그쳤다는 이야깁니다. 한인은 “그래요?” 한마디 하고 그냥 통과해버렸고, 결국 ‘아름다운 행렬’은 그치고 말았다는 군요.
 
동양이, 한국이 서양이나 미국 사회보다 온정이 큰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서구의 개인주의를 제 것밖에 모르는 이들의 습성으로만 알았죠. 그렇지 않다는 걸 안 게 얼마 안됐습니다. ‘이웃사촌’의 미덕은 우리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랩니다. 천박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받아들이고부터 한국사회는 정말 몹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것, 제 식구, 그리고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세상 말입니다.
 
“공간을 공평하게 나눠야죠”
 
홍세화 선생의 ‘똘레랑스’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죠. 우리말로 하면 ‘관용’이나 ‘배려’ 쯤 되는 단어일겁니다. 손님이 내 택시에 올라타려 해도 앞 택시를 위해 사양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죠.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도 있죠. 로마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전통이라죠? 귀한 신분과 특권을 향유하려면 높은 도덕적 의무도 가져야 한다는...
 
하기야 ‘조폭 회장’ 사건이 어디 남 이야깁니까? 아들이 울고 들어오면 당장 뛰쳐나가는 부모가 재벌 회장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맞고 들어오면 혼날 줄 알아”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숱한데... 그래선지 ‘똘레랑스’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간절한 세상입니다. 사실 이 두 단어도 개인주의나 자본주의적 미덕일 뿐이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연대’가 옳습니다. 배려하고 관용하는 미덕을 그저 기대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를 제도화해야 제대로 된 사회가 될테니까요. 노숙자에게도 삶의 공간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필자는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위원장입니다.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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