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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청년, 모아와 샤린은 연애 한번 못하고...
[버마 난민촌을 가다 1]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와의 만남
 
최방식   기사입력  2006/09/27 [12:04]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는 지난 7월 16일부터 일주일간 태국과 버마 국경지대를 다녀왔다. 군부정권의 폭정을 피해 40여만명의 버마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양국 사람들이 그냥 뒤섞여 사는 여느 국경 도시와는 처지가 사뭇 다르다.

▲ 태국 왼쪽이 버마. 오른쪽은 라오스.
특히 9개 정글 속 캠프에 모여 사는 30여만명의 버마인들은 수용소 포로와 같은 삶을 강요받고 있다. 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했거나 소수인종이라는 이유로 폭정을 피해 국경을 넘었건만 태국정부마저 이들을 범죄인 취급하며 정글 속에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어서 그렇다.

48년 독립과 소수인종 탄압, 45년여의 군부독재, '버마의 5.18'이랄 수 있는 '8888민중항쟁'과 정글 속 학생들의 무장투쟁, 90년 총선과 10년 넘게 거듭되는 아웅산 수지여사의 가택연금 및 세계 속의 NLD, 그리고 버마인들의 오랜 침묵과 저항을 이 번 기행을 통해 다뤄보려 한다. - 편집자

 
7월 장맛비 공항 가는 길 가로막아
 
7월 16일. 버마 난민촌 가는 길은 녹녹치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새벽 공항버스를 타자마자 단잠의 유혹에 빠져드는 데 웅성거림에 눈을 뜬다. 88대로가 큰물로 막혔다는 것이었다. 운전사는 들릴 듯 말 듯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핸들을 꺾는다. 객석에서는 한참 소란이 이어졌다. 노량진으로 향하는 고가도로를 막 들어서는데 다시 통제 안내판이다. 한강대교를 넘어 강변북로로 진입하자 바리케이드가 막아선다. 술렁거림 속에 운전사는 어쩔 줄 모르기라도 한 듯 차를 이리 저리 되돌린다. 비행기를 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이 막 드는데 "걱정 말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강변북로를 탄 모양이다.

여행을 앞두고 속을 썩인 개 하나 더 있다. 셋이 동행하는데 종순 형(유종순, 버마 민주화를 지원하는 한국인모임 공동대표)은 나름의 지원금을 모아 해결했다. 김천직 PD는 회사(RTV)에서 취재비를 대 별 문제가 없었다. 나만 별무 대책이었다. 고민도 준비도 안 한데다 여비까지 속을 썩인다.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보니 여의치 않았다. 하기야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시간이 안 나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헌데 종순 형이 비행기 표까지 예약했는데 그냥 가잔다. 어떻게 해보자며 밀어붙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짐을 싼 것이었다.

▲버마와 국경을 이루는 태국 북서부 정글지대에 있는 멜라웅 난민캠프. 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나 카렌족 등 소수인종이 군사독재의 탄압을 피해 태국 국경지대에 모여 사는 곳이다.     © 최방식

이런 저런 이유로 외국을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태국과 버마는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는지도 모른다. 눈총을 받으면서도 태국 여행길에 나서야 할 이유가 애초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만두겠다고 하는데도 무작정 가고 보자던 종순 형의 설득이 왜 그리 고맙기만 하던지...

버마 난민촌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다. 20~40만명의 버마 사람들이 국경지역 태국 땅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그 것도 포로수용소 같은 난민캠프에 말이다. 시민운동 관련 언론에 몸담아왔던 터라 버마 군부독재와 이들을 피해 해외 피난길에 나선 버마의 민족민주동맹(NLD)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난민촌 이야기는 몰랐던 것.
 
전쟁포로 삶 강요받는 40만 버마난민
 
한국에는 NLD 조직원이 23명 있다. 부천역 인근에 사무실이 있다. 1990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정당에서 지구당위원장을 했던 이가 한국지부 의장을 맡고 있다. 신장투석 고통을 겪고 있는 르윈 부의장은 국제연대활동을 하는 한 자그만 시민단체를 취재하며 낯을 익힌 바 있다. 그는 88년 버마 민주화투쟁 당시 랭군대학 비밀 학생운동조직의 리더였다.

여행을 주선했던 모아, 샤린은 한국NLD 조직원으로 최근 열심히 활동하는 젊은 운동가들이다. 그들 모두는 한국에 둥지를 튼 지 10년이 넘은 이들이다. 대부분의 나이가 3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이니 약관의 나이에 독재정권의 폭정을 피해 한국에 정착한 이들이다.

▲태국의 북서부 지역. 왼쪽이 버마와 국경지대다. 왼쪽 맨 위 매홍손(Mae Hong Son)에서 지도 가운데(왼쪽) 메솟(Mae Sot)까지 지역에 9개의 버마 난민캠프가 있다. 20~30여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10년 넘게 이 땅에 거주하고 있지만 한국정부는 그 들의 법적 지위에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7명에게만 난민지위를 부여했다. 나머지는 거절해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다. 모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실로부터 난민 지위를 부여받았으니 한국의 난민정책이 얼마나 후진적인지를 가늠케 한다.

이들은 산업연수생 제도 등을 활용해 이 땅에 들어왔다. 조국 군부정권의 폭정을 피해야 했기에 필사적으로 외국 어딘가에 정착해야 했다. 말레이시아, 호주, 일본, 캐나다, 노르웨이, 태국 등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중 일부가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 NLD를 결성하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해왔다. 개인적으로는 이주노동자를 채용하는 사업체에 들어가 쥐꼬리만 한 월급에 각종 차별을 감내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그 중 일부는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월급에서 조금씩 뗀 회비로 사무실을 운영한다.
이들을 도운 한국인들은 꽤 있다. 부천의 석왕사가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국제연대활동단체, 이주노동자 관련 사무실 등도 이들을 도왔다. 정부가 난민지위 부여를 거부했을 때, 국제NGO들은 공동으로 법무부를 압박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일상적으로 돌보고 지원하는 네트워크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10년 넘게 한국에 갇혀 사는 이들
 
최근 몇 차례 모아, 샤린 등과 만나 개인적으로 호형호제키로 했다. 너무도 순박한 이들이다. 매일 일이 끝나면 사무실에 모여 NLD사업을 점검하고 자취방으로 가는 동생들이다. 10년 넘게 한국에 체류하고 있지만 친한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누구든 반기지만 친구가 돼 줄 한국인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이들에겐 고민도 많다. 나이가 적은 이가 30대 중반이니 모두 결혼 적령기를 넘겼다. 의장을 포함한 나이든 몇은 조국에 가족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팔청춘에 조국을 탈출한 이들이라 연예한번 못해본 이들이다. 이성을 그리는 마음 오죽할까 싶어 한국 여자하고 사귀어 보는 게 어떠냐고 물으니 '언감생심'이란 표정이다.

타향살이 10년에 가족들이 보고파 죽을 지경이지만 별 뾰쪽한 수가 없다. 한국 밖으로 나가면 재입국할 길이 없어서 그렇다. 한국 정부가 허가하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조국 버마로 가면 군부정권에 붙들려 감옥 행이다. 태국에 있는 지인이라도 보고 싶겠지만 태국정부도 여권이 없는 이들을 반기지 않는다. <연재(2)에서 계속>

최방식(국제전문기자, 본지 편집위원)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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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27 [12:0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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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게바라 2006/09/28 [01:49] 수정 | 삭제
  • 드뎌 연재를 하시는 군요.

    너무 많이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