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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 복장, 남자 즐기라고 입지 않는다
[정문순 칼럼] 작가 김훈의 문제적인 여성론, 제 손으로 제 뺨 치는 자기모순
 
정문순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지 않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글이 좋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돌아보게 하거나, 익숙한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낯선 글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흡수하기까지 뜸이 한참 걸리고 진땀 나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래도 그 고비를 넘어서서 나의 좁은 사고지평을 조금이라도 넓혀주는 글, 불편한 진실을 깨닫는 글은 얼마나 만족감을 주는가. 지적인 허영일 수도 있지만, 나의 생각이 한 뼘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골치 아프고 불편한 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모든 글이 창조적인 불편을 주지는 않는다. 처음 불편한 글은 끝까지 불편한 글로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내게는 작가 김훈의 여성론이 그렇다.
 
모든 지식인 남성들이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말하듯이 김훈도 자신이 반여성주의자이거나 여성이 싫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규정짓지 않는다. (물론 김훈은 오래 전에 남자들이 술기운을 빌어 취중진담을 하듯 글이 아닌 입으로 대놓고 여성을 비하하는 진심을 밝혔다가 호된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그는 글쟁이답게 세상이 모두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그 경험을 소설 ‘칼의 노래’ 집필로 생산했다.) 김훈은 대상을 열심히 관찰하고 눈여겨보는 사람이다. 그의 여성론은 여성을 살뜰하게 걱정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글은 교묘하다. 어떤 글에서는 친여성과 반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태도를 보이며 위태로운 인상을 주더니 끝에 가서 여성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보이는 전략으로 반여성의 인상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 지식인 남성이 여성에 대해 쓰는 글은 위태로우며 때때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전형을 보여준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긇이며>     © 문학동네

김훈은 <여자>라는 제목으로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여자1>이라는 글에서 여자의 화장을 길게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의 화장품을 잘 모른다. 콤팩트니, 파운데이션이니, 파우더니, 썬케익이니 하는 비슷하게 생긴 것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얼굴에 가끔 색을 입히는 나도 잘 모르는데 남자들은 오죽 하겠는가.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은 여자 화장품을 거울이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딱 두 개로만 구분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면서도 남자들은 그 복잡한 화장도구를 쓴 여성의 얼굴에 대해서는 세세한 부분에까지 관심이 많다. 남자들은 화장한 여성의 눈두덩이 색깔이 어떤지, 아이라인 색이 눈과 어울리는지, 입술 색깔, 볼 색깔을 어떻게 칠했는지 따위는 부지런히 관찰한다. 남자들이 여성의 복잡한 속옷 이름이나 종류는 몰라도 여성의 몸매엔 관심이 지대한 것과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민낯으로 다니는 여자나 속옷을 대충 꿰입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김훈도 “화장도구 세트 속의 브러시는 굵거나 가는 것들이 10여 종이 넘는다.”라고 썼다. 머리가 아플 것이다. 필시 김훈은 10여 종이 뭐가 뭔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브러시의 기능이 다양한데도 굵거나 가는 정도밖에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화장하는 여성을 묘사하는 데는 매우 치밀한 공력을 들인다. 
 
“비 오는 날의 새빨간 입술은 강력하고도 도발적인 존재감을 준다. ‘저기, 여자가 있구나!’라는 느낌이 불을 보듯이 분명해진다. 입술과 피부 사이의 경계선을 녹여내는 헤비핑크의 립스틱은 평화롭게 사람을 빨아들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만나는 입꼬리의 두 점이 기하학적 소실점을 이루며 소멸 직전에서 멈출 때, 크림슨레드의 입술은 그 얼굴이나 사람과 무관한 독자적인 여성성의 생물인 것처럼 보인다.” - 「여자1」,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화장에 공을 들이는 여자들이 이런 글을 본다면 자신도 몰랐던 무의식을 깨닫고 무릎을 쳤을까. “비오는 날의 새빨간 입술”, “헤비핑크의 립스틱”, “크림슨레드의 입술”, “푸른 아이섀도”가 이렇고, 저렇고……. 김훈은 화장을 묘사하기 위해 4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무덤도 끌어오고 신라 설화 속의 수로부인도 불러온다. 옷의 종류를 불문하고 몇년 째 립스틱 한 개로 버티는 나는 헤비핑크니 크림슨레드니 하는 빛깔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김훈이 고맙다.
 
김훈은 “여자들의 화장은 얼굴의 극세한 부분에까지 미친다.”라고 썼지만 정작 극세한 부분에까지 미치는 것은 여자들의 화장에 대한 자신의 집요한 관찰과 시선이다. 김훈은 ‘10여 종’이라는 뭉뚱그린 표현을 통해 화장 도구를 모르는 무지함은 드러내면서도, 화장한 여성의 외모 묘사에는 세세하고 집요하다. 이런 자기모순은 여성의 외모에 집착하거나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주체’가 아니라) 규정하길 좋아하는 남자들의 전형적인 시선에서 나온다.
 
여성의 화장이나 몸이 드러나는 복장을 ‘섹스어필’의 의도로만 보는 것도 불만스럽다. 김훈은 한여름 탱크톱이나 브래지어 끈이 드러난 옷차림에 “성적 활기”라는 시선을 갖다 댄다. 여자가 남자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화장에 공을 들이거나 노출 복장을 입는다고 보는 태도로는, 남에게 보여줄 리 없는 속옷을 야한 것으로 입는 여자의 심리를 결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196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을 벌였던 여성들이 무릎 위로 올라간 원피스를 입고 다녔을 때 오로지 남성들에게 ‘섹스어필’하고 싶은 욕망이 작동해서 그랬을까. 섹스어필이야 페미니즘 이전에도 있었지 않았는가. 오히려 페미니즘은 자신이 성에 대해 적극적일지언정 남성의 시선에 수동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성운동가들의 짧은 치마는 남성에게 자신을 봐달라는 유혹이 아니라 성을 포함한 모든 관습에 대한 과감함을 드러내거나, 수줍거나 다소곳한 인습적 여성성을 거부한다는 주체적인 의미가 강하다. 자신이 남자를 고르겠다는 것이지 남자더러 자신을 봐달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경우,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러 나갈 때는 숏팬츠를 입거나, 나를 꾸미고 싶을 때는 짧은 원피스를 입을 때가 있다. 남들이 어떻게 나를 보건, 나라는 사람이 젊고, 과감하고, 진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욕구가 그렇게 만든다. 그걸 딱히 성적인 것과 결부할 이유는 없으며, 성을 끌어온다고 한들 남자들이 상상하듯 성적인 자극을 주겠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화장이나 복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여성의 성적인 매력은 남자와 자고 싶다는 사인을 보냄으로써 남자들의 야릇한 시선을 수용하거나 남자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자신의 상품적 가치를 높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여름의 이글거리는 햇볕처럼 열정적이고 발랄하고 진취적이고 거침없는 삶을 추구하겠다는 태도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같은 이유로, 나는 모시옷을 흉내 낸 여름옷을 몇 년째 장롱에 처박아두고 있으며, 진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즐겨 입는 개량한복은 입고 싶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그런 옷은 내게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노쇠하고, 답답하고, 사고가 꽉 막혀 있으며, ‘꼰대’ 기질이 있다고 느끼게 한다.
 
김훈이 탱크톱이나 브래지어 끈이 보이는 옷차림을 묘사하는 데 동원한 ‘성적 활기’, ‘성적 매력’, ‘유혹적’, ‘혼란’, ‘아득함’, ‘에로틱’, ‘도발’, ‘메릴린 먼로’ 등 온갖 현란한 성적인 언어들은(‘여자4’), 하나같이 여성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여성을 보는 사람(남자)의 욕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김훈은 더 나아가 탱크톱이 “감추려는 가슴 부분을 오히려 더 드러냄으로써 (…)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대단한 통찰이다. 이왕 철학적 통찰력을 발휘할 양이면, 감추려는 가슴 부분을 오히려 더 드러낸 것은 탱크톱으로 갈 것도 없이 브래지어가 먼저 그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브래지어의 애초 기능은 가슴을 가리는 것이었지만 심을 넣고 크기를 풍성하게 하면서 오히려 가슴을 더 부각하는 것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비쩍 마른 몸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큰 젖가슴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꿈꾸는 환상이며 그것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 브래지어다.
 
속살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 입는 속옷이 있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이것은 슬프다. 숨김이 노출로 기능이 뒤바뀐 옷이라면 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압박이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읽어내야 한다. 숨김을 드러내기로 바꾸기를 강요하는 시선은 몸을 가리려는 여성의 속옷을 어떻게든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은 남성의 것이다. 김훈이 브래지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탱크톱에게서 숨김과 노출의 이중성을 발견했다면 "감추려는 가슴 부분을 오히려 더 드러”내도록 압박을 받는 여성의 몸에 대해 연민을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모순 속에서의 긴장”을 즐겨야 할 일이 아니다.
 
여자의 몸을 시선으로 즐기거나 소비하는 남자는 정작 자신의 몸은 어떻게 규정하고 소비하는가. 여성의 몸을 언급할 때는 어떻게든 성과 결부시키는 남자들은 정작 자신의 몸을 말할 때는 성과 관련한 부담감이 전혀 없다. “지난 여름에는 핸드폰을 티셔츠 윗주머니에 넣고 다녔더니, 신호가 올 때마다 젖꼭지가 부르르 떨렸다.”(「신호」, 『라면을 끓이며』)라는 문장을 보라. 이 글 한 편에서 김훈은 자신의 젖꼭지를 7번이나 언급한다.
 
김훈의 글에서 자신의 젖꼭지는 성이 아니라 소통의 은유다. 남자의 젖꼭지가 여성의 것처럼 성적인 의미로 통용된다면 이렇듯 과감하게 언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성을 성적 존재로 보는 남자가 자신의 몸을 언급할 때는 성의 의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여자의 젖꼭지는 섹스이고 성적 유혹인데 왜 남자의 젖꼭지는 다른 의미인가. 젖꼭지라는 낱말 하나조차 편하게 쓰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을 남자들은 알까.
 
여성의 몸을 세밀히 관찰하는 김훈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결국은 일종의 관음증과 다르지 않다. 대상을 정밀하게 스케치하는 것은 기자 출신으로서 그의 장기로 보이지만, 그 세밀함의 기초는 허약하다. 그의 글은 여성을 성적 존재, 그것도 수동적 성의 존재로만 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빗겨가지 않는다. 화장품을 잘 모르고, 화장을 자주 하지 않으며, 짧은 치마를 입을 때 남자의 시선을 즐길 생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그의 글에서 찾을 수 없는 여자다. 이런 것이 개별화의 무시요, 사물화다.
 
낱낱 여성의 개성과 빛깔은 몽땅 지워지고 모든 여성은 그저 하나로만 통칭되는 것. 그는 무슨 권리로 여성 전체를 뭉뚱그려 획일화하는가. 그러면서도 미스코리아 대회가 여성을 사물화하고 있다고 걱정하고 여아 낙태를 개탄한다. 김훈이, 젊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한껏 칭찬하는 입으로, ‘아줌마’로 불리는 여성들에 대해 “여성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사내들의 성적 시선의 사슬을 끊어버린 자유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그런 ‘사내’가 아님을 강조하는 알리바이일까 아니면 여성을 속박하는 사내가 되지 않기 위해 그 자신을 경계하는 태도일까. 김훈이, 보이는 자의 시선에서 여자의 몸을 한껏 세필화로 그리듯 묘사해놓고는 ‘보여지는 것’보다 ‘드러나는 것’이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여자들을 훈계할 때 그의 글은 제 손으로 제 뺨을 치는 자기모순으로 헝클어지고 있다.
 
지식인 남성이 여성에 대해 쓰는 글은 위태로우며 때때로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자신이 마초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보다 아닌 척하면서 교묘하게 여성 비하 의식을 속에 감춘 남성이 해악이 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위험한 정도를 따지자면, 미사여구로 치장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더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성의 자리가 요지부동 그대로인 현실은 자신의 본색을 감춘 지식인 남성들 탓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일베’가 하늘에서 똑 떨어지듯 괜히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기사입력: 2016/08/04 [10:36]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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