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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世紀映畵讀本] 타잔 (Tarzan)
 
박수철   기사입력  2002/03/20 [13:29]
{IMAGE1_LEFT}'Two Worlds, one Family' 디즈니 애니메이션 '타잔'의 이야기는 필 콜린스(Phil Collins)의 노래 가사 한 마디로 압축된다. 디즈니이기에, 할리우드이기에.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디즈니의 이번 전략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그 동안 숱하게 알고 있는 '가족주의'의 강화와 강한 미국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신보수주의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인간과 동물을 포괄한 그러한 모습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기까지 하다.

Two Worlds
인간 세계와 침팬지 세계. 이 두 세계의 유사성으로부터 디즈니의 이번 애니메이션은 출발한다. 분명 원작이 있는 타잔 이야기지만 원작에 있는 타잔의 모험극은 이번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다. 대신 自我에 대한 정체성과 가족에 대한 고민이 타잔이 안고 있는 고민이다. 자아의 정체성이라......이것은 분명 엄청 머리 아픈 이야기이다. 나란 어떠한 존재인가. 하지만 디즈니의 여름 영화 시장의 선봉인 '타잔'은 이런 고민을 결코 길게 가져가지 않는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철학책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가족주의로 연결되고, 유사하지만 분명 다른 침팬지 세계와 인간 세계는 모성애로 연결된다.

One Family
두 개의 세계, 침팬지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잇는 架橋는 가족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개의 세계가 과연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이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물론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전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이란 게 그리 나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이 문제에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그래.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해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무리한 가족주의의 설정은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 넘기려고 해도 자꾸 눈에 거슬린다. 누구를 위한 가족주의인가.

{IMAGE2_RIGHT}디즈니의 前作 애니메이션인 '알라딘(Aladin)'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던 적이 있다. 양탄자를 타고 날라 가는 '알라딘'의 모습과 그의 속도감에 너무 놀랬기에. 하지만 '알라딘'에서의 속도감은 지금의 '타잔'에 비교하면 습작이었다 볼 수 있다. '타잔'에서 마지막 장면 타잔이 줄을 타고 밀림을 왕래하는 장면의 속도감은 정말 이제 디즈니의 한계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속도감과 더불어 배경 그림들의 입체적 움직임은 거의 빈틈이 없었다. 그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서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정교함과 기술적 발전에 1시간 30분 여를 투자하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니까.한 가지 웃긴 것은 인간과 동물을 같이 놓고 보니, 디즈니의 장기인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구사할 수 없었던지, 이번 '타잔'은 뮤지컬이 아니었다. 그 대신 노래 잘 하는 필 콜린스의 노래가 주제 음악으로 영화 전편에 깔리고 있었다. 디즈니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구나. 큭큭......

더 웃긴 것은 미국의 'Time'誌가 '타잔'을 극찬했다는 점이다. 전통 영화의 훌륭한 복원이라나, 뭐라나. 역시 초록은 동색이다.  

* 본 글은 대자보 17호(1999.7.25)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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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20 [13: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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