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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목사’ 홍근수, 그 험난한 여정과 민족사랑
반미투사에서 통일목사로, ‘예수와 민족’ 자서전 낸 홍근수 목사 이야기
 
이재봉   기사입력  2004/10/02 [13:02]
 흔히 "통일 목사"로 불리는 홍근수 목사가 향린교회에서 은퇴한지 1년여만에 {예수와 민족}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펴냈다. 그가 좀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가 걸어온 치열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더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다. 존경해온 분의 책에 대해 논평을 하게 된 것은 영광이지만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듯하다. 학술 서적은 아니지만 법학, 신학, 목회학, 철학을 두루 연구하며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진 분의 책을 정치학만 공부해온 사람이 평가한다는 것부터 부담스럽다. 특히 기독교 신앙심이 거의 없는 데다 성경 한 구절 제대로 새겨보지 못한 내가 목사의 목회 활동이나 신학자의 성경 해석에 관해 비평하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겠는가.
 
  홍목사와 나의 관련성을 찾자면 '통일 운동' 분야일텐데, 그는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 감옥 생활까지 하며 20년 가까이 서울에서 전국적인 대규모 통일 운동 단체들을 이끌어왔고, 나는 문민정치가 어느 정도 정착된 뒤 몇 년 동안 지방에서 소박하게 통일 운동에 발 한쪽 정도 담그고 있을 뿐이다. 굳이 공통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둘 다 미국에서 10여년 공부한 뒤 그는 '반미 투사'가 되어 귀국하고 나는 '반미 학자'가 되어 돌아와 미국에 대해 비슷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랄까.
 
  홍목사는 사주팔자부터 통일 운동과 인연을 맺은 모양이고 나와도 묘한 인연이 있나 보다. 생일이 1937년 8월 15일이라는데, 작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큰형이 1937년생이고 큰형수가 8월 15일생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에 대해 그는 "민족의 광복절에 태어났다는 것이 나의 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될 때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마침 1937년은 소띠해라 소처럼 묵묵하게 열심히 민족 통일 운동을 하라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듯하다.
 
▲홍근수 목사의 자서전, 예수와 민족 : 내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     © 한들
  유교와 미신이 지배적인 문화였던 부산 변두리 마을의 환경 속에서도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어른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풍금 반주도 했으며, 고등학교 다닐 때는 기독학생회와 신앙동지회 등을 만들어 이끌기도 했던 그는 이미 그 때 목사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희망은 오로지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에 의한 사회적인 일대 혁신 또는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또한 그 무렵 진보적인 월간지 {사상계}를 읽으며 독일의 본회퍼나 일본의 우찌무라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니 그는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꽤 조숙했던 듯하다. 이렇듯 그는 겨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회를 개혁하여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이 사회를 제대로 바로 잡는다"는 생각을 품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데, 그는 이를 두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했노라고 회상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신학대학으로 직행하지 않고 법학대학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평범한 목사가 아니라 "개혁적이고 참다운" 목사 그리고 "옳고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의 구원보다는 민족적 구원을 위한 목회자, 마틴 루터나 존 칼빈 같은 "위대한" 개혁자, 모세처럼 민족 해방과 구원 등의 "큰일"을 하는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판검사나 변호사를 꿈꾸지 않으면서도 서울대 법대를 다니게 된 사연이다.

  여기서 일종의 아쉬움이 생긴다고 할까. 요즘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가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되고 있는데, 얼마 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연이어 밝혔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가 서울대 법대를 나와 "개혁적"이거나 "옳은" 법관이 되었다면 아무리 사법부가 보수적인 집단이라 할지라도 저런 수구 극우적인 목소리는 조금이나마 걸러지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법대를 졸업한 그는 신학대학원을 선택하면서 다시 한 번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예수교장로회 측의 장신대로 진학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기독교장로회 측의 한신대로 입학을 한 것이다. 서울대 4학년일 때 장신대 이사장이던 강신명 목사 집에서 가정교사를 한 데다, 아버지가 소속되어 있던 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로부터는 장신대에 입학하면 장학금을 주고 졸업후에 유학을 보내주며 유학을 마친 뒤엔 신학교의 육성을 맡기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자유주의적 교육"을 지향하던 한신대로 진학을 한 것이다.

  법대 다닐 때 기독학생회 운동을 하며 만난 문익환 목사가 당시 한신대 교수였다는 것도 그가 한신대를 선택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91년 장신대를 다녔던 내 조카 부부에 따르면, 그 때 학생회에서 문익환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가지려고 했는데 학교 당국에서 거절했단다. "위험인물"이란 이유로. 같은 장로회라 할지라도 예장과 기장은 이렇게 차이가 컸던 것이다. 아무튼 홍목사는 당시 부모님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자매들이 몸담고 있던 예장을 거부하고 당시 "이단적인 신학" 또는 "신신학"을 가르친다는 기장측 한신대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예장의 보수적 그리스도인이 기장의 진보적 그리스도인으로 바뀌게 된 것을 두고 "혁명적 전환"이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신학 교육을 받으며 "홍회퍼"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본회퍼를 존경하였으며, 앞에서 소개한 우찌무라 외에 성 프란체스코와 마틴 루터 킹 등도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나도 평화학을 공부하고 평화 운동을 하면서 우찌무라의 무교회운동과 평화사상을 조금이나마 접했고 간디와 킹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흔히 "과격하다"고 알려진 홍목사가 과격한 방법보다 평화적 방법이 좋다며 킹 목사를 존경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간디나 킹의 비폭력 저항을 '무저항'이라고 오해하는데, 무저항은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이지만, 비폭력 저항은 불의나 부정에 저항을 하되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목사가 이념적으로는 다소 과격할지 몰라도 정의와 개혁을 추구하는 방법에서는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인 이유이리라. 아무튼 그는 이런 인물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이타적인 존재 그리고 개인보다는 민족과 인류 전체를 위한 존재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주로 현대신학 분야를 공부하는 가운데 해방신학을 접하였다고 한다. 그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남미의 해방신학에 바탕을 두고 신학자 겸 목회자 안병무가 민중신학을 발전시키고, 이 민중신학에 영향을 받아 신학자 겸 목회자 홍근수의 '통일신학'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의 통일신학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특히 기독교인의 정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누가복음]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그가 무신론자이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블로흐에게 심취하게 된 배경이나 과정은 참 인상적이다. 남북이 통일을 이루려면 남쪽의 기독교와 북녘의 공산주의가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려면 상대방 즉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것을 일찌감치 예견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뼈아프게 생각하면서 진정한 통일운동가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할까. 내가 1960년대에 초등학교 다닐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반공방첩"이나 "승공통일"이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녔듯,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반공이나 승공 또는 멸공을 외치고 있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식상할 정도로 널리 인용하면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못 가르치거나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공산주의를 반대해야 하고 이겨야 하며 멸망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한심한 뿐이다. 그런데 홍목사는 이 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공산주의를 공부했던 것이다. 아직도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빨갱이"로 처벌받을 각오를 해야하는 정신나간 세상에서 대단한 선각자였다는 생각에 더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다.

  홍목사가 1980년대초 귀국하여 명동 향린교회에 부임한 뒤 교회 및 사회 개혁을 위하여 예배 의식에 국악을 도입하고, 국악 찬송가를 만들었으며, 실질적인 담임 목사 정년 제도를 마련해서 미련없이 정든 교회를 떠나고, 통일공화국 헌법을 만든 일 등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 대신 앞으로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기독교 강의를 하거나 개성공단에서 목회를 펼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소개하며 "통일신학자"로서의 꿈이든 "통일목사"로서의 꿈이든 머지않아 꼭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나는 한 때 열성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조카에게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라며 손찌검을 한 적도 있고, 지금도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애매한 회개와 개인 구원을 주로 강조하는 속좁고 보수적인 개신교의 양적 팽창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통일연대]의 상임대표인 한상렬 목사와 [여성단체연합]의 상임대표인 이강실 목사 부부가 이끄는 전주고백교회에서 해마다 서너 차례 강연을 해오고 있는데, 몇 해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백교회 같은 교회라면 우리나라 모든 건물에 십자가가 세워져도 기꺼이 환영하겠다." 이에 한 마디 덧붙인다. "홍근수 목사 같은 분이 목회를 한다면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도가 되어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겠다."

* 이 글은 9월 11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홍근수 목사의 {예수와 민족} 출판기념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금 고쳐쓴 것입니다.
* 필자는 원광대 교수로서 ‘남이랑북이랑’의 편집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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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02 [13: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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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일 교무 2004/10/19 [11:14] 수정 | 삭제
  • 좋은 글 읽었습니다
    통일과 평화의 조국......그 날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