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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무장세력의 테러전술과 총선정국
테러는 미국패권 강력한 저항수단, 총선에서 '파병반대세력' 키워내야
 
홍기빈   기사입력  2004/04/10 [18:50]

한국의 목사 등 민간인들이 이라크에서 곤욕을 치르고 풀려났으며, 일본의 3명 민간인의 경우엔 인질로 잡혀서 일본 정부가 파병을 철수하지 않으면 “산 채로 불에 태워질”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러한 사태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병 철회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러한 판단의 배경에는 현재의 사태가 “테러”라는 일종의 “범죄” 사건이므로, 그와 같은 “우발적인” 건을 이유로 “파병”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사업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 “테러”는 90년대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 군사 질서에 대항하는 주된 “전쟁 수단”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며,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채 대규모의 파병을 하고 있는 한국과 같은 경우가 특히 취약하게 노출되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라크 파병으로 인해 이번 “테러”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위협은 우발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며칠 앞으로 다가 온 총선은 이라크 파병으로 이러한 현실적 위협에 노출될 우리들이 파병에 대한 분명한 국민적 입장을 보이는 계기로 자리 잡아야 한다.

1. 90년대 이후 미국 주도 세계 군사 질서의 성격

근대 민족 국가는 막스 베버의 지적대로, 근본적으로 “폭력의 집중”에 근거한 군사적 조직이다. 이 조직은 구성원들 스스로의 “집단적 안전”을 위하여 전쟁에 소요되는 인명과 물자를 공급할 각오를 가지고 있는 “국민”들의 통합을 그 조직의 기본으로 삼는다. 모든 국가들은 그 구성원인 “국민”들이 원하는 한,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주권(sovereignty)”을 갖게 되는 셈이다. 또 반대로, 그 “국민”들의 의사의 총합인 “주권”이 용납하지 않는 군사적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국제 체제는 이렇게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충만한 “위험한 고슴도치”들인 근대 민족 국가들이 병존하면서 자아내는 군사적 “무정부 상태”를 그 기본적인 조직 원리로 삼아왔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냉전 하의 미국 패권의 세계 질서가 성립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군사 질서의 원리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자유 진영”의 모든 국가들의 가장 임박한 위협은 바로 “공산 진영의 공세”가 되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을 중심에 놓고 자신들의 자체적인 군사력을 재배치할 것을 합의한 것이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며, 그 밖에도 아시아와 남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들은 미국 주도의 군사 질서 재편에 한 요소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즉, 각국은 “공산주의 위협에의 대처”라는 초국가적인 공동 이익을 위해 자국의 “군사적 주권”의 일부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냉전이 종식되면서 이러한 기존의 미국 중심의 “초국가적 군사 질서”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의 북극곰”이 사라진 이상, 이제 각국은 “비상 사태”였던 냉전 시기 일부 포기해야 했던 군사 주권을 다시 찾아서 2차 대전 이전과 같은 고전적인 국제 체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 프랑스 같은 경우는 현재까지도 그렇게 될 것을 주장하면서 나토(NATO)가 미국으로부터 더욱 독립될 것을 주장하며, 또 이는 독일 등의 유럽 국가에서 상당한 동의를 얻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국제 정치학자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같은 사람은 “이제 세계 질서는 다수의 군사 강국들이 병존하는 불안정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예측한 적도 있다.

90년대에 걸쳐서 미국의 역대 정권은 이러한 원심력의 경향을 극복하고 기존의 미국 주도의 세계 군사 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미국 주도의 군사적 질서의 기반 위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소위 “지구적 통치(global governance)”의 명분으로 미국 주도의 “지구화” 질서를 구조화시켜올 수 있었다. 요컨대, 레이건과 부시의 “팔뚝”이 없었다면 클린턴과 고어의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91년의 1차 걸프 전의 특징과 그 중요성을 음미해야 한다. 이는 소련이라는 위협이 사라진 뒤에도 전 세계 국가가 미국의 주도하에 통일된 군사적 행동을 조직할 질서를 마련하는 일종의 “동원 체제” 가동의 시험으로서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은 그 이후 99년의 세르비아 공격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공격 패턴을 가동하여, 드디어 네그리(Negri)와 하트(Hardt)같은 이들이 “제국(Empire)”이라고 불렀던 “지구적 경찰 체제”를 구축한 바 있다.

이제 미국은 이 “지구적 경찰 체제”를 통하여 개별 국가 내부의 “국민”들의 합의에 크게 구속되지 않고도 그 개별 국가로 하여금 물자와 병력을 내놓도록 할 수 있는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름 아닌, 지난 몇 백년 동안 절대 권위를 주장하던 단위였던 전통적인 “주권 국가”들 위에 군림하는(supranational) 군사적 체제의 가능성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특히 세 가지 정도의 요소가 아주 중요하였다. 첫째, 미국은 마치 고대 중국 춘추 시대의 오패(五覇)처럼, “개별국의 이익의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촌 전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을 규정하는 주도권을 계속 보유하였고 이를 정당화의 기제로 활용하였다. 둘째, 세계 각국의 지배 계급에는 이미 오랜 냉전 시기 동안 미국과 이익을 공유하는 층의 네트워크가 두껍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가동하여 개별 국가 내의 여론이 미국과의 공동 행동을 자국의 “국익”과 동일시하도록 움직일 수 있었다. 셋째, 지구적 미디어의 효과적 동원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으깨진 머리통과 잘려나간 팔다리가 뒹구는 적나라한 폭력의 장이기에,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아주 임박한 위협이 닥쳤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특히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심지어 미국 국민 자신들마저) 자국 군인들을 보내는 일에 선뜻 찬성하지 않는다. 1차 걸프전에서 혁혁한 성공을 거둔 바 있듯이, 지구적 미디어는 엄청난 물량의 이미지 조작을 통하여 전쟁에서 베트남 전쟁 때와 같은 “피와 죽음의 냄새”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덕에 이제 전쟁이나 파병은 압도적인 기술과 장비를 갖춘 미국과 다국적 군이 손쉽게 “악의 무리”를 제압하는 일종의 “올림픽” 스포츠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 것이다.

인간 역사에서 정말로 전대미문의 전쟁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어느 날 지구 모처를 분쟁 지역으로 지목한다. 그러면 미국의 미디어와 이런 저런 사이비 국제 NGO 들이 일제히 입을 열어 도덕, 인권, 여성, 평화, 환경 기타 등등의 각도에서 왜 “정의로운 무력적 개입”이 필요한 지를 역설한다. 미국은 사안에 맞게 여러 나라에 공동의 군사 행동을 제안 혹은 강제한다. 그러면 미국의 매체는 다시 한번 이 전쟁을 해리슨 포드 대통령의 지휘 하에 멜 깁슨 중장, 브루스 윌리스 대위, 맷 데이먼 일병, 또 소피 마르소 간호 장교 등이 출동하는 전쟁으로 채색한다(폴 베호벤 감독의 영화 “스타쉽 트루퍼(Starship Trooper:97년 작)”는 이 점에서 90년대의 주요한 국제 정치 텍스트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

각국에 포진한 친미 세력은 여기에 동조하여 그것이 “국익”이라고 자국 내의 여론을 주도하고, 그와 유착한 각국의 지방 미디어는 거기에 동조하거나 침묵함으로서 여론을 호도한다. 결과, 파병국의 국민들은 자기 나라가 무슨 올림픽 대회에 출전하나부다 하는 정도의 느낌으로 방송에서 신나게 보도하는 전황을 넋놓고 보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다. 그리고, 공격당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전 인류의 이름으로” 쏟아지는 각종 폭력 앞에 가족과 머리통과 팔다리를 잃는 것 말고 별다른 방도가 없다 ? 그런데 정말로 아무런 대응 책이 없을까.

2. “이지메”의 군사학과 전술로서의 테러

“이지메”는 n명의 집단에서 n-1 의 숫자가 뭉쳐서 그 배제된 1인에게 별 이유 없이 무차별의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이다. 그 1인은 물리적으로도 또 명분으로도 완전히 무력화되어 저항의 엄두를 내지 못한다. n-1은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이 아무런 저항없이 그 대상의 몸에 작렬하는 것을 보면서 희열감과 함께 점점 더 그 강도를 올리게 된다. 이 때 그 1인이 취할 수 있는 군사적 전략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 열쇠는 그 n-1인의 마음 속에 “폭력의 실재감”을 심어주는 것에 있다. 일 대 일의 “맞장”의 경우엔 자신에게 다가올 폭력의 실재감을 아주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며 패싸움의 경우도 고독감이 좀 덜어질 뿐 폭력의 실재감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지메와 같이 익명의 다수가 완전히 저항 불능의 1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 그 다수는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재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되고, 일종의 “놀이”라는 느낌조차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 한 명을 딱이 미워할 절실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익명의 폭력에 참여하게 되고, 이지메는 결국 “집단적 스포츠” 같은 성격까지 갖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그들 개개인들에게 “폭력의 실재감”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n-1의 집단은 순식간에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 이지메와 맞싸운 예로서 일본의 교육 현장 등에서 보고되는 경우를 보면 이러한 논리가 실제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되는 이지메로 몰릴 대로 몰린 학생 중 일부는 그 n-1 중 아무나 한 명을 찍어서, 자신이 집단에 의해 시달림을 당할 때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불시에 그 찍힌 한 명에게 엄청난 폭력을 쏟아 보복하는 전략인 것이다. 실로 섬뜩한 예들이 많다. 조용한 수업 시간 도중에 느닷없이 다가가서 그 지목 대상의 등짝을 샤프 펜슬로 찍어버린다든가 등등. 조금 지나면 그 찍힌 한 명은 그 이지메 대상 이상으로 심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 섬뜩한 모습을 보면서 “폭력의 실재감”을 느끼게 되면 n-1의 나머지 구성원도 급속히 해체된다는 것이다.

90년대에 미국이 구축했었던 그 세계적 규모의 군사 동원 질서의 한계는, 그것이 기존의 군사적 단위인 근대 민족 국가를 극복한 지구적(global) 혹은 초국가적(transnational) 인 것, 이를테면 UN 직설군이나 중세의 성당 기사단(Templar Order)이 아니라, 여전히 근대 민족 국가를 기본 단위로 구성된 다는 것에 있다. 즉 여전히 구체적인 물적 인적인 군사 동원의 단위는 민족 국가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국제 NGO, 미디어, 친미 네트워크 등을 동원하여 “지구적” 규모의 담론에서 그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해도, 개별 민족 국가의 성원들 내부에서 그 정당화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래로부터 붕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개별 민족 국가의 성원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닥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악착같이” 이라크에 군사를 보낼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부시가 명분으로 내건 “대량 살상 무기” 따위의 정당화의 기제는 허위였음이 밝혀졌다. 미국과의 공동 행동에 “국익”이 있다는 선전은 막연하게 밖에 다가 오지 않는다. 결국, 주효한 것은 “파병이란 일종의 국제 친선 도모 올림픽 같은 것이다”라는 식의 이미지 조작이 될 수 밖에 없다.

지금 곤욕을 치르고 있는 일본의 경우가 바로 그 “자위대 파병”의 이미지 메이킹에 있어서 훌륭한 모범이었다고 할 것이다. 일본의 보수 세력은 90년대 중반 오자와 이치로(小澤 一次郞)의 소위 “정상 국가론” 이후 자위대 파병이야말로 “국제 사회에의 공헌”이라고 줄기차게 호도해왔다. 올초부터 이루어진 일본 미디어의 이미지 메이킹을 보면, 그 옛날의 청춘 트리오 “소녀대(少女隊)”의 이미지까지 차용하여 이라크의 자위대 파병이 바로 세계로 도약하는 일본의 참신한 모습인 것 처럼 보이게 하였고, 젊은 층에게는 콧수염 달린 어느 꽃미남 청년 장교의 팬클럽까지 만들도록 붐을 조장하는 한편 장년층 이상에게는 올해가 러일전쟁 발발 1백주년 (明治시대 일본이 세계 강국으로 확립된 계기가 이 전쟁이었다)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최근까지 이라크 파병은 일본 정치 사회 전체의 보수화와 맞물려 상당히 순탄히 진행되었다.

그런데 엊그제 이라크의 무장 세력에게서 바로 이 섬찟한 “이지메”의 군사학의 논리를 그대로 체현한 것 같은 메세지가 청천벽력처럼 날아든 것이다. 이 메세지는 먼저 “일본인들과 우리들은 아무 원한도 없으며 우리들은 일본인들을 친구로 여겨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엉뚱하게 미국인들과 우리들의 전쟁에 너희들이 끼어들었음”을 강하게 추궁한다. 그리고 나서 메세지는 파병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이 세 명의 애꿎은 일본인을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선언한다. 이 비디오 메세지의 배경 영상 화면에 보면 복면을 한 자들이 쓸데없이 긴 칼까지 번득이면서 그 “폭력의 실재감”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방송되지는 않았으나, 알 자지라 방송에 들어간 그 비디오에는 일본인 중 한 명이 얼굴 가리개를 뗀 모습도 담겼다고 하는데,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린 모습이라고 한다.

실제의 전쟁에는 해리슨 포드도 소피 마르소도 없다. “산 채로 불에 타는” 정도의 폭력은 소이탄 세례를 받는 이라크 전장의 민간인들이 숱하게 보고 듣고 경험한 바이다. 테러는 미디어와 정치가들의 얍실한 말솜씨에 홀려 어리벙벙한 채 전쟁에 참가해버린 나라 국민들에게 바로 그러한 “폭력의 실재감”을 안겨 주는 대단히 효과적인 전술이다. 과연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파병 국가의 국민들 중에 “산 채로 불에 타죽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이라크를 때려잡겠다고 나설 사람이 몇 이나 될까. 실로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은 테러 세력과 미국 중 누가 옳고 그른가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들의 국가가 이러한 상황으로 자신들을 밀어넣는 짓을 막으려 들 뿐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 주도의 군사 질서는 그 구성 단위인 민족 국가의 밑바닥으로부터 붕괴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한 달 전 스페인에서 터졌던 폭탄 테러에서 현재 일본의 경우에까지 보이고 있는 양상이다. 분명히 목전의 폭력을 휘두르는 대상은 따로 있건만, 사람들의 분노는 정권을 향하고 있으며 나아가 결국 파병을 둘러싼 개별 국민 국가 내부의 정당성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은 그 결과 정권이 바뀌고 말았고 새로 들어선 정부는 파병 철수를 선언하였다.

일본의 고이즈미 정부도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만에 하나 정말로 그 3인에게 불상사라도 벌어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게 안팎의 진단이다. 벌써 이시바 시게루 방위청 장관은 최초의 태도를 바꾸어 이라크 파견 특별법의 이런 저런 조항을 구실 삼아 파병 철회를 서서히 운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스페인이나 일본과 같은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파병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하는 나라들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의 이라크 인민 무장 봉기와 맞물려 전황은 급격히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불가피한 인력 증강에 있어 심한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각종 민간인 “테러” 사건은 “범죄” 따위의 우발적인 성격의 사건이라고 보기 힘들다. 현 상황에서 이라크의 무장 세력이 미국 주도의 다국적 군의 전선을 교란하는 대단히 성공적인 전술의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미국 지배 세력은 개별 민족 국가들을 마치 적당히 회유 강제하면 마음대로 인적 물적 자원을 뽑아낼 수 있는 상자처럼 여기고 있지만, 사실 민족 국가란 가족과 친척이 있고 겁도 많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집단일 뿐이기도 하다. 이 “테러” 전술은 바로 이러한 맹점을 노리고 미국 주도의 다국적 군을 밑으로부터 붕괴시키려 드는 전술이며, 스페인과 일본의 경우에서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방금 전에도 미국과 이탈리아의 민간인들이 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결코 우발적인 “해프닝”으로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3. 총선을 앞두고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현재 3000명이 넘는 대규모 전투 병력 파견을 앞두고 있는 우리 나라의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파병 결정 과정에서의 국민적 정당성 획득의 과정이 어떠했는가이다. 최소한 파병을 둘러싼 이런 저런 논의와 야당의 반대 등이 국회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논의된 일본의 경우와 비추어보았을 적에 노무현 정권이 보여준 파병 결정 과정은 실로 근대 국가의 절차적 정당성 자체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결정의 주도권은 “미국과의 공동 행동만이 한국의 국익”이라고 믿는 국적 불명의 세력들이 쥐고 있었다는 점이 지금와서 명확해졌고, 청와대와 여당이 했었던 일은 그것에 대해 국민들이 토론과 합의의 역동성을 빌어 견제할 가능성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것 뿐이었다.

둘째, 파병 문제에 있어서 정권에 대한 미디어 세력의 적극적 소극적 헙조라는 점에서도 일본의 경우를 능가한다고 하겠다. 청와대 주변의 일부 어용 매체 세력은 파병이 “비전투병”이라는 현실호도를 적극적으로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수구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개혁”으로 분류되는 매체들조차 대부분 2차 파병안이 통과되던 시점에서 현재까지 오로지 총선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 민간인을 “산 채로 불태우는” 곳에 3000명을 파병하는 이 심각한 마당에 대부분의 매체들은 어제 오늘도 야당 대표와 어느 방송인의 하찮은 말다툼을 1면 톱으로 다루고 있다.

셋째, 파병의 규모와 성격에 있어서도 우리는 일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500명 규모의 정말로 진성의 재건부대인 일본의 경우에 비하여, 우리는 3000명의 최정예 병력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파병의 내용이나 시기 비용 등은 의회에서 모조리 “백지 위임장”으로 나온 상태라서, 최근의 파병 지역 결정 소동에서 보듯 궁극적으로는 미군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병의 이러한 현재의 성격으로 볼 때, 무장 세력이 실제로 “전술로서의 테러”를 사용할 경우 한국 국민들이 그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첫 단추부터 엉망으로 시작되어 현재 심각한 내외의 위기에 노출된 한국의 파병안을 놓고, 현재 정부와 의회의 파병 고수 세력들의 주장은 “국제 사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병을 예정대로 진행한다”이다. 여기서 필자가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는 사태는 단지 숱한 한국의 민간인들의 테러의 표적이 되는 것 뿐이 아니다. 실제로 불상사가 일어났을 경우 우리 나라의 국가 전체가 그 정당성에 있어서 심각한 근원적 위기에 닥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논의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국민들과 장병들이 “산채로 불에 타건 말건”, 그 정체도 애매한 나라 밖 세력의 요구에 충실하는 것이 “국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쥐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실제로 몇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다고 해도 순순히 파병 철회에 동의할 것 같은 이들이 아니다. 이런 이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 사회라면, “국익”의 문제를 놓고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두 개의 집단이 맞서게 되는 좀 더 근원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총선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능동적으로 타개해나갈 절호의 기회이며, 반드시 그렇게 활용해야만 한다. 미국은 각국의 친미 세력들을 포섭하는 한 편 지구적 미디어를 동원하여 개별 국가 성원들의 파병에 대한 합의의 문제를 우회하고 희석시켜왔다. 그리고 이라크의 무장 세력은 그러한 약점을 이용, 파병 국가의 시민들을 각종 “테러”의 전술의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참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서 함께 풀어가야 한다. 그리고 며칠 후로 다가온 총선은 지금까지 조직적 체계적으로 훼방당한, 그 파병 문제의 “국민적 합의”를 일구어 낼 마지막 기회이다.

파병 문제에 있어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파병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는 자들은 더 이상 그 애매한 “국익”이니 “국제적 약속”이니 하는 말 뒤에 숨지 말고, 왜 우리 중 몇 명이 “산 채로 불에 탈”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파병을 해야 하는지의 논리와 근거를 유권자들에게 공공연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화 개혁 진보” 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명확하게 파병 반대의 입장을 국민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현재 이 험악한 상황에서 대규모 파병을 앞둔 한국의 우리들에게 달리 생각할 여유란 없다.

파병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여기서 “동요하지 않고 일관되게 파병 철회를 관철시킬” 세력의 핵심을 반드시 구성해야 한다. 파병 문제가 총선의 쟁점으로 떠오름을 감지한 일부 열린 우리당 의원들은 슬슬 “파병 시기 상조론” 등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난 2차 파병 싸움의 경험에서 밝혀진 바는 이러한 열린 우리당 내부의 소위 “평화 세력”의 제스처가 사실상 정부의 전투병 파병안에 대한 국민들의 공격을 호도하는 기능을 했을 뿐, 막상 총선으로 바빠지는 시점이 되자 일제히 파병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볼 때 실제 전투병 파병 반대 싸움을 끝까지 책임지려 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이렇게 불철저한 세력에게 파병 반대 싸움의 주도권을 내맡겼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 데에 파병 반대 세력은 지난 2차 파병안 통과 당시 크나큰 댓가를 치러야 했다.

그 외연조차 애매한 “부패 세력 심판”이니 “반민주 세력 척결”이니 하는 기준만으로 총선에 개입하는 대신, 이 파병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운동이 지금 이 시점에 실로 절실하다. 그래서 단순히 상황 변화에 따른 보신술이나 개혁적 이미지 관리와 같은 동기에서 입에 발린 파병 반대를 말하는 이들로부터, 진정 체계적인 정책적 노선에 입각하여 과거로부터 흔들림없이 파병 반대 싸움을 해왔던 진실성과 내용을 모두 갖춘 성실한 평화 진보 세력을 갈라내어 파병 반대를 원하는 국민들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17대 국회에서 비록 작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파병 반대 세력의 핵심을 구성하는 일이 지금 이라크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한국에 절실히 필요한 희망의 씨앗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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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은 진보적 소장학자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캐나다 요크대에서 지구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와 <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2004),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 2006) 등 경제연구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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