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권 국가답게 전통적으로 북한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스포츠 종목이 있다. 기계체조, 리듬체조,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등은 남한이 돈을 쏟아 부어도 북한의 수준을 앞지르지 못한다. 모두 신체에 대한 극도의 지배와 통제를 전제로 한 종목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몸을 규율하는 스포츠가 집단화되어 나타날 경우 북한은 남한보다 앞선 정도가 아니라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집단 메스게임이 올림픽에서 채택된다면 북한은 단연 세계 챔피언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대규모 집체극에서 인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동작을 취하거나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리는 동작이 가능하려면 몸을 얼마나 혹사시켰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건 입을 다물 수 없는 장관이 아니라 전체의 한낱 부속품으로 떨어진 인간의 지위를 확인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런 몸이 자유로움과 발랄함을 알 수 있을까.
자본주의적 ‘욕망’에 중독된 나는 북한에 가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거기 여자들의 치마·저고리 차림, 짧게 깎은 머리를 한 남자들도 미학적으로 촌스럽고 구태의연하다. 미적인 낙후성은 정치적 태도의 퇴보와 보수성을 의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북한 체제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쪽 인민들의 일상이 그들 몸에 배어 있는 전체주의 체제의 본색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나처럼 한반도의 반쪽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은, 남북이 화해하여 서로 제약 없이 오가거나 통일이 될 경우 문화적 충격으로 겪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북한 인민들의 사고방식이나 일상적 태도와 충돌할 것이 확실하다. 싫든 좋든 남한 체제가 체질화된 나에게 장차 이질적인 것과의 부딪침에서 올 스트레스에 대해 극우 반공주의든 종북주의든 북한을 대하는 양극단의 시각은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 북한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반공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신들의 입만 시원해질 뿐 남북 사이의 이질감을 더욱 벌려놓을 뿐이며, 종북주의자들 역시 극우주의자의 반대 편에서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종북주의자나 극우 반공주의자나 서로를 한 하늘 아래 상종하지 못할 원수로 적대하지만, 맹종이든 맹목적인 적대든 그 뿌리를 찾아가면 한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북한을 친구나 악당으로 삼지 않으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북한은 실로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것이다. 고인이 된 황장엽을 빨갱이 괴수로 배척하지 않고 그에게 열광하는 반북주의자들의 자가당착은 그들의 논리로는 이상할 것이 없다.
흔히 종북주의자들을 진보 세력으로 바꿔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심각한 언어도단이다. 진보주의자라면 3대로 이어지는 세습 왕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무의미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독재는 독재이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다. 북한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껄끄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보일 수는 없다. 남한 체제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데 이용되는 탈북자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탈북자의 존재가 북한의 최대 약점 중 하나이며 남한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이 점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은 최고위급 탈북자인 고 황장엽에 대해서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수년 전 황씨가 기력이 있을 때 출연한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앞뒤가 맞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황씨는 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초라한 노인 이상의 인상을 주지 않았다. 황씨는 인민의 배신자도, 북한 민주주의 투사도 아닌 다른 탈북자들이 그러하듯 체제 이탈자일 뿐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근거지를 영영 벗어나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황씨가 떠들썩하게 탈북하던 당시 진보를 자처하는 한 인사는 황씨에게 자기반성 없이 투사로 자처할 생각이면 북한에 도로 돌아가라고 신문에 기고했다. 논리적으로야 그르지 않지만 갈대보다 허약할 수 있는 인간의 외로움과 고통을 모르는 잔인한 주문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체제를 등 돌려 세우고 생존과 영달을 도모한 황씨에게서 나약하고 애처로운 인간의 평범한 모습을 읽어낼 수 없을까. 황씨를 포함한 탈북자들이 아무리 큰 약점을 갖고 있더라도 자신의 나라를 벗어날 처지에 내몰리지 않는 남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어디까지나 약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종북주의자에게는 없다.
주사파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1980년대 운동권 주류였던 종북주의자들은 90년대 벽두에 남북이 유엔에 공동으로 가입하면서 기반이 흔들리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은 박정희 시대 이래 남한이 북한에 줄곧 요구해오던 것인데, 종북주의자들은 분단을 영구 고착화하는 음모라며 반발해왔다. 막상 남북이 유엔에 나란히 가입하자 분단 고착화라는 말은 이들에게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후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90년대 후반 북한에 밀어닥친 대규모 재해와 아사 사태 이후에는 젊은 날 북한 단파 방송을 몰래 청취하며 김일성주의자 행세를 하던 이들이 극우로 전향하며 종북주의자의 입지는 뿌리째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종북주의자들은 자기반성도 없이, 남북 모두 포기할 수 없었던 적대적 의존 관계를 자양분 삼아 명맥을 이어오다 민주노동당으로 정치세력화를 이루었다.
종북을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이들은 한때는 민노당 우파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노당 좌파들은 종북주의 논쟁 당시 대거 이탈하여 딴 살림을 차렸으니 종북은 민노당 전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북한을 추종하는 이들은 이념적으로 진보와는 거리가 멀며 보수의 가치에 충실한 민족주의 우파에 가깝다. 이들의 이념적 보수성을 가려주는 데는 분단 구조가 크게 작용했으며, 분단 구조에 기생하려는 극우 집단이 자리를 비켜준 덕에 왼쪽으로 치우친 것처럼 착시를 일으킬 뿐이다. 보수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움보다 집단과 공동체를 중시하고, 미래의 불확실성과 모험을 추구하기보다 과거의 좋았던 어떤 시기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그 과거가 그렇게 향수를 일으킬 만한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이들의 안중에 없다.
그들은 통일을 이상적인 장밋빛 미래로 그릴 뿐이지만 이미 지난 역사에서 통일 상태는 경험했던 것들이다. 분단과 전쟁 이전 둘로 쪼개지기 전의 역사가 그것이다. 그때는 물론 분단모순은 없었지만 지금은 겪을 수 없는 그 시대 나름의 문제가 있었으므로 통일을 ‘오래된 미래’로 삼아야 할 만큼 분단 이전을 마냥 지금보다 나았던 시대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민족주의 우파들에게는 그런 성찰이 생략되어 있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추수하는 민노당의 본색은, 2006년 북한의 핵실험 당시 북핵을 지지하며 파란을 불러일으킨 당시 민노당 정책위원장의 입장 발표에서 분명히 드러난 바 있다. 핵무기를 한 나라의 자위 수단으로 옹호하는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3대 세습체제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듯한 현 민노당의 태도도 그에 버금갈 것이다.
지금과 같은 국력과 경제력의 차이로 보건대, 북한은 남한과 대등한 주권국가나 쪼개진 반쪽 차원이 아니라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분단이 극복될 시점에는 남한 사회복지 정책의 수혜 대상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될지 모른다. 변화하는 현실에 둔감하지 않고 체제 대결이 끝난 남북에 대한 냉정한 현실 직시가 필요한 때임을 주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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