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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식은 군대 안보낸 전쟁광들 체제에서 살아가기
[정문순 칼럼] "내 자식만큼은"...병역면제 기득권자와 소시민의 전쟁관
 
정문순   기사입력  2010/06/08 [21:59]
때로는 세상을 단순하게 파악하는 것이 사물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 눈에는 사회 현안마저 그렇게 보인다.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사회구조적으로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퇴임 후 인기가 수직 상승했던 고인의 인기가 현직 대통령의 열등감과 시샘을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라고 문제를 단순화시켜버린다. 이와 비슷하게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의 남북화해를 한순간에 물리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장하고 전쟁을 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는 자들을 이해하는 데도 정교한 사회과학적 방법을 동원할 능력은 없다. 전쟁에 미친 자들은,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 감정대로 진단한다. 

천암함 사태 직후 대통령이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열자 이를 비웃듯 태반이 병역면제자인 현 정부 각료들의 명단이 인터넷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만약 병역면제를 받는 데 편법이나 불법이 동원되었다면 그건 징집 연령인 20대의 당사자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므로, 본인보다 부모에게 더한 비난과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유력한 대선 주자였다가 두 아들이 모두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면제 판정을 받았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의 경우는 기득권 세력 중 예외가 아니었다. 

현 정부의 경우 1기 내각에서 각료 후보자 29명 중 무려 자녀 6명이 미국 시민권자나 이중국적자로 드러났다. 시민권이나 이중국적은 아들이나 손자의 병역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아들은 최중과다라는 이유로 군대에 가지 않았고, 백희영 여성부장관은 아들이 현역 판정을 받은 지 2개월도 안돼 정신병 진단을 받고 보충역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정신을 회복했는지 유학까지 갔다. 그 자신이 병역 면제인 정운찬 국무총리의 경우 아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말라고 종용했다고 스스로 실토해서 인사청문회에서 자질 시비에 올랐다. 어쨌든 아들은 병역을 마쳤다고 하니 미국 시민권 문제는 장차 손자의 병역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을 것이다. 

화약고에 가족의 생사를 걸어놓지 않은 자들이 쉽게 전쟁을 말할 때, 최전방에 가족을 둔 사람들은 과연 남북간의 갈등이 교전이나 전쟁으로 치달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리 믿어주고 싶어도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부의 천안함 격침 주장을 설령 믿는다고 하더라도, 46명의 젊은이들을 서해 원혼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북한의 버릇을 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피를 흘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이를 수 있을까. 그 피가 내 혈육이고 가족이 흘려야 할진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생각은 터럭만큼이라도 일어날 수 없다. 최전방은커녕 현역으로도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자들만 마음 놓고 전쟁타령을 벌일 수 있을 뿐이다.

내 어린 날 군에 간 오빠가 배치 받은 군대는 하필이면 최전선이었다. 군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게 군대는 오빠가 경계를 섰던 전방이 섭씨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곳을 말을 듣고 몸이 오싹하던 감각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엄마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건 입김도 얼어버린다는 날씨 따위가 아니라 서로 칼끝을 겨누고 대치하던 남북간의 끝도 없는 긴장 상태였다. 공비가 부산 다대포 앞바다까지 출몰하고 아웅산 테러가 일어났던 때였으니 남북간의 교전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쌍방간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한 긴장을 주고받아야만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이어갈 수 있었던 시대는 최전선에 아들을 보낸 엄마를 통제하기 힘든 공포로 몰아넣었다.  

어느날 밤 엄마가 잠자리에서 잠꼬대 비슷하게 “제발 전쟁이 일어나지 마라”라고 혼자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은, “우리 아들이 군에 있을 때만은”이었다. 엄마에게 아들의 안위는 당장 눈앞의 일인 반면, 전쟁을 실제로 경험한 기억이 남아 있는 엄마의 정서와 당시 남북한 정세로 보아 평화를 바라는 건 비현실적이거나 가망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들을 비껴가는 항구적인 평화를 기원하기에는 엄마의 긴장이 지나치게 컸던 탓이라고 믿고 싶지만, 아들의 안위밖에 모르는 이기심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남북간 첨예한 갈등을 조장하고 즐기는 자들일수록 자신이 위험한 지경에 빠뜨려 놓은 군에는 제 자식을 보내지 않기 위해 원정출산을 감행하고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못꿀 면제도 잘도 받는 현실은 우울하다. 안보에 털끝만큼도 제 몸으로 기여한 적 없는 자들이 국민의 안보의식을 조롱하며 전쟁 분위기를 선동하고, 위험한 군대를 회피하지 않을 안보의식은 힘 없는 국민들의 몫으로 밀어놓을 뿐 자식을 현역에 보내지 않을 힘이 있는 그들만은 비껴가는 현실은 우울을 넘어 분노스럽다. 천안함 사태 희생자들도 모두 가진 것 없는 서민의 자식이었다.

자신들에게 권력 기반을 내주지 않는 평화와 안정은 그들만이 누려야 할 몫인 반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긴장과 위기는 모조리 힘 없는 국민들의 몫으로 밀어내는 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 스스로 증명해주는 자들일 뿐이다.

자신의 권력을 있게 해준 기반에 기꺼이 감사하는 미덕을 갖추려면 불구덩이에 제 자식을 기꺼이 밀어넣을 줄도 알아야 한다. 전쟁이 두렵지 않다는 대통령의 말은 진실이 아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전쟁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는 미친 게 아니라, 자기 식구 빼고 다른 국민이 죽는 전쟁이 두렵지 않을 뿐이다. 권력자들이 전쟁 도박을 벌인 덕분에 엄마에게 전쟁은 목전에 육박하는 현실이 되었다.  

국민에게 맹목을 요구하고 그 자신은 철저하게 양지와 이익만 좇아 탐하면서 국민을 불구덩이에 넣으려는 자, 전쟁 위기를 체감하는 능력이 없다고 국민을 비웃는 자, 이런 자들이 권력을 쥔 나라는 어떤 시민을 만들어낼까. 전쟁은 절대로 안된다며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인가, 아니면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자기 자식의 안전만 바라는 국민인가. 자기 자식이 군에 있을 때만 북한의 아량을 바라는 소시민의 존재가 어처구니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전쟁을 먹고사는 수구집단의 지반이 견고할수록, 자신의 가진 것 없음을 깨닫게 되는 서민은 주어진 틀 너머의 다른 세상을 꿈꾸기보다 그 기만적인 체제에 기대어 이기적인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제 손으로 만든 체제에서 자식들을 이탈시켜 안전지대로 대피시키는 지배집단의 몰상식이 가능한 세상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세상의 남자들은 군대를 기피할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단순하게 나뉘며, 현역 제대 군인들은 자신을 ‘어둠의 자식’으로 조소하며 병역 기피 만들 재주가 있는 부모 덕분에 입대를 피했거나 공익으로 빠졌던 ‘신의 자식’들에게 울분을 느끼면서도 이 억울한 체제를 뒤집어엎을 상상은 꿈꾸지 못한다. 어쩌면 속에 누적된 불만을 여성이나 양식적 병역거부자 등 군대기피와 아무 상관도 없는 약자들에게 투사하는 경향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닐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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