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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과 김예슬의 ‘선언’, 한국의 미래
[비나리의 초록공명] 김예슬의 책은 ‘지금 바로 여기’의 문제 제기
 
우석훈   기사입력  2010/04/21 [05:48]
1.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여러 단체들이 있다. 올해는 특히 고민이 많을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김예슬의 <김예슬 선언>,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아직 올해가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아마 이 두 권의 책을 제외한 다른 책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다면, 판매량과 메시지와 상관 없이, 그 단체는 그것이 언론이든 문화단체든 이 시대를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니 말이다. 

미덕을 얘기해보자.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이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물론 이 사회를 그냥 내버려둔 나 자신도 돌아보게 하지만, 역시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 고려대학교 교정에 대자보로 시대의 양심을 찌른 김예슬 씨의 선언문.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고 잇다.     © 느린걸음, 2010
김예슬의 책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물론 그의 책도 이 사회의 구조를 돌아보게 하지만, 멍 때리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미덕을 가지게 하고 있다.

가장 나쁜 책은, 왜 샀는지, 광고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그거야말로 악마의 목소리일테니 말이다. 

악마가 뭐 별거냐? 너나 잘 하면 돼... 

올해 상반기에 나온 이 두 권의 책은 다른 잘 나가는 책을, 순식간에 악마의 목소리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 '소돔과 고모라'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단 한 명만 제 정신이라도, 너희를 용서하겠다... 다행이다. 이 두 사람 덕에 대한민국이 불바다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박해자이면서, 동시에 대속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하여준 것이다.

법조인 김용철의 책이 다분히 경제학적이었다면, 경영학도 김예슬의 책은 다분히 신학적이다. 대속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2.

나는 두 번 그만둔 적이 있다.

한 번은 에너지관리공단 3급 부장에서 2급 부장으로 승진을 생각하던 즈음에. 아마 1~2년 참고 버텼으면 사업단장이나 작은 처의 처장 정도가 되었을텐데. 더 이상 공부를 안하면 이제 공부는 더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 두었었다. 후회한 적은 없다. 

또 한 번 그만둔 것은, 실제로는 연말이지만, 그만둘 것을 결심한 것은 작년 5월의 일이었다.

15년간, 보통은 겸임교수, 아니면 시간강사 신분으로 대학에서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 보통은 대학원 수업에서 박사과정들을 가르쳤는데, 어쨌든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

작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여수 앞바다에서 마음을 먹은 일이다.

사람들에게는, 별 돈도 안되는 강사를 계속하는 게 힘들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하는 게 너무 힘들어져서,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학생들이 변한 건가, 내가 변한 건가. 나는 학생들 쪽이 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모른다. 어쩌면 내가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연말에, 15년간 몸 담았던 대학이라는 공간을 떠나면서 딱 한 마디를 신문에 남겼다. 별 얘기는 아니다. 상대평가 대신에 절대평가로 바꾸자, 그런 글 하나를 남기고 대학이라는 곳을 떠났다.

그 때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났다. 

대학은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지금은 '소돔과 고모라'이다. 뒤를 돌아보면, 소금기둥으로 변할 것 같은 그런 곳이다. 

그래도 나는 한 소리도 못했다. 

대학의 부패를 내 위치에서 본다면, 기절초풍, 상상초월. 신문으로 보거나 TV 보면서 상상하는 그것과 궤와 질을 달리한다. 안 썩은 곳이 사실상 단 한 곳도 없어보였다.

한국에서의 대학 개혁,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이건 내 얘기이다.

3.

김예슬의 책은, 한국이라는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 바로 여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

김예슬의 책은 결계와도 비슷하다. 마방진 구조라고나 할까...

일단 들어오면, 도무지 도망갈 구석을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순환과 격자의 기하학적 문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결계 구조이다. 도저히 답하지 않고 빠져나갈 틈이 없다. 


답하지 않고 도망간다면, 그냥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나는 도망갈 틈을 찾지 못했다. 

 김용철 얘기는, 그래도 그건 삼성 얘기니까 혹은 잘 사는 사람들 얘기니까 도망갈 틈이 있는데, 김예슬의 논리 구조는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 

 4.

 책을 덮고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대로 망하고, 불타버리거나, 아니면 도망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소금 기둥이 되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가느다랗게, 살 길이 열릴 것인가?

그 어느 편이라도 우리가 신의 저주를 받고 죽지 않는다면 김예슬의 글은 결국 교과서에 실릴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 실리거나, 아니면 국어 교과서에 실리거나. '올해의 책' 정도로 끝날 경미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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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4/21 [05:4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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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일규 2010/04/23 [15:05] 수정 | 삭제
  • 나의 요지는 간단하다.

    1. 김용철 변호사가 왜 주목받아야 하나.
    2. 정태인 교수가 왜 "노무현 정부는 삼성공화국이다"고 징징 거릴까.
    3. 김예슬 주목받을 이유가 있나.

    난 간단하게 말한다. 김용철 변호사가 주목받고 정태인 교수 말이 기사화되는 것보다 양문석 박사는 대통령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왜냐? 2005년, 2006년 그 무렵에 노무현 정부는 삼성공화국이라고 했으니까. 그 명문들을 대자보에 다 남겨놨지 않나. 지금 맘만 먹으면 20초 내로 다 검색할 수 있다.

    그때 정태인은 뭘했으며, 김용철은 뭐했나. 아니 김용철은 낫다. 삼성에 있었으니까. 정태인은 뭘했나. 자신이 청와대에서 할 수 없었다면 폭로전이라도 했어야지. 정권 끝나고 나서 뭐하자는 건가. 시체 부여잡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보신당 당원, 성공회대 교수 정태인보다 청와대 소속 정태인이 언론 폭로전에서도 효과적일텐데)

    김예슬이 왜 주목받나? 또 고대~ 그놈의 고질적 SKY. 학벌 논의는 다 필요없고. 하나만 말하면 김예슬은 하나의 루저일 뿐이다. 김예슬에 열광(?)하는 진보진영은 내부고발자, 내부비판자가 가할 수 있는 타격이 크고 효과가 크다는 걸 모르고 있다.

    고대는? SKY는? 그들이 보는 김예슬은? 하나의 루저다. 그 속에서 싸워 주류교체 못하고 뛰쳐나간 찌질이니까. 사실이다.

    에 한 명문대 지방캠퍼스 듣보잡이라고 자칭한 사람이 쓴 글을 보니 "고대 아니면 언론사들 기사나 썼겠냐"고 하더라. 김예슬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김예슬에게 난 1원도 줄 수 없다. 그 사람에겐 돈만 있다면 1억은 그냥 주고 싶다.
  • 연애편지 2010/04/22 [21:32] 수정 | 삭제
  • 비나리님의 글을 읽다보면 비나리님 자신에 관한 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글 자체를 보면 의미가 있겠지만, 저는 자꾸 우석훈씨와 김용철씨가 겹쳐보입니다.

    김용철씨는 양심선언을 통해 부를 잃어버렸지만, 삼성의 치부를 뒤치닥거리하는 일에서 자기 스스로 속죄받을 수 있었겠죠. 본인은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후에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석훈씨도 크고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삼성재단의 지원금을 받았다는지, 현대시절이라든지 그가 일종의 커밍아웃을 통해 88만원 세대를 제시하면서 그 역시 가난하더라도 스스로의 양심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겠죠. 물론 순전히 저의 추측이긴 하지만요...

    예슬양의 경우에는 힘든 선택을 했기에, 그녀의 용기에 진심으로 존경할 따름입니다. 물론 그녀는 예전에 우석훈씨가 블로그에서 비난했던 세속적인 학생은 아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슬양의 용기는 88만원 세대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즉 우석훈씨가 말하고자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과 우석훈씨 비판했던 88만원 세대 자체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못한 세속적인 대학생들과 대비됩니다. 그녀의 용기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김용철씨나 김예슬씨보다 돌아가신 박지연씨가 떠오릅니다. 어째서 우석훈씨의 글을 읽으면 박지연씨같은 분들은 떠오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용철씨나 김예슬씨의 일은 후에도 잊지 말아야 겠지만, 그렇다고 그 개인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김용철씨의 양심선언이 있기까지의 삼성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저항하고,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김예슬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수많은 사람들의 일탈과 노력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이는 박지연씨처럼 단지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잊혀진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비나리님이 지식인으로써는 노력한다고 생각하고, 사회과학, 경제학 입문에 도움을 주신점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비나리님의 글을 읽다보면 씁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비나리님의 글은 김용철씨의 양심선언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매트릭스의 이면을 보여주고, 잘하면 예슬씨처럼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을지 몰라도, 한국이라는 공간,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안에 있는 노명박(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이라는 괴물로 인해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삶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계급의식의 한계라고 하든, 아니면 저만의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비나리님의 글을 읽다보면 굉장히 독선적이고, 과거 진보, 좀 더 나아가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계몽의식? 엘리트의식? 이런것보다도 그들의 관점에서는 현재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에 대한 결핍이 느껴집니다.

    앞으로는 더이상 대자보에서 비나리님의 글을 찾거나 죄송스런 댓글을 달지 않을 것입니다. 건승하시길 바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