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전 11시 분당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들과 피랍 가족들에게 사죄 한다”고 밝혔다. 피랍이 일어난 지 닷 세 만이다. 그리고 이틀 후인 25일 분당샘물교회 부목사이자 이번 단기선교 팀장인 배형규 목사가 살해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배형규 목사의 희생은 한국군이 파병된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첫 비극은 아니다. 올해 2월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부대 장병 윤장호(당시 27세) 하사가 폭탄 테러로 희생됐으며, 2004년에는 자이툰 부대가 전개돼 있는 이라크에서 김선일(당시 34세) 씨가 무장단체에 피랍돼 무참히 살해됐다. 아프간 사태의 원죄는 부시정권에게 있고 노무현 정권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이번 피랍 사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분당샘물교회의 담임이자 한민족복지재단의 이사장인 박은조 목사에게 있다. 그렇다면 그는 사건 발생 즉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피랍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박 목사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탈레반과의 협상에 직접 참여했더라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하는 궁금함이 든다. 혹시 지금쯤 배형규 목사뿐 아니라 23명의 인질 모두 가족과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져 보는 것은 나만의 순진한 감상일까? 아무튼 귀한 생명 하나가 우리 곁을 떠났다. 나 역시 나머지 22명의 무사귀환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원하지만,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다고 해도 배목사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냉철히 책임을 추궁해야만 한다. 배형규 목사의 죽음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인류의 과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장 책임을 져야할 박은조목사와 그 외 박 목사와 직간접인 관련이 있는 기관, 단체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하는 문제부터 따져보자. 21일: 박목사 귀국 22일: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장 성명서 발표(회장: 이영일, 한민족복지재단 이사) 22일: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과 관련한 한민족복지재단의 입장” 발표(회장: 김형석) 23일 오전 11시: 박은조 목사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 기자회견 23일 오후 5시: 피랍자 가족들 대국민 호소문 발표 23일: 미국무부 한국인의 석방을 촉구하는 논평 발표 26일: 한기총 성명서 발표 박은조 목사의 기자회견에 나타난 사과는 진성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기총,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한민족복지재단 등의 논평도 의례적인 수준이다. 한편 박 목사의 사과 내용이 참이라면, 그는 향후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 반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 해야만 한다, 그뿐 아니라 이미 재개정되었지만 사학법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알리는 홍보에도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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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교회의 이번 아프간 파송이 선교활동이라는 누리꾼들의 지적과 이를 보도한 MBC 뉴스 © MBC 화면 캡춰 |
개신교 단체가 행하는 의료, 교육 행위는 선교 목적이 아니고 순전히 인권 차원의 봉사이므로, 모든 사학재단은 강제채플을 없애고 교목 등의 제도도 사라져야한다고 소리 높여 외쳐야만 한다. 기독교가 운영하는 병원에 근무하는 원목도 교회로 복귀해야 된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파의 하나인 예장 고신에 속한 샘물교회의 당회장인 박 목사가 사학의 문제점과 의료, 복지 재단의 비리 행위 근절에 앞장서는 모습을 과연 볼 수 있을까? 그가 진실로 참회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면, 면피용 같은 사과를 할 게 아니라 일단 목사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 줘야했다.
그는 그동안 너무나 거짓말을 많이 했다. 영동 교회 담임으로 재직 시 8개의 교회를 분가시키면서 대형 교회의 문제점을 웅변했던 그가 정작 자신이 개척한 교회는 대형 교회의 모습을 본뜨기 바빴다. <뉴스앤조이>의 발행인으로서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다니면서도 한편으론 자신만의 성을 세우기에 급급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란 외래어가 있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귀족의 의무’ 정도가 또 다른 뜻풀이가 되겠는데 서구 사회에서 귀족의 자식이나 부유층의 자식이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최전방으로 보내게 되고, 또 그런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고 한다. ‘귀족’으로서, ‘고위층’으로서 그 사회에 져야 하는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상이다. 이외 그 사회 내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는 것도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고 사료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전에 왜 귀족층이 있어야하는 가에 대한 성찰이 없음이 그 한계라고 생각한다.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자. 전쟁 발생 시 자식들을 최전방에 내세움으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있다는 황홀한 고백 이면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하는 염원도 숨겨있음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 화려한 실천이전에 왜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제외한다는 뜻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행위는 물론 중요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이러한 불우 이웃이 생겨야 했는지에 대한 고민과 그러한 불우 이웃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성찰이 선행되어야한다는 의미이다. 불행하게도 노불리스 오블리제 조차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상황에서 너무 큰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는지 모르겠으나 분명 인간은 그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자각은 언제나 필요하다는 뜻임을 강조하는 의도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기독교는 배타적 선민의식을 나름대로 호도하는 방편으로 사회적 구원을 내새운다. 그 방법론으로서 기독교의 사회봉사 활동은 타 종교에 비해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개발도상국을 거친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학교, 병원 등을 위시해 크고 작은 사회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사회적 신뢰를 획득했음이 사실이기도 하다. 문제는 기독교의 이러한 선행이 순수한 혹은 자발적 사랑의 표출이 아니란 데 있다. 즉 기독인의 선행 그 이면에는 전도라는 목적이 언제나 함께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선행 행위는 귀족층의 의무감에 의한 행위와 너무나 유사하다. 부언하면 기독교의 선민사상은 자신들을 귀족화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 구원 그리고 개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적의식에서 행하는 구제 사업은 언제나 음모의 냄새가 난다. 마치 귀족이 선심 쓰는 추악한 취미 생활로 보여 진다. 기독교만이 길이 아니고 기독교만이 진리가 아니며 기독교만이 생명이 아니란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현실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기독인들만 모르고 있다. 기독인들은 자신들만이 선민이라는 오해에서 하루라도 벗어나길 바란다. 개인구원 사회구원이라는 그 뜻이 개인 그리고 사회의 기독교화라는 목적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람사랑이 되었으면 한다. 나머지 22명이 무사히 귀환해도 박은조 목사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슈바이처였는지 혹은 또 다른 선인이 말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통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인류의 적이다." 라는 말이 기억난다. 대부분의 종교가 가장 무서운 형벌을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계속되는 지옥의 고통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심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고,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심각함’이 어떤 것인가를 체득한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심각함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3명의 피랍자와 가족들에게 고통을 경험하게 한 박은조 목사는 그만큼의 고통을 함께 감수해야만 할 위치에 있다. 지금 즉시 사퇴하라. 그리고 사재를 팔아 나머지 인질의 석방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도록 하라. 한민족복지재단 이사장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함도 물론이다. 그래야만 고인이 된 배목사의 영전에 조그마한 속죄가 되리라 본다. 세간의 비아냥을 감수하는 것은 오늘 현재 박은조 목사가 책임을 져야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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