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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형규 목사의 죽음에 기독교가 책임 있다!"
이제는 선교정책이 아닌 배타적 교리의 폐지와 선교신학의 수정으로
 
정강길   기사입력  2007/07/27 [19:30]
한국교회 선교의 궁극적 목적, 인도주의 차원인가? 기독교신자화의 차원인가?

이 나라가 온통 아프간에 피납된 한국인 인질사태로 들끓고 있다. 게다가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된 사건의 발생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로서는 이번 사안에 대한 -국제관계 문제나 정부정책 대응의 문제와는 별도로- 내가 서 있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앞으로도 이 같은 비극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위해선 우리네 기독교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 지에 대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참으로 생명을 잃는 비극적 사건들이 더 이상 일어나선 곤란하잖은가.

내가 보기엔 예전의 고 김선일 사건에서도 제기되었던 문제처럼 이번에 일어난 아프간 지역 탈레반의 인질 사건 역시 이미 현존하고 있는 불안한 국제정치 관계의 불균형과 기독교의 배타적 선교정책이 서로 만나게 되면서 발생하게 된 사건이라고 본다.

이번 아프간 지역에 들어갔던 선교단체의 활동은 정말로 순수한 봉사활동이었을까? 의료봉사활동과 구제활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아프간 여행에 대한 분명한 주의와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들을 그 지역으로까지 가도록 이끌었을까? 만일 순수한 사회봉사활동이었다면 그 같은 봉사활동의 경우 위험지역에 대한 민간인의 방문도 정당화될 수 있고 개의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인가?

기독교인을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믿고 있는 그 신념체계에서 비롯

한 번 잘 생각해보자.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저들이 왜 거기에까지 들어갔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 사실상의 기독교인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게끔 만들고 행동을 움직이게 만드는 궁극적 요인은 무엇인가? 결국은 그 기독교인이 절대적으로 삼고 있는 신념체계인 것이다.

이때 기존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삶을 추동하는 그 신념체계의 실체는 뭐니뭐니해도 기존 기독교가 절대명제로 삼고 있는 그 전통교리에 있다. 바로 그것이 대부분의 보수 기독교인들의 삶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신앙원리이자, 그것이야말로 기존 기독교가 지금까지 수호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것의 실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를 믿으면 죽은 뒤에는 천당에 가고 믿지 않을 경우엔 영원형벌의 지옥에 가게 된다"고 줄창 얘기하는 기독교의 이 명제들은 비기독인들에게 대한 구원사역인 선교사업에 있어서 끊임없이 관여되는 핵심 내용이다.

저들은 왜 아프간에 갔던 것인가? 바로 비기독교 지역의 복음화에 대한 열렬한 바램이 마침내 교회의 선교사업으로서 추인되고, 그곳이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기독교인들을 전세계 곳곳의 오지에까지도 파송하여, 수단적으로는 의료사업을 하든 구제사업을 하든 궁극적으로는 저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드는 데에 그 최종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온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기독교 왕국을 만들겠다는 이 신념이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

기존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다른 종교로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안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겐 어떻든지 접근하고자 하는 열혈성이 기독교 안에는 있다.

따라서 진짜로 먹이고 싶은 당근은 의료사업 및 구제사업 같은 인도주의 차원이라기보다 결국은 기독교 신자화 즉, 저들의 뇌에 심어놓고자 하는 기독교의 배타적 교리의 주입인 것이다.

민들레밥집 두타스님 굴욕사건에 나타난 기독교의 오만

현단계에서 뜻밖에 사건 하나가 또 다른 한 켠에서 발생하였다. 이번에 네티즌들에게 사진 하나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보도에 따르면 민들레밥집을 운영하는 두타스님의 굴욕사건이라고 한다.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타 종교를 인정안하는 기독교의 횡포”라며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 문제의 사진 ⓒ 엠파스 검색  
 
기독교인이라는 저 아저씨는 왜 스님의 머리에다 저렇게 손을 얹는 오만불손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기독교인들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 도대체 기독교인들에게서 저러한 행동양태들이 종종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기독교인의 열망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명제를 안믿는 자들에게 주입시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 기독교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배타성과 오만일 뿐이다.
 
그렇다고 두타스님 굴욕사건에 나타난 저러한 식의 행동양태를 보이는 배타적 기독교인과 이번 아프간에 봉사활동을 갔다는 선교단체가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아프간에 간 선교단체는 인도적인 봉사활동을 펼쳤잖은가. 그렇기에 단지 내가 여기서 거론하고자 하는 공통점은 단 하나다. 두 사건 모두 믿지 않는 저 불쌍한 비기독교인들의 영혼을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여 구원토록 해야겠다는 바로 그 의지의 발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선교정책을 넘어 배타적 교리의 폐지와 선교신학의 수정으로

물론 이번 아프간 지역의 인질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는 비기독교 지역에 대한 선교정책을 다소 수정할 가능성은 높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전히 수정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지점은 한국교회가 극렬하게 지니고 있는 배타적 교리의 차원일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만일 기존 기독교가 계속적으로 배타적인 교리를 유지하면서 선교정책을 펼 경우(그 선교정책에 인도주의 활동이라는 당근도 함께 갖고 있든 어떻든 간에) 그 같은 기독교의 확장은 궁극적으로는 <배타적인 기독교제국주의>를 고수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갈등과 충돌이 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나로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에 아프간에서 배형규 목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에는 기존 기독교의 선교신학이 가지고 있는 배타주의 입장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기존 기독교가 아무 책임도 없다고 보는 것야말로 앞으로의 기독교 선교에 있어선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본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으로는 생명을 살해한 자들에게 있겠지만, 이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제 분쟁 지역인 아프간으로 들어갈 때부터 죽음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었기도 하잖은가.
 
이에 대해 강경한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선교에는 어쩔 수 없이 순교도 따른다고. 즉, 결국은 그 같은 죽음의 위험성보다는 교리의 수호와 전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바로 대체적인 기존 기독교의 입장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그동안 혈신앙을 갖고서 세계 곳곳의 오지들 혹은 불안한 분쟁 지역이라고 해도 죽음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서 선교사와 선교단체들을 내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로서는 분명히 말하지만, 그 같은 배타적 교리의 폐지와 선교신학의 수정이 없는 한, 앞으로도 생명의 안전성을 확보하기란 여전히 힘들 것으로 본다. 그 같은 기독교야말로 사람을 살린다기보다 오히려 죽일 수도 있는 기독교다. 지구촌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 이제 기독교도 공격적 선교정책과 배타주의 입장만큼은 버릴 때도 됐잖은가!
 
한국교회는 선교의 주체이기 이전에 이미 선교의 대상일 뿐

전도나 선교는 교리의 주입과 확장이 아니다. 말그대로 진리로서의 도(道)를 전한다는 것은 세상 한 가운데서 예수의 삶을 본받아서 진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겠다는 의미이다. 신앙인에게 있어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점에 대해 그것을 시인한다거나 인정한다는 식의 그런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전적인 헌신이요 그것은 예수의 삶을 따른다는 의미다.

내가 볼 때 선교랍시고 각국에 선교사를 파생하는 한국교회야말로 전혀 예수의 삶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은 선교의 주체라기보다 선교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한국교회만큼이나 단기간에 선교강국으로까지 떠올랐던 사례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매우 드문 것이다. 하지만 더 놀랍게도 한국교회는 대체로 <예수의 역사적 삶>을 따른다기보다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고서 이를 전파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삶을 사는 것과 기독교 교리를 전하고 주입시키는 것은 다른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자화>와 <복음화>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이 구분에 대해선 본인의 졸저 『미래에서 온 기독교』pp.352-360. 참조).  사실상 오늘날 기독교의 선교 지역은 저 먼 나라의 오지가 아니라 놀랍게도 바로 기독교 그 자신인 것이다.

즉, 정말로 사람을 더이상 죽이질 않고 더불어의 생명들을 살리고자 하는 기독교가 되고자 한다면, 한국교회는 환골탈태할 각오로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선교정책도 수정되어야 하겠지만 더 크게는 이를 넘어서 있는 새로운 변혁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의 폐지와 선교신학의 수정이 더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천 년 전 당시 예수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존의 유대교 체제야말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선교 대상이었듯이 이제 앞으로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야말로 기존 기독교를 선교 대상으로서 삼아서 보다 적극적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적어도 이러한 마인드를 가지고서 새롭게 기독운동 진용을 갖출 수 있을 때 한국 기독교도 비로소 세계 열방에 빛과 소금이 되는 진보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글쓴이는 당당뉴스 신학전문기자와 논설위원 담당. 현재 세계와기독교변혁을위한연대(세기연) 기획실장. 저서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과 『미래에서 온 기독교』(에클레시안)가 있다. 세계와기독교변혁을위한연대 홈페이지 http://www.freeview.org 운영.

* 본 기사는 제휴사 <당당뉴스>(http://www.dangdangnews.com)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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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27 [19: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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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참 2007/07/27 [22:27] 수정 | 삭제
  • 환골탈퇴? 기가 막히누만...^^ 환골탈태가 맞다오... ㅉㅉㅉ 에구, 말해 무엇하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