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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전성시대, 법치주의는 절대선인가?
‘주권재민’ 공화국의 성숙한 시민이 없는 한 법치는 사법독재화하기 쉬워
 
이태경   기사입력  2004/10/25 [09:38]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숙원 가운데 하나는 법에 의한 지배였다. 이를 흔히 ‘법치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를 겪는 동안 헌법을 위시한 법률은 무시되기 일쑤여서 심한 경우 순전히 권력자들의 판단에 의한 살육과 고문, 투옥이 자행되곤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독재자들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들이었다. 이 잔인하고 탐욕스런 독재자들의 결단이 국민들 전체의 의사로 치환(置換)되었고 이것은 곧 헌법이 되고 법률이 되었다.

물론 독재자들의 결단을 구체적으로 이론화하고 법리화한 것은 법률기술자-교수, 판사, 검사 등- 혹은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들이었다. 이들은 독재자들의 생각을 질료(質料)로 해서 수다한 악법들을 생산해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법치’라고 정의할 때 건국 이후 대한민국은 ‘법치’보다는 ‘인치’(人治)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였다. 확실히 87년 6월 항쟁이 있기전까지는 그랬다.

▲과연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이고, 그 법치주의는 절대선인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가 왔다.     © 손경식 필름
87년 6월 항쟁 이전과 이후의 한국사회는 판이하게 구별된다. 87년 6월 항쟁 이전과 이후를 구분짓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인치’에 의해 작동되던 사회에서 ‘법치’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로의 이전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평가도 가능할 듯 싶다.

물론 ‘인치’에서 ‘법치’로의 이행은 고통스러우리만치 느리게 진행되고 있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괄목한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극명한 예가 지난 봄에 있었던 대통령 탄핵사태가 아닌가 한다.

한나라당과 이제는 그 존재마저 희미한 민주당, 자민련이 합심하여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일사천리로 의결한 사건만큼 생생한 ‘법치주의’의 존재를 보여주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의결로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었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헌법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야당의원들은 ‘법치주의’의 승리에 환호했다.

독재자의 결단(決斷)이 모든 것 위에 있던 과거였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야당의원들은 과거 유신시절 공화당 의원들이 남산에 끌려가 치도곤 당한 경험을 고스란히 되풀이 했을 것이고, 탄핵소추안 의결에 의기양양해하던 조,중,동 등의 수구언론은 남김없이 폐간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구언론사에서 생계를 해결하던 기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얼마 후 법조인과 고시생들 정도만이 그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던 헌법재판소는 순식간에 온 국민, 아니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오로지 헌법재판소 9명 재판관들의 손에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

‘정치적 사법재판기관’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설명에 충실한 우리의 헌법재판소는 총선이후에야 앞뒤가 다소 맞지 않는 결정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청구를 기각시켰다. 각하(却下)하리라는 대다수 법조인들의 의견과는 다른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에 대한 준엄한 충고(?)도 친절하게 빼놓지 않았다.

비록 사회적 손실은 심대했지만, 대통령에 대한 일련의 탄핵사태는 비로소 대한민국이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사회로 상당정도 이전하였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이건, 반대했던 사람이건 이 점에 있어서는 대체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법률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사회임을 보고 안도했고 값진 자부심도 느꼈다. ‘법치’가 제대로 기능하는 한 사회는 예측가능해 질 것이고, 갈등은 합리적으로 조정될 것이라는 믿음이 시민들을 지배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법치주의’가 그리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완벽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신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바로 그 같은 인식의 전환을 강요한 사건이었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상실한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격이라는 비판적 견해에서부터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라는 해석 까지 참으로 구구(區區)하다.

그런데 그러한 해석 가운데 ‘과연 법치주의는 절대선인가?’하는 고민은 생략되어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이번 헌재의 위헌 결정도 형식적으로는 ‘법치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는 대체로 희극에 가깝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역시 헌법과 법률은 이를 산출한 체제 내지 사회의 유지를 제일의 존재이유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률은 앞서나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앞선 질서와 이미 완성된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를 합목적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헌법과 법률은 그 성질상 진보 보다는 보수의 색깔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상황을 더 고약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사회의 법조인들이 지닌 가치관과 지향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법조인들은 기성질서와 체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일부 법조인들은 사슴과 돼지는 동등할 수 없다는 식의 봉건시대의 신분의식을 가진 듯 하여 심히 우려스럽다.

헌법과 법률이 지닌 보수적 속성에 더해, 한국사회의 전문가 직군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예컨대 몇년전 의사들의 일사분란한 파업동참-무슨 말로 미화하고 분식하더라도 결국은 의료수가를 인상해서 배터지게 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집단적 표현)조금의 역사의식과 도덕성, 사회적 책임감조차 지니지 못한 채 그저 배타적인 이기심으로 발톱까지 무장한 법조인들이 끊임없이 양산되는 한 ‘법치주의’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충실히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형식상의 법치주의의 구현이 아닌 실질적인 법치주의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민의가 충분히 반영된 법률을 입안할 수 있는 국회의원의 선출과 정의와 공익에 복무하는 인재를 충원할 수 있도록 하는 사법구조의 개혁일 것이다.

결국 민주공화국의 실질적 구현은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한 시민들이 늘어나야 가능한 것이다. 공화국의 시민들이 스스로를 신민(臣民)으로 자리매김하는 한 선출되지 않은 사법권력이 한국사회를 좌지우지 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는 헌법의 최고강령은 성숙한 시민들에 의해서만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 / 편집위원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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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25 [09: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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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씨 2004/10/25 [16:06] 수정 | 삭제
  • 법이라는 것은 지적하신 대로, 공평하지도 않고 절대선도 아닙니다. 법이 공평하고 절대선이라면 뭐하러 민의를 반영한 입법기관을 두고 또, 입법을 하는데도 여러 정당들이 각 사회 세력을 대표하여 치고받고 하겠습니까. 법(조문 또는 그 해석)은 오히려 그 사회 내의 여러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점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나름의 판단으로 선거에 참여하고 입법권, 행정권을 결정하는 주권자들더러 내 맘에 안든다고 성숙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종적으로 법은 이 주권자들의 선택의 결과이자 세력의 균형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력이 적은 쪽이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세력이 많다고 해서 제멋대로 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또한 법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는 역사적으로 법을 적셔온 피지배층의 피의 양에 비례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야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민의식이 성숙하지 못하고, 권력이 독재를 향해 치닫게 될 때는 사법 독재가 아니라 행정 독재, 입법부 독재의 '인치'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법권은 문제가 발생해서 그 해결을 사법권에게 요청했을 때에만, 여러가지 엄격히 제한된 방식으로만 권력 행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 있었던 독재 권력들도 주로 행정권, 입법권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고 부수적으로 사법권까지 거느렸던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숙한 시민이 필요한 이유는 대의기관인 입법권과 행정권의 선출과 감시에 일차적인 의미가 - 굳이 선후를 따진다면 - 있다고 하는게 자연스럽습니다.
    님께서 굳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사법 독재'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이유는 아마도 현재 사법부가 입법권과 행정권을 빼앗긴 수구 기득권 세력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해서인 듯 합니다.

    법을 일컫는 말에는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도덕이 양심이라면, 법은 정의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도 있지요.
    판결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수도 이전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수도권 과밀화 해소라는 시대적 정의를 구현하는 과정이 절차적 정의에 어긋났다는 점을 지적한 것 뿐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시대적 정의의 정당성을 내세워 절차적 정의를 무시하려 했다면 (인정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이야 말로 법치주의의 위기에 해당하는 '인치'요 행정부 독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법 개혁의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경제 개발이라는 시대적 정의의 이름으로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민주주의)마저 짓밟은 박정희, 전두환 이래 체질 개선 한번 안하고 이어온 것이 사법부이니까요...
  • 백수광부 2004/10/25 [16:06] 수정 | 삭제
  • 헌재의 관습헌법 인용에 대한 비판은 성문헌법 불문헌법 경성헌법 연성헌법의 원리를 가지고 해야죠. 그 원리를 깨버려서 헌법 전체의 질서가 깨진다는 거.
  • 무명씨 2004/10/25 [15:15] 수정 | 삭제
  • 법리에서 말하는 '관습'법이라는 것은 님이 말씀하시는 '법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법은 법 조항에 적시된 사회 공통의 합의를 근거로 해서만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변화하는 사회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때문에 입법부의 명민한 활동이 중요한 것도 님의 말씀대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입법부가 아무리 꼼꼼하고 기민하게 활동을 한다고 해도 언제나 예외적 상황, 특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법으로 '똥싸는 법'까지 규정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이러한 특수한 경우가 발생할 때, 법이 참고하는 것이 바로 '관습'법입니다. 이 때의 관습은 오래된 전통이라거나, 습관 같은 것을 (님이 공격하시듯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의심의 여지 없이 일반적으로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어떤 현상, 또는 관념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사람에게는 편안하게 똥을 쌀 권리가 있다고 합시다.(사례가 좀... ㅡㅡ;;) 이러한 부분은 물론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기존에는 대부분 있는 법 조항에 끼워맞춰서 판결의 근거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 모든 국민은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던지, 생명 유지 활동의 일부이므로 생존권에 포함된다던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애초의 요구했던 권리는 일부 축소되어 한정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러한 법치의 맹점을 수정, 보완하기 위한 개념이 '관습'이고, 관습(사회 구성원 일반에게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하게 받아들여지는 관념)으로서 모든 국민은 편안하게 똥을 쌀 권리가 있다는 것을 판결의 근거로 직접 받아들이는 것이 관습법입니다.
    그러므로, 법치주의까지 들먹이면서 헌재의 관습 헌법 인용을 비난하시는 것은 논지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여러가지 기본권을 법 조항 안으로만 제한하게 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