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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자사고, 학벌세습도 이제 내놓고 하나
[하재근 칼럼] 은평자사고는 부자들이 교육기회 독식하겠다는 신호탄
 
하재근   기사입력  2008/05/29 [18:32]
자사고에서 사단이 나기 시작했다
 
첫번째 상상.

내가 돈이 많다. 학원을 세웠다. 최고 시설 최고 강사진이다. 내 친지 자식들을 내 학원에 들여보냈다. 문제가 되나?
 
별다른 문제가 없다. 내 돈으로 만든 내 학원 내 마음대로 경영하겠다는데 누가 뭐랄 건가. 다만 일반 국민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위화감 차원에서 지탄 받는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두번째 상상.

내가 돈이 많다. 자사고를 세웠다. 최고 시설 최고 교사진이다. 내 친지 자식들을 내 학교에 들여보냈다. 문제가 되나?
 
크게 문제가 된다. 이건 민주공화국의 헌법정신을 위반하는 중대한 범죄다. 한국에서 자사고는 일류학교다. 특정집단이 일류학교를 사유화해 자식들에게 특혜를 준다면 일반 국민의 교육기회를 침해한 것과 같다. 교육기회균등의 원리를 위반한 범죄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서울시에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것이 은평뉴타운 자사고다. 하나금융지주가 설립주체다. 이 학교가 하나금융그룹 임직원 자녀 특별전형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느 재벌이 서울대, 연고대를 인수해 자기 임직원 자녀를 특별전형으로 입학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반 국민이 처절하게 사교육비를 대고 그 자식들은 생명을 갉아먹어가며 입시지옥을 통과하는데, 재벌구성원만은 편하게 일류대에 들어간다?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라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자사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려 한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교육청, 교육부 등과 최종 조율 후에 결정된다고 한다. 여론의 반발이 격심하면 없었던 일이 되고 언제나 그랬듯이 ‘오해’로 남을 것이다.
 
확정됐건 안 됐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건 설립주체가 학교를 설립·운영할 자격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학원과 학교를 혼동하고 있다. 자사고의 문제는 이렇게 공화국의 공교육이 뭔지도 모르는 주체들한테 학교를 맡기게 된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기업경영과 국가운영을 혼동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인들 놀라우랴만은, 이건 아니다. 공화국 공교육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기업들이 수익극대화 경영하던 버릇대로 학교를 운영하게 해선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사고 난립을 추진하며 동시에 학교자율화로 학교에 자율성을 주려 한다. 공교육의 민주적 맥락도 모르면서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학교를 설립한 주체들이 이 자율성을 어떻게 사용할까? 아이한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기업경영평가하던 버릇대로 국내외 일류대 진학자 숫자 극대화에만 몰두하며 공교육의 가치는 나 몰라라 할 것이다.
 
게다가 또 고려대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동창이다. 또 과거 이 대통령이 운영했던 회사의 투자자로 이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통합민주당은 하나금융지주가 자사고 운영사업자로 선정된 과정에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입김이 작용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이건 특혜다.
 
더 황당한 건 은평 자사고에 부지조성비로 서울시돈 650억 원이 투입된다는 사실이다.(뷰스앤뉴스 2008-05-27)
 
서울시민은 첫째, 일반 학교로 돌아올 예산이 자사고에 투입돼 손해를 보며, 둘째, 그 자사고 입학 기회를 특정 집단이 가로챔으로서 또 손해를 보게 된다. 이건 말로만 듣던 국민을 ‘두번 죽이는’ 교육이다. 정말 이명박 대통령의 나라에선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되는 건가?
 
이미 광양제철고에서 광양제철 임직원 자녀를 입학시킨 선례가 있긴 하다.
 
첫째, 지방은 교육환경이 워낙 열악하므로 이런 행위가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자구책 정도로 봐줄 여지가 있었다. 이번엔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자사고의 대폭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자사고로 인해 이 나라 교육이 얼마나 문란해질지 예상케 하는 시금석같은 사건이다.
 
둘째, 원칙적으로 지방이건 서울이건 교육기회의 사유화는 안 된다. 학원과 달리 자사고는 공화국의 학력 인정을 받는 정식 학교다. 모든 공화국의 국민은 공화국의 학교에 자기 자식을 보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대기업 관계자만 국민이고 농민, 중소기업종사자, 자영업자는 비국민이 아니다. 광양제철고에 이어 은평자사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자사고의 근본적인 속성이 부자의 교육기회 독식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한됐던 자사고를 전면화한다는 건 부자들의 교육기회 독식을 전면화하겠다는 의미다.
 
국헌문란 사태다. 공화국이 학교를 부자들에게 탈취당하고, 부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학벌을 세습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그 한 복판에 있는 것이 자사고다. 새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추진되는 자사고가 벌써부터 그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쯤 되면 ‘개판’으로 간다고 봐야 하나.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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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29 [18:3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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