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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이스라엘의 레바논 학살
[국제시론] 아우슈비츠가 된 레바논,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이태경   기사입력  2006/08/06 [18:49]
레바논, 중동의 아우슈비츠

혹시 쇼아 (Shoah, 1985)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는지? 끌로드 란쯔만(Claude Lanzmann)이 만든 이 영화는 히틀러 독일에 의한 유태인 학살의 실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끌로드 란쯔만은 무려 8년간의 촬영기간을 거쳐 추출해 낸 350시간 분의 인터뷰를, 편집을 통해 9시간짜리 '대작' 장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특이하게도 이 다큐멘터리는 뉴스 필름이나 당시의 기록 필름을 단 한 커트도 사용하지 않았다.

유태인 학살의 실상은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 나치 협력자들, 그리고 학살 작업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의 고통스런 고백을 통해 폭로된다. 이들의 육성을 통해 히틀러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추체험(追體驗)한 사람들은 근대문명의 광기와 인간이 지닌 악마성 앞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쇼아’라는 영화 생각이 난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에 대한 학살 때문이다.

포로가 된 자국 병사 2명을 구출하겠다며 엄연한 주권국가를 침공한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기반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민간인 주거지역에 대한 폭격과 포격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레바논이 석기시대로 되돌아 갈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이스라엘군의 표적이다. 구급차도, 구호품 수송 트럭도 심지어 아이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군이 발사한 미제(美製)미사일은 탐욕스럽게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미 900명 이상의 레바논 국민이 숨지고 3천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그중 1/3이 12세 이하의 어린이라고 한다. 레바논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되었다.

앞서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공격을 보면서 ‘쇼아’라는 영화가 불현듯 떠올랐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과 히틀러 독일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비교하는 것이 억지스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학살의 방법이나 규모면에서 레바논과 아우슈비츠는 여러모로 다르다. 그러나 양자를 관통하는 원리가 있으니 바로 ‘차별과 배제’의 원리가 그것이다.

히틀러 독일의 유태인 학살은,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인종주의’의 현대판 버전-이라는 사이비 과학이 근대적 과학기술 및 관료조직과 결합하였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유태인들은 우생법(優生法)에 근거해 아우슈비츠 등의 강제수용소에 보내졌고, 그 곳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학살당했다. 유태인들의 죽음은, 마치 통조림 공장에서 통조림이 가공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다.

근대의 과학기술과 관료조직 덕분에(?) 600만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비교적 단기간에, 매우 체계적으로 학살되었지만, 그 배면에 작동하고 있던 것이 ‘차별’과 ‘배제’의 원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태인들은 열등할 뿐만 아니라 인류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차별은 당연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멸종시키는 것이 인류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섬뜩한 생각이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을 때 ‘아우슈비츠’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열등한 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은 당연하고 유태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이들을 소거(掃去)해도 된다는 생각이 첨단 병기와 만날 때 ‘레바논’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라는 원리의 최대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그 원리의 가장 가혹한 가해자로 변신한 현실 앞에,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보편적 양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레바논 이후에도 시를?

일찍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詩)를 쓰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근대성과 인간성의 참혹한 파탄이라 할 아우슈비츠 앞에 던지는 지식인의 절망인 셈이다.

불행히도 인류는 아우슈비츠 이후 한 치도 진화하지 못한 듯싶다. 타 인종에 대한 증오로 무장한 채 레바논에 미사일과 포탄을 쏟아 붓고 있는 이스라엘 병사들과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류는 레바논 이후에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시(詩)는 몰라도 기록은 반드시 남겨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그 후견인인 미국이 전범이라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양식 있는 세계시민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영화이야기로 마무리하자! '쇼아'(Shoah)는 히브리어로 '절멸'을 의미한다. 유태인들이 당할 뻔 했고 지금 레바논 사람들이 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그 ‘절멸’말이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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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8/06 [18: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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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주 2006/08/07 [08:37] 수정 | 삭제
  • 기독교의 성경 중에서 여호수아 편을 읽어 보시라.

    이집트를 탈출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던 유태인들이 드디어 이스라엘로 들어온다. 들어오면서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전쟁을 벌인다.

    지금 레바논에서 벌이는 행각은 자기네 조상들이 몇 천년 전에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